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의 응답을 기다리다
날이 추워질수록 곰이 되려고 하는 것이 이상했다. 어차피 뱀이나, 곰이나 동면을 취하게 되어 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다. 뱀띠인 나에게 깊은 겨울이 오기 전, 내 몸에 들어와 서식을 하다가 동면을 취하려는 이 곰을 없애야만 했다. 나는 내가 원할 때 동면을 취할 권리가 있는 뱀이기 때문이었다.
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봄. 여름 이제는 없어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불면증 때문에 그렇게 고생했는데, 날이 추워지니 마치 동면에 깊은 잠을 자려는 듯한 곰이라도 되려는 듯, 이상하게 잠이 계속 쏟아진다. 나에게는 곰은 필요가 없다. 있어서도 안되고, 아직은 깊은 잠에 들 시기가 아니었다. 할 일들이, 처리할 일들이 일상 속에서 산소호흡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안에 들어와 굴을 파놓은 곰을 잡을 방법을 생각해 보고 있다.
일상 속에서는 매장에서 뭐라도 만지고, 뭐라도 정리하면 되는 일인데, 이것도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인 비수기가 시작된 것이다. 지난 한 주, 더 조용해진 매장에서 졸려워하는 인간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모두가 매장에서 잠을 자는 곰 둥지가 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일이었다. 컴플레인이나 안 좋은 말들이 회사에서 나온다면 피곤해지는 것은 나였다. 하루에 할 것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 있었다. 일을 하는 도중에도 본사에서 계속되는 문자와 지시사항들이 피곤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연말을 준비하는 바쁜 시즌이기도 한 요식업의 세계에는, 이미 돈으로 불을 밝힐 본사의 희망의 전등들이 매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년 지겨운 행사이며 피곤한 순간에 직원들은 여기저기 졸음이 몰려오는 파리한 얼굴들로 손을 입에 대며, 연신 하품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고요가 잠을 부르는 것은 맞지만, 절간에도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의지이다. 일은 일인 것이다. 미팅시간, 적당한 볼륨으로 직원들에게 주의를 주면서도, 내 안에 잠들기 시작한 곰을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집에만 오면 봉인해제가 되듯 따뜻하게 샤워를 하고, 책상머리에 앉아 늘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요새 곧장 침대로 가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그렇게 집이라는 동굴에서 잠만을 자기 시작하는 것이다. 충분한 수면이야 건강에도 좋고, 그동안 사계절 내내 시달렸던 불면증에서 해방된 것은 좋지만, 내 몸에 자리한 곰은 적당한 수준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알람을 듣지 못하고 자는 경우까지 생겨 버렸다. 나는 한 번도 지각이라는 것을 해본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혼자 살며 늘 몸을 체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만, 예정되어 있는 한 번의 수술을 빼고는 내 몸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다. 잠만 자면 정말 일과 집 밖에 없었다. 가끔 오랜만에 연락 오는 소수의 지인들의 술자리가 늦은 시간 있었을 뿐이다.
내 육체에 터를 잡은 이 곰은 많이 지쳤는지 자꾸 누우려 든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나는 잘 앉지도 않고 서서 가는 편인데, 요새는 날쌘 아줌마처럼 빈자리가 생기면 불을 켜고 달려가 앉는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타고 가다 몇 정거장이 지난 곳에 내려 다시 돌아오는 경우까지 생기는 것을 보니, 보통 곰은 아닌듯했다.
커피를 줄이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생각해 보았다. 아니었다. 커피와는 무관한 이로운 것이었다. 놈이 추운 겨울 틈 어디선가 내 몸 안에 들어와 서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자고 일하고, 다시 먹고 자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고 나는 이제 늙어가고 있다. 더 이상 무료해지기 싫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곰 잡기를 하기 위해 다시, 매일 아침 집 근처의 산을 오르기로 했다. 솔직히 매일은 힘들겠지만 이틀에 한 번은 꼭 산책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곰을 겨울이 오기 전에 때려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오랜만에 쉬어보는 일요일이라는 것은 잠으로 끝나고 있었다. 이 곰은 계속해서 잠을 자고 싶어 했다.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곰을 완벽하게 허락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손님이 없는 친구의 가게로 술을 마시러 나갔다. 텅 빈 공간, 친구 녀석의 시름한 얼굴을 보니 술이 더 당겼다. 한참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오랜만에 적자인 친구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매상을 올려줄 마음으로 계속되는 고요한 둘만의 시간을 아낌없이 즐기고 있었다.
