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그리고 깊게

잘린 꽃들과 이름 없는 밤이 스며드는 시간

by 구시안

거리를 지나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본다.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흑백처럼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렇게 시작된 웃음잃은 꽃들이 찾아들 때면, 아름답지만은 않은 서사의 한 페이지처럼 자랐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는, 누군가의 행복과 기념을 위해 가위로 잘라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는 이 꽃다발을 받아 들고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기 보다는, 모래의 성스러운 서약들을 맹세하는 그림을 떠올리고 있다가, 꿈 없는 잠의 지붕틀에서 떨어지는 시간의 흰 머리칼을 흔드는 시간이 다가온다. 씨앗을 받아 먹으며 자라는 밤의 풍경 하나의 밭이라면 달라질 의미는 아무 것도 없는 대지에서 태어나 자라는 것은 비단, 꽃과 나무 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포함하여 여러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기에, 그 줄거리는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느낄 뿐이다.


밤의 우유를 먹고 자랐을

하얀 장미를 바라보다가

잊힌 모든 이들처럼

그 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으로 살아남았을

별을 쪼개는 밤이 길었을

모든 것들이 경이롭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시계장치 속에 살아가는 것은 모든 것이 다를게 없다. 밤에 열두 번의 종이 울리는 시간이 다시 새로운 하루를 열어주듯, 나는 꽃 진 시간의 만개(滿開)속에 서 있다. 늙어가는 노을 속에는 이름들이 잠을 자고 있고, 하얀 지팡이를 드리우기 시작한 가로등이 걸음을 거닐기 시작할 때면, 그 하나의 이름을 기억하며 나의 밤을 깨운다. 조용히 침묵하는 몸으로 머리 위로는 별들로 뒤덮힌 채, 한줄기 빛이 나에게로 다가와 속삭이는 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리는 손가락으로 깊은 곳에서부터 빗겨진 짧은 머리칼 속을 헤집을 때 찾아오는 무거움이 갈라진 돌의 무게를 재지 못하게 될 때까지.


내가 던진 돌 조각이

그저

나에게로 기울게 하는 시간.


남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도 없는

달이 세상을 향해 빛나지만

마치

잠시 내가 따라놓은 식탁의

투명한 유리잔 사이로 들어와

목을 축이고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밤.


가장 둥근 눈물을 깨고 나온

새 한 마리가

창가의 나뭇가지에 어느새 앉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새가 나를 먼곳으로

대려가 주길 바라며.

흙처럼 매마르지도 않은

입을 두손으로 어루어 만져본다.


충만하게

태양이 헤엄쳐 지나간 자리에

푸르른 얼음이 피어나는 밤이다.

느리고 그리고 깊게

펼쳐지는 이 바다 위로

밤으로 뒤덮인 입술로

번갈아 끼우는 열쇠를 손에 쥐고

또 다른 집을 연다.


마음안에 피어 있던

이제는

잘린 꽃들과

이름없는 밤이 스며드는 시간.





in d'après-midi


이 곡의 제목을 "하루가 저물기 직전의 느리고 깊은 시간" 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 들었던 음악입니다.

누군가에게 느리고 깊은 밤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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