지지라는 가장 조용한 힘에 대하여

존재가 버팀이 되는 순간들

by 구시안


세상에는 바람만 불어도 무너질 듯한 순간이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그때 나는 숨이 막히듯, 내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가라앉는 감각을 느낀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생각보다 감각이 먼저 무너진다. 모서리마다 날카로운 그림자가 생기고, 손끝에 닿는 모든 것이 갑자기 차갑게 굳어버린다. 방 안은 조용한데,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기계음이 오히려 더 크게 울린다. 그 소음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지 못한 채 떠돈다. 내 존재는 단단한 몸이 아니라, 조금만 잘못 닿아도 깨질 것 같은 유리조각처럼 흔들린다.



세계는 여전히 무겁다.
중력은 어김없이 작동하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내 마음은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애쓴다. 애쓴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필사적으로. 그러나 어떤 날에는 노력조차 나를 구하지 못한다. 애써도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틈새가 벌어지고, 나는 그 안으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던져진다. 그 순간 인간은 알게 된다. 강함이란 늘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위에 임시로 세워진 균형이라는 것을.



그런 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낯선 목소리든, 오래전 들었던 친근한 음성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소리의 출처가 아니라, 내가 불렸다는 사실이다. 이름은 가장 개인적인 언어다. 사회적 역할도, 설명도 필요 없이 곧장 나에게 닿는다. 그 이름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 깨질 듯 날카롭던 시간의 모서리들이 조금씩 둥글어진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신경이 풀리고, 숨이 다시 제 자리를 찾는다. 그 사람의 눈빛, 손길, 혹은 그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세계는 미세하게 방향을 바꾼다. 무너지는 대신, 잠시 흔들리며 버티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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