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ch Jan 17. 2019

시그니처미술상, 아시아 태평양 미술의 플랫폼

아트인컬처 2018년 8월호 'Report'

지난 6월 29일, 제4회 시그니처미술상이 수상자를 발표했다. 아시아 태평양 미술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이 미술상은 싱가포르미술관(이하 SAM)이 주최하고 아시아태평양브루어리재단이 후원한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시각예술 발전과 이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활성화하고, 중견작가와 신인작가 모두가 참여 가능한 다문화 전시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포부를 안고 2008년 출발했다.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본 상의 심사대상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의 현대미술품. 이번 회에는 제정 이래 최초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포괄했다. 100여 명을 웃도는 후보자 중 단 4명에게 총 상금액 8천여만 원(10만 싱가포르달러)이 시상된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손에 꼽힐 만한 규모지만, 한국 미술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후보자 추천 및 심사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 걸까. 그 내용은 아시아 태평양 미술의 진흥이라는 상의 취지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 과연 올해는 어떤 작품이 모였을까. Art는 주최 측의 공식 초청으로 제4회 시그니처미술상 시상식 현장과 최종 후보작 전시(~9. 2 국립싱가포르박물관) 취재를 다녀왔다.



싱가포르, 아시아 미술의 중심으로


2010년대 초, 싱가포르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미술 인프라를 갖춰 아시아 태평양 지역 미술 허브로 부상했다. 동남아시아 지역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깝다는 이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술계 내 싱가포르의 입지 변화는 시그니처미술상 운영에도 힘을 실어줬다. 3년이라는 긴 호흡에 맞춰, 수상 후보 모집은 공모가 아닌 전문가 추천제를 따른다. 주최 측은 각국의 미술전문가에게 최근 3년간 해당 국적의 작가가 발표한 작업 중 3인의 작품 1점씩 총 3점의 추천을 의뢰한다. 첫 회에는 34점이 모였지만, 2011년 2회부터는 열띤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130점의 아시아 미술품이 후보로 모집됐다. 올해 4회에는 46개 지역의 전문가 38명이 엄선한 총 113점이 심사 후보 대상이 되었다.

    심사위원단도 쟁쟁하다. 코치 비엔날레 재단 대표 보스 크리슈나 마차리, 도쿄 모리 미술관장 마미 카타오카, SAM 수석 큐레이터 조이스 토 등 5인이 심사를 맡았다. 그들은 113점 중에서 ‘호소력 있는 주제’ ‘매체와 기법의 창의성’ ‘작업의 독창성’ 등을 고려해 15인을 최종 후보자로 선정했다. 뉴질랜드 대만 말레이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카자흐스탄 태국 한국 호주 홍콩 등 13개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작가들이다. 한국 작가로는 배영환이 이름을 올렸다. 대상(상금 5천만 원)의 영광은 베트남 작가 판 타오 응우옌이 차지했다. 심사위원단은 “판의 작업은 시적인 언어로 개인적 신화와 집단의 잊힌 역사를 전하며, 수 겹의 의미 층위를 만든다”라고 호평했다. 심사위원상은 인도 출신 싱가포르 작가 슈비기 라오와 태국의 탓나이 세타세리, 관객상은 인도네시아의 게데 마헨드라 야사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이 열리는 미술관 강당 옆 전시실에는 수상작을 포함한 최종 후보작 15점을 선보였다. 전시는 ‘아시아 미술’이라는 거대 담론을 주제로 제시하기보다는, 개별 작품의 물리적 조건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택해 공간을 구성했다. 영상 및 설치가 혼합돼 다른 작품과 구분이 필요하거나 4 채널 영상이라 사방을 막는 벽이 필요한 작품을 위해 가벽을 세워 단독 공간을 배정하고, 평면 작품은 이 가벽을 활용해 전시했다. 조각과 설치작품은 전시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도록 배치했다. 낮게 깔린 조명과 진한 회색으로 칠해진 벽과 바닥, 까맣고 높은 천장 때문에 전시장 자체는 어두웠지만, 이러한 환경이 작품의 시각적 특징을 더욱 돋보이게 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최종 후보 15인의 작품은 주제와 매체 재료 기법 모두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그럼에도 상당수 작품의 주제나 소재는 하나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었다. 후보작 대부분 국적을 불문하고 작가 본인이 속한 지역과 인종, 문화권의 역사, 전통과 밀접한 주제의식을 견지했다. 특히 역사에서 잊힌 이야기를 조명하고 주변부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시도가 여러 작품에 드러났다. 전시기획을 맡은 SAM 큐레이터 루이스 호는 15점에서 대별되는 4가지 특징을 꼽았다. 첫째, 미적 실천 방법론으로서 아카이브 방식의 대두. 둘째, 몸과 물리적 실체에 대한 관심. 셋째, 물질문화를 경유한 사회 정치 현안 호출. 넷째,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그러나 현실을 담보하는 대체역사의 서술.

