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언어의 폐허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
실망이 열매를 맺게 만들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지게 내버려 두는
실패자가 되느니,
감동의 원천이었던 수많은 책과
글을 읽는 것이
실제 사례들만 중요하게 여기는
임상 시대를 살아가는 길에
더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언어가 나를 괴롭힌다.
꽃들과 나무들이
저 하늘의 행성들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
수다 떠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를 생각해 본다.
문학에서 그 화려한 분칠을 지우고 맨얼굴을 보겠다고 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횡설수설 떠벌리기만 하는 책은 멀리하기로 했다. 정신의 창작물이란 무의미를 미화시킨 것뿐일까. 본질은 늘 언어 밖에만 강박적 웃음이나 정신적 마비 상태에만 있을 것일까. 어떤 책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폭하여 쓰레기통에 처박히기도 한다. 어쩌면 작가의 영감은 수치심일 것이다. 자기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회피 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작가들로 구분될 것이다.
문학에도 유행이 있다.
무관심한 잔인성.
신들린듯한 해부.
풍부한 독설이나 성공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늘 그 속에 존재하는 폭력성이다.
독살스러운 책이 권위를 부르는 생각만으로도 인간적인 작가들에게 몰려, 그 옹달샘에 두 눈을 담그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대중처럼 변덕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중간하게 멈추어 현실의 불가능과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 것이 작가라면,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일관성 있는 마음 하나를 언어로 만들어가는 일이 힘든 일이지만, 꾹꾹 마음을 눌러쓰며 살아가고 있는 작가들은 여전히 이 하늘 아래 밤을 새운다. 모든 언어를 통틀어 영혼처럼 추잡한 단어는 없다. 표면 뒤에 어떤 현실이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가능한 일이 아닌, 여전히 나는 언어가 그 현실을 표현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스운 날이 있다.
평범한 것이나
놀라운 것에서 뒷걸음치고
아무거나 말하고
쓰는 책임 앞에서
뒷걸음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미소와 부정을 절충해 가며
모든 가설을 동시에 지지하는 방법 이외에는
작가라는 이름에 답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창작 불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세상에 이만큼 어리석은 자들이 있을까 싶다가도
그렇게 몸이 망가지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정신이다.
늘 정신은 육체를 괴롭히고
그 고통을 즐거워한다.
희생시켜야 풍부해지는 진실
앞에 무릎을 꿇진 않는다.
사람들을 두려워했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재능보다 사물을 뒤틀어 놓고, 스스로에 대해 착각하게 만드는 수단보다는, 자연으로부터 어떤 능력도 세례 받지 않은 사람만이 어쩌면 진정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날도 있으니까. 작가보다 더 현실에서 벗어난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철학자에게까지 나타나는 언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언어. 차라리 힙합가수가 쓰는 가사들이 더 시처럼 느껴지고, 신선한 문학처럼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써 내려간 가사를 가만히 읽어보면 전하고자 하는 정확한 메시지와 모든 감정들과 그 순수한 언어의 날 것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언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부르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꾸밀 필요가 없다.
길게 형용사를 늘려 만들 필요가 없다.
부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작가라는 이름은
위험에 아주 잘 동화해서 전혀 고통받지
않으며 그것을 써 내려갈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씨앗에서
싹을 틔워 말하기 좋아하는 족속인
인간들에게 언어는
화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외부에서 보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체계 속에 넣고, 어느 무엇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목록으로 만들고 어떤 작품에 대한 해설은 형편없거나 쓸데가 없다면, 지금 이 밤에 직접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한숨이나 비웃기로 문장을 만들고
스스로를 존재하게 했던 것은 아닐지.
사소한 불행을 미화하여
공허로 치장한 것은 아닌지.
일상적인 슬픔을 엉뚱하게도
표현한 것은 아니었는지.
작가라는 이름을 걸고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나는 나와 비슷한
시간여행자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아주 소수의 같은 종족을 알아보게 되는
그렇게 글을 통해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서로의 마음을 마치 서로의 거울처럼 느끼게 되는
시간 속의 여행자들을 만나는 일을 하기 위해
어쩌면 작가라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그늘아래
자리한 석자의 이름으로
이 험하고 더러운 세계에 뛰어들었다.
지성의 괴로움에는
가슴의 괴로움에서는
찾을 수 없는 품위가 있다는
개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 반대니까.
지성보다는
가슴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늘 치유 불가능성 속에서
잔손질이나 해야 하는 것이니까.
시간이 준
빛이 바랜
모든 것들을 안고 갈 뿐이다.
생각 하나마다 어떤 미소가
남긴 폐허를 상기시키는 일이
이제는 익숙해졌으니까.
심오한 사상의 주변을 조심스럽게
배회하다가
현기증만 빼앗아 달아나는
책들은 멀리하기로 한다.
이미
철학이나
물리학이나
심리학이
생기기 훨씬
더 훨씬 전부터
고통은 인간의 육체를 분해하고 있었을 것이고,
모든 감정이 부르는 노래는
그것이
슬픔이든
행복이든
고뇌이든
불안이든
이미 모든 영혼을 분해하고 있었다.
진정한 시의 세계는
운명을 경험하는 데서 시작된다면
그 문학의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대중이 하잖게 여기는 시안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이마를 대고 이 밤에 쉴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는 범주를 찾는다면
나는 편안함 보다는 혼돈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잠자리인지 이제는
유감스럽게도 고통에 전염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샘솟는 의심의 대한 갈증을
가라앉힐 필요 없이
가장 자유롭게 써 내려가는
뇌와 열손가락이 하는 짓을 지켜보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내가 일하는 요식업에도 불어오는 유행처럼
어차피 먹으면 배설되는
음식의 유행처럼 강제적이지 않게
어떤 소스에 대한 반박도 없게
생각의 한 양상마다
앙상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던
초심을 잃지 말자는 생각뿐이다.
나는 여전히
나와 같은 시간여행자들을
찾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