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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와 역설

나는 생각하지 않기 위해 생각한다

by 구시안

나는 종종 이유 없이 창문을 연다. 바람이 들어오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 기대와 무효의 경계에서, 나는 나 자신을 가장 또렷하게 느낀다. 부조리는 그렇게, 어떤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자세로서 나를 찾아온다. 삶이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설명하려는 나를 발견하고, 그 발견이야말로 설명의 불가능성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음을 견디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를 묻는 순간, 세계는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의미가 겹쳐져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소음을 침묵으로 착각하고, 그 착각 속에서 나의 사유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유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온다—출발점이 곧 도착점이라는 사실을, 마치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놀라워하면서.


나는 나의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 모순된 상태 속에서 나는 하루를 소비하고, 소비된 하루를 다시 회상하며 의미를 덧붙인다. 그 의미는 원래 없었던 것이지만,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진실하게 느껴진다. 부조리는 바로 여기에서 태어난다—의미가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만들려는 의지 사이에서.


어떤 날에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 삶을 멀리서 관찰하는 관객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그 관객조차도 실은 또 다른 역할일 뿐이라면? 나는 끝없이 분열되고, 그 분열 속에서 하나의 통일된 자아를 갈망한다. 하지만 그 갈망 자체가 이미 분열의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부조리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조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기로 한다. 대신 그것과 나란히 걷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 대신, 이해되지 않는 채로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유일한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창문을 연다. 바람이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상관없이, 그 가능성 자체를 견디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견딤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된다. 아니,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떤 존재가 된다.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조차도, 아마 틀렸을 것이다.


부조리와 역설에 집착하는 것은 슬픔에 빠진 자들이 의지하는 동물적인 행복이다. 정상적인 살마들이 활력과 생기를 표현하느라 엉뚱한 농담을 하고 다름 사람의 등을 두드리기도 하는 것처럼, 기쁨과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지성으로 재주넘기를 하고 자기 방식으로 삶을 표현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라, 나는 그것을 부조리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고 모으느라 한평생을 고생한다.

재산을 남겨줄 자식도 없고 하늘에서 그 돈으로 자기 자리를 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없는데 그렇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도 남을 명성을 얻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죽으면 그 명성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찾아서 힘겹게 일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 소용 없어진 것을 배우려 한다. 아무 쓸모없이 그저 살기 위해 쾌락을 찾는 이들도 있다.


최고로 부조리한 것은

인류의 모든 사회적 삶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최고의 역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벌어질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자체가

내게는 사소한 것들이 단서이고 목소리이고 글자라는 것이

부조리의 역설이다.


나는 이 문장을 끝내려 하면서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끝맺음이란 언제나 하나의 형식일 뿐, 사유는 그 형식을 비웃듯 계속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쓰는 이 마무리는, 실제로는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생각한다, 아니, 생각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조차 의심의 대상이 되는 순간, 나의 사유는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는 어떤 느린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지속을 위한 파괴다. 마치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어떤 기묘한 생명처럼.


사람들은 삶을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그것이 제자리에서의 반복이라고 느낀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사실은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고, 다시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동일하게 반복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매번 처음 겪는 것처럼 느끼도록 설계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기록한다는 것은 붙잡기 위함이 아니라,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단어는 의미를 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흩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이 문장 하나하나가 결국은 무의미로 돌아갈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멈출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역설이다.

나는 부조리를 이해했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쓴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를 견디기 위해, 나는 문장을 쌓아 올린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완성될수록, 내가 이해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상태일 것이다.

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결론이란 언제나 거짓된 안정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이 문장을 여기서 멈춘다.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기 때문도 아니라, 단지 멈춤이라는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부조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내가 이 글을 끝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글은 나의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쓰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모든 문장이 단지 내가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장난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진지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성실하게 헛소리를 해온 셈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이 글은 처음으로 진실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진지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성실하게 헛소리를 해온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만 나는 처음으로 진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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