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진 뒤에는 돌아갈 수 없다
새침한 노란색 껍질이 시큼하게도 까진다. 귤을 까다 생각났다. 통찰이라는 단어가. 손톱 아래로 껍질이 갈라질 때, 이미 안쪽은 드러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힘을 주지 않아도 열리는 것들, 그것들이 언제나 가장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통찰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저항이 사라지는 순간에 발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귤을 손끝으로 조각내다가, 왜 하필이면 이런 것들은 남들 다 자는 깊은 밤에 생각나는지를 생각했다. 왜일까. 입에 넣은 귤이 시큼하다.
껍질은 보호가 아니라 지연이다. 안쪽을 감추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드러남의 시간을 늦추는 장치. 사람의 생각도 그렇게 작동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위에 습관을 덧씌우고, 그 위에 말과 태도를 얹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귤을 까듯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다가, 가장 안쪽의 상태에 닿는다. 그것은 새로 생긴 생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확신이다.
귤 조각이 하나씩 분리된다. 질서 정연하게 나뉘어 있지만, 사실은 한 덩어리였다는 흔적을 끝까지 남긴 채. 통찰도 그렇다. 이해는 쪼개지지만, 책임은 쪼개지지 않는다. 한 번 알게 된 이후에는 이전의 무지가 더 이상 면책이 되지 않는다. 선택은 갑자기 무거워지고, 가능성은 동시에 줄어든다. 아는 만큼 자유롭고, 아는 만큼 묶인다.
손에 남은 향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물로 씻어도, 다른 일을 해도, 잠시 동안은 계속 따라온다. 생각도 그렇다. 통찰은 순간이지만, 그 여파는 길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바꾸기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각도를 미세하게 틀어놓는다. 그 미세함 때문에 오히려 더 돌이킬 수 없다.
나는 귤을 다 먹고도 한동안 손을 바라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손. 그러나 그 손은 이미 다른 상태에 있다. 통찰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 변화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귤을 깔 수 없게 되는 것. 같은 껍질, 같은 과육, 같은 동작. 그러나 그 안에서 더 이상 모른 채로 머무를 수는 없다. 얼마나 까먹은 것일까. 손톱은 이미 씻었음에도 노란색의 기운이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통찰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위로하지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다만 남겨둔다. 벗겨진 껍질처럼, 되돌릴 수 없는 흔적을. 그 흔적 앞에서 사람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해진다. 그리고 그 정확함은 종종 불편하다. 손에 남은 귤 향처럼, 쉽게 떼어낼 수 없으니까.
떡갈나무의 몸통으로 남고 싶다. 언어는 사실 나를 위로하지 않는다. 문학을 그렇게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을 정도로만 쓰고 있다. 언어는 대신 나를 그냥 나무처럼 서 있게 만든다. 이왕이면 떡갈나무의 몸통처럼 서 있고 싶다. 움직이지 않는 쪽으로. 바람이 불 때 흔들리는 것은 언제나 잎이고, 부러지는 것도 가지다. 몸통은 말이 없다. 말이 없다는 건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언어도 그렇다. 감정이 잎처럼 소란을 피울 때, 진짜 언어는 안쪽에서 무게를 만든다. 나는 그 무게를 싫어하면서도 즐기는 기묘한 자이다.
나는 종종 말을 고르다가 멈춘다. 착하다는 말도 싫어하지만, 너무 예쁜 말은 믿을 수 없고, 너무 정확한 말은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는 것은 거칠고 단단한 단어들이다. 손에 쥐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단어들. 떡갈나무의 몸통처럼, 계절과 상관없이 같은 표정을 유지하는 단어들. 그것들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감정이 버텨온 흔적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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