친구 녀석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편안함을 만들어주고 좋아하는 것들을 말없이 챙겨주었다. 대기업의 잘 나가는 임원이 되었던 녀석이 돌연 퇴사를 결정했을 때, 주변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조차 그를 응원해주지 않았다. 사실 나는 친구의 퇴사의지를 오래전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다.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퇴사를 결정한 건지 알고 있었다. 모든 문제는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나는 상대로 인해 나를 버리고 싶지 않다는 친구의 녀석의 말은 살아가며 듣게 되는 비수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연락이 오면 묵묵히 옆에서 술을 마셔주었다. 내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을 친구는 시간 속에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문득, 한동안 감추고 있던 자신의 창업을 이야기했다. 작은 소박한 술집을 냈다고 했다. 그 연락을 받고 간 것은 가게를 오픈한 지 한 참이 지나서였다. 친구의 가게는 처음부터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장사가 잘 되면 좋았겠지만, 운은 친구의 편은 아니었다. 전문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포기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이야기해 줘야 할 것들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시간 속에 아직 포기하지 않은 친구 녀석의 가게는 나에게는 언제나 들려도 좋은 아지트처럼 자리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일요일의 완벽한 여유가 되고 있었다.
친구의 얼굴은 진심 어린 걱정으로 물들어 갔다. 이 가게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나누며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이어지던 순간, 가게 한편에 보이지 않았던 그 곰새끼가 보였다. 커다랗고 게으른 몸뚱이를 하고 있는 갈색곰이었다. 그 곰에게 다가가 덜썩, 곰의 손을 잡고 꺼지라고 말했다. 제발 내 앞에서 꺼지라고. 사라지라고. 날 괴롭히지 말라고 하소연이 섞인 분노를 표했다. 친구 녀석은 나를 걱정스레 측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술이 부른 모노드라마였을 뿐이다. 불콰한 얼굴이 더 창피해져 곰의 손목을 잡고 그 곰을 질질 끌며 옆자리에 앉혀 주었다. 긴 밤 서로의 고민과 해갈 없는 목마름의 이야기는 진솔한 안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처럼, 우리를 향한 심판과 동시에 깨달음이 돌아온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곰보다 더한 보이지 않는 존재가 한 분, 어쩌면 여러 명의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 살아가며 지독한 울분을 토하고, 간절한 기도를 무릎을 꿇고, 한 번쯤은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 자리하여 기도를 드린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의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는 신을 찾는 울부짖음을 토해낸 적이 있었다. 간절한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과 울음은 그저 하늘을 향해 흩어지는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거울 속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를 깨우듯,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우리 안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것이었다. 신이 있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게를 하는 친구 녀석도 한 번쯤은 간절하게 기도를 드린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들었다. 누군가의 희망을 재단하듯 바로 답하지 않는 신들은 잔인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마음속 깊이 숨겨둔 죄를 잊은 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은, 우리의 진심 어린 기도를 기다리며 그 모든 속임수와 외면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급한 성격의 사람들은 왜 답이 없냐며 울부짖는다. 때로 응답은 찬란한 빛으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혹하고 냉정한 침묵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무시할 때가 있다. 나는 종교가 없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살아가며 나를 믿을 뿐이다. 하지만 기도를 드리게 되는 순간의 감정이 부르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인다. 그 깨달음이 곧 벌이자, 동시에 구원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를 벌하고 싶을 때, 신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한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배운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정말 간절한 기도의 늦은 응답이 과연 신이 답해준 것인지를 말이다. 침묵 속의 기도, 말없이 스러져가는 순간들, 그리고 그 속에 남은 여운. 그 모든 것이 결국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마주할 용기를 준다면 상관없는 행위지만, 가끔 나는 신은 과연 존재할까를 의심한다.
그 물음은 우리가 살아가며 가장 오래 품게 되는 질문 중에 하나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으며, 증명할 수도 없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때로 불안하고, 때로 위안이 되는 것이다. 결국 신의 존재 여부는,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든 않든, 그 물음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스스로를 깊이 바라보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친구와의 술자리는 월요일의 중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옆에 앉혀놓은 곰은 여전히 잠을 부르며 피곤해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죄를 무릎 꿇고 기도할 일이 없이 살아가기 위한 사투는 시간의 중력으로 무게감을 더하고 있었다. 창 밖에 새벽녁의 청아한 하늘을 비추는 푸르스름한 달빛이 마치, 세상을 바라보는 신의 눈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감출 것도 없이, 한동안 말없이 두 명의 남자가 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