    그가 언급한 4가지 특징을 가이드로 삼고 후보작 전반을 살펴보니 좀 더 상세한 범주화가 가능했다. 아카이브 방식을 작업 매체, 주제로 삼은 작업으로는, 실제 사건을 추적하며 그 일지를 기록한 슈비기 라오의 <펄프: 사라진 책의 짧은 전기>, 실화에서 차용한 모티프를 허구로 재구성하고 이를 아카이브와 병치한 렁 치 워+사라 웡의 <우리는 오늘 어제 실종된 그를 찾았다> <상실의 박물관>, 아카이브를 재조합한 어우 슈 이의 <크리스 프로젝트>가 대표적. 몸의 이미지를 이용해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탐구한 클럽 에잇의 <엑스 닐라랑(발루드, 디세벨, 롤라 엑스 마키나)>, 타무라 유이치로 <우윳빛 만>, 눈앞에 재현된 몸의 실재에 의미를 부여한 게데 마헨드라 야사의 <실낙원 그 이후 #1>와 지티쉬 칼랏 <무한한 이야기>, 몸의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한 배영환의 <추상동사> 등이 몸에 관한 관심을 보여줬다. 재료의 물성을 부각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프로펠러 그룹의 <AK-47 vs. M16>과 예르보신 멜디베코프 <브랜드>, 역사적 재료나 조형 방식을 핵심 요소로 삼은 마타 아호 콜렉티브의 <카오카오 #1>, 탓나이 세타세리의 <무제(후아 람퐁)> 등에서 ‘물질문화’를 둘러싼 각자의 문제의식이 두드러졌다. 대체역사를 서술하려는 시도는 객관적 사실 또는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하되, 개인의 경험을 풀어낸 판 타오 응우옌의 <트로피컬 시에스타>, 팡 웨이-웬의 <고무테이프공화국>, 집단의 기억을 다룬 야마시로 치카코의 <흙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었다.



주변의 중심화, 지역의 세계화


어우 슈 이(말레이시아), 야마시로 치카코 (일본), 타무라 유이치로(일본) 등 최종 후보 작가 중에는 최근 한국에서 열린 기획전에 참여해 작품을 알린 이들도 있다. 대개 한국에서 ‘아시아’의 동시대 미술을 논할 때

여전히 한중일 3국 중심의 동아시아에만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총 15명의 후보 중 중국 본토 출신의 작가가 1명도 없다는 점은 이례적으로 느껴졌다. 반면 일본과 베트남은 후보를 2명씩 배출했다. 베트남

출신 작가 2명(팀)이 최종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는 점은 특기할 만했다. 베트남에서 온 두 작가(팀)는 작업만 놓고 보면 출신지가 같다는 점을 전혀 짐작하지 못할 만큼 다른 매체와 미감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동시대 베트남 미술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 판 타오 응우옌은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됐으며, 현재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다. 따라서 동시대 베트남 작가들은 현대사의 단면을 중요한 소재로 활용한다”라고 귀띔했다.

    시그니처미술상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 아시아지역의 미술 신에서 어떤 작가가 활동하는지, 또 그들은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는 귀한 자리였다. 현장에서 확인한 이 미술상의 본질은 무엇이 좋은 작품인지 국가 대결로 우열을 가리는 일이 아니었다. 아시아 미술을 ‘지역 미술’이라 단순하게 규정하거나, 작품을 해석할 때 작가의 국적이나 지역성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세심한 노력이 행사 전반에 묻어났다. 국가와 지역에 기반을 두고 후보 모집을 하는 시상제도의 특성상, 앞으로도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내 다양한 미술 신의 문을 꾸준히 두드리며 이를 한자리에서 점검하는 최적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아가는 시그니처미술상. 이번 회에 처음으로 중앙아시아 6개 국가까지 범위를 확장한 만큼, 아시아 태평양 지역 모두를 아우르는 미술축제로 거듭나기를 응원한다. / 한지희 기자


원고 작성: 한지희

편집, 감수: 김재석

디자인: 이주연

매거진의 이전글 거장의 예술혼, 40년을 회고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