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컬처 2018년 4월호: 도예가 이헌정 인터뷰
이헌정 개인전 <세 개의 방>이 소피스갤러리에서 열렸다. 도자 아트퍼니처 회화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대규모 도자 설치작업을 포함한 신작 20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도예, 조각, 건축 세 장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오랫동안 천착해온 공간에 대한 사유를 갤러리 1, 2관과 디렉터 사무실 3개의 방에 풀어낸다. 작가는 갤러리의 ‘공간’을 어떻게 연출했을까? 이 안에서 도예와 조각, 건축은 서로 어떤 방식으로 조응하는가? 작가를 만나 전시 주제와 작업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다. / 한지희 기자
Art 전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Lee 이 전시는 도예를 바탕으로 그동안 탐구해왔던 조형과 공간에 대한 생각을 작품으로 구현한 자리로, 30여 년의 예술 여정을 종합해 보여준다. 3개의 공간으로 나뉜 갤러리 구조에서 영감을 얻어 ‘시선의 전복’ ‘사무와 전시의 공존’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각 방을 연출했다.
Art 신작이 20점이나 되고, 작품의 규모도 매우 크다. 전시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겠다.
Lee 나는 작업을 굉장히 빨리 하는 편이다. 실제로 작업을 실행하는 시간보다도 아이디어를 구상해내기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작업할 때도 치밀하게 하기 보다는 직관적으로, 흙장난 하듯이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덜 걸린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는 총 6개월 정도 소요했다. 나는 노동에서 삶을 즐겁게 하는 가치들이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에 작업 자체를 즐긴다. 자꾸 몸을 움직이며 영감을 얻지,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게 아니더라(웃음).
Art 캔버스 회화와 도자 피규어가 마주보는 등 작업의 배치가 흥미롭다.
Lee 첫 번째 방은 갤러리라는 공간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되, 이에 대한 통념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연출했다. 나는 도자로 동물이나 사람의 피규어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보통 감상의 대상이다. 나는 피규어가 그림을 보는 것처럼 배치해 감상 대상과 주체의 역할을 바꿔보려 의도했다. ‘보여 지는’ 대상이었던 피규어가 오히려 관객을 보는 주체가 된 것처럼 말이다. 화면에 묘사된 대상과 그림을 보는 피규어를 동일한 형상으로 조형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이 관계의 전복을 알아챈 관객은 자신이 감상의 주체인지 대상인지를 고찰한다. 이러한 독특한 전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회화라는 매체가 더 적합했다. 만약 도자기에 그렸다면 그림과 피규어의 물성이 비슷했을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물리적 특성을 달리 하기 위해 도자기와 이질적 매체인 캔버스를 택했다.
Art 전시 제목, 출품작 전반에서 공간이라는 개념이 많이 부각됐다. 특히 세 번째 방의 핵심은 ‘공간’ 그 자체인 듯하다.
Lee 세 번째 방의 주제는 ‘상자’다. 외부만큼이나 내부가 중요시되는 상자를 통해 ‘내부 공간’을 조명하고 싶었다. 도예를 할 때부터 나는 ‘비어있음’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도자기 안에는 항상 빈 공간이 존재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이 채워져 있으면 가마에서 터지거나 갈라지기 때문에 이러한 제작과정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안을 비워야 한다. 출품작 중 구멍 뚫린 의자나 안에 풍경을 꾸민 상자 모두 내부의 공간을 강조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도자의 ‘안’은 상자처럼 열어서 안을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는 깨지기 전까지 볼 수 없다. 가끔 나는 스툴처럼 막힌 형태를 만드는데 이 때 그 안에 나만 아는 그림을 그리거나 비밀을 적어놓기도 한다. 이것이 깨지면 탄로 나겠지만, 설마 깨지지 않겠지 생각하며 적어놓는 것이다.
Art 전시 대표작 <공예가의 방 혹은 건축가의 그릇>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Lee 이 작품은 사무와 전시의 공존을 꾀한 두 번째 방, 디렉터 사무실의 <Wall Chair>를 발전시킨 작업이다. 도자 벽면을 의자 형태로 돌출하는 방식을 더 확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완성한 작품이 도자기로 만든 방인 <공예가의 방 혹은 건축가의 그릇>이다. 그동안 내가 공부해온 공예적 기술, 조형적 특성, 건축적 공간 개념을 집약했다. 작품 제목은 ‘공간’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다. 물리적인 규모를 감안하지 않고 보면, 도예가가 만든 사발 내부의 공간이나 건축가가 설계한 거대한 공간은 사람의 행태를 담는 공간이란 점에서 마찬가지다. 나에게 공간이란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다. 무엇을 담을지는 매번 다르지만.
Art 오래 도예를 공부하다가 돌연 건축으로 전향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Lee 도예를 공부하다가 조각을 하고, 마흔 다섯 즈음 건축을 시작했다. 건축은 갑작스레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분야다. 실은 오래전 캐나다에 또 다른 베이스캠프를 만들기를 꿈꾸며 유학 준비를 거의 마쳤는데 여건상 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서야 한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게 됐다. 건축을 공부했지만 지금 건축가는 아니다. 건축이라는 다른 장르의 예술을 들여다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혼자서 생각하고 스스로 마무리 짓는 사람이다. 그런데 건축이 진행되는 양상은 조금 다르다. 한 사람이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팀 체제로 수행한다. 음악으로 치자면 도예는 기타 솔로 연주고, 건축은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여러 개체가 모여 하나의 작업을 구축하는 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다.
Art 건축, 조각, 도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분야가 특별히 있나?
Lee 나는 여행과 귀환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한다. 나는 도자가 귀환할 곳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하듯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도예로 결국 돌아온다. 도자기 만드는 일이 제일 좋다. 도자기를 만들 때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진행: 한지희
원고 작성 및 편집: 한지희
감수: 김재석
디자인: 진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