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나'라는 인간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다는 것을 감지하며 산지가 십 년 정도가 지나가 버렸다. 짧은 순간 상대방을 탐색하고, 판단을 내리려 하는 이미 경험 속에 축적된 사고 때문인지 우듬지에 가려진 숲 속에 어두운 기운처럼 느껴지는 타인의 노골적인 눈빛이 싫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만큼 육체적으로 피로한 일이 또 있을까? 내가 하는 일은 서로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만큼의 피로한 일은 없다. 실타래의 엉킨 부분을 조심스럽게 풀어 나가듯 천천히 하나씩 아니 한 명씩 그들의 마음을 읽고 풀어가야 탈이 없는 곳이다. 한 명이 문제가 되면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한 명이 그 문제가 풀리면 다시 다른 한 명이 문제가 되었던 사람과의 마찰이 생기는 곳이다.
가끔 자신의 속 이야기를 하는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 때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감옥처럼 옥죄어 오는 기억들이 스쳐갈 때쯤 나는 지금의 이야기는 더 소중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전한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어두운 탄광 같은 곳은 존재한다. 투명한 침묵의 장막을 쳐 놓고 사는 사람들도 나처럼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 길고 어두운 갱도를 헤매다 햇빛을 보게 된 광부처럼 나쁜 꿈이 끝났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모든 걸 말할 필요도 보여줄 필요도 없다.
완전히 허물없는 관계라는 것은 존재할까? 자신을 보호하려 쳐놓은 3.8선 같은 것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관계. 지뢰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고 넘나들게 되는 그 마음이라는 곳이 관계에서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곳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교분을 나누기까지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모든 관계에는 허무한 이별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고 인내와 능숙함을 동경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얻어낸 교훈이라는 생각뿐이다.
나는 적요하고 어두운 방을 좋아한다. 퇴근 후에도 작은 스탠드 불에 의지해 기대어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밝지 않아도 상관없다. 굳이 밝을 필요도 없다.
아침의 쌀쌀한 기운은 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여느 날과는 다른 기운이 겨울임을 예감하게 해주는 날씨가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적당한 긴팔을 찾아 입고 긴 코트를 입고 출근길 책을 손에 쥔다. 책을 쥐고 눈은 글을 읽으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혼자가 될 수가 있다. 낯선 사람들 틈 사이에 나 또 한 그들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듯이 지하철의 문틈 옆자리에 서서 책을 펼쳤다.
피로 때문일 것이다. 주름이 여럿 잡히는 눈꺼풀을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가는 지하철의 굳게 닫힌 문에 비치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의 일과가 끝나고 그리고 주어진 쉬는 시간. 낯선 사람들 틈에서 밥을 먹고 낯선 사람들 틈에서 커피를 마신다.
현실이 아닌 책 속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순간을 한참 경험하게 되면, 어슴푸레한 새벽을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잠에 들고난 후 내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밀려나간 것을 확인하는 아침이 오면 잠시 이불을 다시 가슴께에 여미다가 허물을 벗듯 벗어던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사무적인 과정과 혹은 거짓과 미미한 진실들이 오가는 공간에 도착하여 한데 버무려 그럴듯한 기성품을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잠시 쉬어갈 시간이 찾아오고 요새 나는 이렇게 사람이 거의 없는 카페를 찾거나 사람이 덜한 곳을 찾아 앉아 책을 읽는다. 나는 이곳을 하얀 카페라고 부르기로 했다.
낯선 사람들을 허락할 때 불가해한 죄의식과 연민에 사로잡히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이 좋아졌을 뿐이다. 배반을 점치며 그들을 보고 싶지 않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누구든 희생시키지 않는 편인 낫다고 생각했다.
세상 속으로부터 혼자가 되고 나서 모멸감. 오해. 상처. 죄의식. 부끄러움. 부러지지 않는 자존심. 혹은 허영심이 사라져 버렸다. 귓속을 불쾌하게 넘나드는 이야기도 사라졌다. 내 귀에 둥지를 튼 듯 자리를 잡고 말을 전하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렇게 십여 년 동안 나는 인연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낯선 사람은 그 낯선 사람대로 내버려 둬 주었다.
굴곡과 그늘이 베여있는 노래를 책들을 그림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오랜 흉몽에서 깨어난 사람 같은 평화가 느껴질 때도 있었다. 조용한 성격의 사람, 말없이 변함없는 내부를 굳이 열어 보일 필요가 없어졌다. 완전한 형태로 기억을 지속시킬 만한 것들을 찾아보고 사진기도 손대보고,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미친 듯이 공부를 해보기도 하고, 밤이면 미친 듯이 글을 썼다. 기억을 지속시키기 가장 좋은 것은 일기였다. 최대한 간결하나,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날이 되는 단어들의 조합을 만드는 일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십여 년이 흘러 다시 한번 겨울이라는 계절이 돌아왔다. 처절한 계절. 내가 가장 깊은 동면에 들기 시작하는 계절이 좋을 뿐이다.
읽었던 부분을 다시 펼쳐 책에 집중했다.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것은 매혹적인 것이다. 만나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을 느껴볼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비대면의 만남을 좋아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책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는 긴 편지 같은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편지를 쓸 수 있는 용기가 기회가 있었으면 했다. 수신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참을 고요히 사람이 없는 하얀 카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었다.
다시 매장으로 돌아가는 길. 시계를 확인하고 여유의 시간을 가늠한 뒤, 검은 카페에 들렀다. 배가 고팠다. 번이라도 쑤셔 넣어 줄 마음으로 몇 개의 번을 골랐다. 바람이 좋았다. 카페 골목길에 스쳐가는 낯선 사람들 사이로 부는 이 겨울을 느낄 수 있게 된 바람이 반갑고 좋았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날이었다. 검은 카페에 앉게 된 다음 날도 그랬다. 주말에 상관없는 스케줄로 돌아가는 요식업이라는 세계에서 내가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은 일상 속 하나의 재미이기도 했다.
이불을 다시 가슴께까지 여미어 올리고 얼굴까지 파묻고 그대로 다시 잠에 들고 싶은 아침이었다. 문득, 여러 가닥의 가락국 수발을 젓가락으로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했다. 조용하나 말은 별로 없고, 잘 참는 듯하나, 생각이 많아 보이는 낯선 사람을 말이다. 같이 일을 하게 되며 그 낯선 사람의 뒷모습에서 옆모습에서 가끔 나누는 짧은 대화에서 인내하고 있다는 절실한 눈빛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굴곡과 그늘이 베여있는 것처럼 낯선 사람의 눈빛 속에서 나를 볼 때가 있다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며 보게 되는 사람들을 나는 애써 번역하려 하지 않았다. 몇 번의 면접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낯선 사람을 짧은 순간 탐색하고 판단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고 노골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눈빛이 싫어졌다. 여전히 나에게는 낯선 사람을 지켜보는 일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뿐이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온 문자에는 나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는 대표의 말이 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