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ch Jan 29. 2019

깨달음의 공간: 칸디다 회퍼

아트인컬처 2018년 8월호 'Image Link'


독일의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Candida Höfer). 그의 사진은 인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을 사유하도록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지난 50여 년간, 작가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가 일어나는 공적 장소를 관찰하고, 그 공간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을 뷰파인더에 포착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미지에 사람은 없다. 그는 건축 구조물, 피사체와 빛, 그것들이 하모니를 이루며 만드는 아름다운 기하학적 형태에 주목한다. 최근 열린 개인전 <깨달음의 공간(Spaces of Enlightenment)>(2018. 7. 27~8. 26 국제갤러리)은 공연장, 도서관, 미술관 등 서구 문명의 지식과 문화가 함축된 ‘공간’을 담은 작품을 중점적으로 선보인다. 그의 사진에는 지식을 얻고 문화를 향유하는 일, 그러한 행위가 이뤄지는 장소가 우리를 깨달음의 상태로 이끌어준다는 오래된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그 ‘깨달음’이란 경험과 사유를 통해 사리에 눈을 뜨는 수행에 가까워 보인다. 칸디다 회퍼가 그곳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 한지희 기자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칸디다 회퍼의 개인전 <깨달음의 공간>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촬영한 공연장, 도서관, 전시장 이미지를 선보인다. 이러한 공간은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또한 지식을 쌓고 의견을 나누는 등 서양 사회에서 배우고, 이해하고, 개인의 지적 자아를 점진적으로 육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행위와 관련된 장소다. 깨달음, 깨우침 또는 계몽이라 번역하는 ‘Enlightenment’는 17~18세기 서구 계몽주의의 핵심 개념으로, 지식과 정보를 축적만 해서는 얻을 수 없고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통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회퍼는 공연, 전시, 독서 공간을 아울러 ‘깨달음의 공간’이라 칭함으로써, 지식과 문화의 향유가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어준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1980년대 영국 리버풀의 거리, 독일 내 터키 이민자와 터키에 거주하는 터키인을 주소재로 삼았다. 회퍼가 본격적으로 이러한 ‘공간’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저는 도시 이곳저곳 누비기를 좋아해요. 길을 걸을 때마다 건물 파사드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항상 궁금합니다. 당시 터키 이주민의 집과 가게를 방문하면서, 공간에는 인간의 정서가 묻어나고, 그만큼 공간은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1990년대부터 그 특성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로서 공간의 사진을 찍게 됐습니다. 그래서 공간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 우리가 공간에 무엇을 투영하는지 밝히고 싶었어요.” 이후 그는 50여 년간 공공장소의 내부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 이미지는 일견 건축사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는 건축양식이나 내부 인테리어보다, 인간과 물리적 장소, 사회적 환경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는 데 더 관심을 둔다. 곧 그의 사진은 공간의 ‘초상’과 같다.



    1970년대 후반,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유형학적 사진’을 이끈 베른트 베허를 사사한 회퍼는 흑백사진을 고수했던 스승과 달리 색채가 선명한 대형 이미지를 고유의 조형어법으로 삼았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중앙에 소실점을 두고, 소실점 정반대 지점에서 전경을 좌우대칭 구도로 촬영한 모습을 담고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공간의 한 부분만 확대해 보여준다. 어느 쪽이든 이미지에는 공간의 구조와 그 안의 사물이 상세히 포착돼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저택에서는 늘어선 아치, 기둥의 섬세한 조각, 천장화나 바닥의 결을, 모던한 도서관에서는 장서의 높낮이와 책 등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의 구조, 형식적 반복이 만들어내는 패턴, 형식의 변주와 더불어 공간을 채우는 빛은 작가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오직 자연광과 장소에 이미 설치된 조명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빛이 어느 방향에서 들어와 무엇을 비추는지 빠르게 감지하고 알맞은 타이밍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이 관건이다.

    영속의 시간을 담은 듯한 그의 작품은, 본능과 순간의 행운이 깃든 결과물이기도 하다. “공간을 탐색한 뒤 어디서 무엇을 찍을지 이제는 직감으로 느낍니다. 공간이 대중에게 개방되지 않는 제한된 시간 내에 얼른 촬영을 마쳐야 하니까요. 공간이 이야기하는 바를 듣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해요. 공간 그 자체와 공간 속 여러 사물이 말하는 바에 의존하죠.” 촬영 시간은 짧지만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저는 보통 촬영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화해요.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공간과 이곳에 내재한 특징을 사색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때 조명과 분위기는 매우 중요하죠. 때때로 공간의 특징을 밝히기 위해, 내 자의식이 반영되지 않은 ‘나 이전의 이미지’에 약간의 개입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공간의 디테일을 부각한 세로 2m에 육박하는 대형 포맷의 사진을 보면, 작가의 설명처럼 이미지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칸디다 회퍼가 인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을 사색하는 방식은 아이러니하다. 공간을 소재로 삼지만, 사람이 부재한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 이것 역시 회퍼 작업의 중요한 특징이다. 초기작 이후로 그의 화면에서 사람은 점차 사라지고 공간 그 자체만 가득 나타났다. 역설적으로 정적이고 고요한 모습은 공간에 머무른 이들과 사물의 쓰임새를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부재를 통해 확인되는 존재의 숙명. 이미지 속 텅 빈 의자와 책상은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하고, 이미지 너머의 관객에게 이곳으로 들어와 앉아보도록 권유한다. 그것은 또한 작품을 해석하는 지평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관객에게 본인의 시각이나 해석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작가는 그들이 자기 뜻대로 생각하고 상상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작가가 아닌 관객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볼 때, 어떤 느낌을 받는지 궁금했다. “이미지 속 공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초대하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회퍼는 이미 촬영한 장소보다는 새로운 ‘깨달음의 장소’를 찾는 일에 더 신이 나는 듯하다. “제 호기심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향합니다. 물론 이미 다녀온 곳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때로는 다시 가보고 싶기도 해요. 그러나 대개 저는 앞을 내다보고 다음 일을 궁금해하죠. 바로 이것이 저를 움직이는 동력입니다.”


원고 작성: 한지희

인터뷰 진행: 한지희

편집, 감수: 김재석

디자인: 진민선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 전위미술의 중국 진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