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의 밤

난파 (難破)

by 구시안

늦은 얼굴을 앞에 두고

고독한 사람처럼

그렇게 나를 변신시킨다.

이미 한 번 곁에 있었던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닿지 않은 채 생각이

물들어 온다.

마치 처음 해본 사랑처럼

유일하게 거슬러

자리를 잡은

상처의 겨울을 지나

다시,

그렇게 봄이 찾아오는 것처럼.


마음에는

고요한 숲이 있어

그렇게 심어진 나무들이 벗겨져

삶의 뗏목이 되어 실려간다.

그런 밤에

할 수 있는 것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거창 할 것도 없고

진지 할 필요도 없는

가장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을

늘어뜨리고

그 나무들을 헤아리고

만진다.


기억되는 숫자들이 새겨지면

달력의 과거를 들여다보며

다발로 묶인

한 편의 서사가 담겨 있는

이야기를 느껴보다가

잠시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창가로 다가가

오늘의 떠오른 달을 바라보는 일이

이 밤의 전부이다.



하늘에도

마음에도

난파선들이 떠돌아다니는 밤을

이 향기에 갇힌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진한 향수에 취할 때면

나의 광대뼈는

잠시 하늘로 승천하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공기 중에도 흉터의 그림자가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무도 위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철저히 혼자의 삶을 지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자리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끔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더 이상의 욕심은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타이를 뿐이다.


과거의 성난 뿔에 새겨진

단어의 흔적을 지난 일기장에서 찾아 읽어보면

그때는 왜 그랬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난파선에 위로를 보내 줄 뿐

더 이상 침몰 되지 않게 그 파편이라도

고요히 부유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쫓기는 이들과 함께

이 공기를 마시며

이 밤을 침묵하는 이유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별들이 존재하는 것과

다를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지만,

약속보다는

그 약속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이 더 현명하다는

생각으로 물들 뿐이다.


함께라는 단어는 이제 내 삶에 없지만,

잿빛 면 검은 황무지 위에 자리하여 살아가며

생각이라도

높은 곳에 닿기를 바랄 뿐이다.

검은 빛줄기 기억 곁에서

무엇이든 드러나게

피어오르는 많은 것들은

향수이고 향기이다.


그 협곡에서 일렁이는 향기는

나에게 부식된 단어를 선사하고

서쪽하늘로는 진실을

남쪽하늘에서는 시작을

매일 새롭게 새기게 한다.


말의 댐이 폭파되는 하루를 살아가며

사람의 숲에 섞여 지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며

교차하는 중이다.


단어의 모양이

그 분화구에서

솟아 나오다가 굳어버리는

그것을 기록하면서.


그 탄생들을 축복하진 않는다.

늘 나 자신을 위해 증언했던

모든 것들이 타오르는 곳은 없었으니까.

온전히 실재하는 나는

여전히 밤의 부식을 겪고 있을 뿐이니까.

경험이 뱉어낸 가지각색의 혀들을

기억하고 싶진 않다.


여전히 나는

차갑게 하는 거절처럼

얼어붙어 하얀 빙하가 되어 있다.

아주 오래 쉰 것처럼

느껴지는 밤이 있다.

이런 밤에는

그 빙하의 표석을 따라

다녀도 좋을 만큼의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소리 없이 부수고 나간 것들이

피어오르며

하늘 어딘가를 선회하고 있는

위성처럼.

글자들이 대열을 이탈해도 좋은

깊고 깊은 밤이 오길 기다린다.






Park Kyung Suk & Nina Kogan - Waves of Amur River


첼로의 선율에

마음을 맡기고

그렇게 부유해도 좋은 밤을 기다리며.


월,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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