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an 01. 2022

동학, 어떻게 할 것인가 (1)

[다시개벽] 제5호(2021년 겨울호) 권두언 

동학, 어떻게 할 것인가 (1)


새별 조성환 / 편집위원



홍박승진 편집위원이 인터뷰 준비를 하고 녹취까지 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바람에 영광스럽게도 ‹권두언›의 기회가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것도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동학’ 특집호에서 말이다.


이번 호의 변화는 처음으로 신설된 “다시뿌리다” 코너이다. 이 코너에서는 연구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동학을 하는 시민(侍民)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공주, 곡성, 광주, 전주, 익산에서 동학과 인문학을 하는 여성과 청년들이 동학과 만난 이야기와 인문학을 하게 된 경위를 들려주고 있다.


이어지는 ‹다시쓰다›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동학을 ‘학적’으로 조망한 글들을 모았다. 여성학, 역사사회학, 수양학, 평화학,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동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다시말하다›는 이번 동학특집호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여 년 가까이 한일 양국에서 동학을 연구하고 실천해 온 동학연구자 박맹수 총장(원광대학교)을 30대 동학연구자 홍박승진 편집위원이 단독 인터뷰하였다. ‹다시읽다›에서는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학론’을 시민논객 강주영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잇다›에서는 이돈화의 ‘한민족론’과 나용환의 ‘한울도구론’이 소개되고 있다.


이번 동학 특집호의 특징은 시민과 학자의 ‘두 눈’으로 동학을 균형 있게 보려 하였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이런 ‘양행(兩行)’의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한 여성과 청년의 필진이 대부분인 점도 이번 호의 특징이다. 앞으로 동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목소리들을 하나씩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학을 하는 시민들】


‹다시뿌리다›의 첫 번째 주인공은 공주에 있는 ‘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 정선원 선생님과 함께 동학을 하고 있는 이은영 님이다. 공주에서 만난 여성과 동학으로 인생의 제2막을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성평등의 시작은 동학이다>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여성의 눈으로 동학을 바라보고 동학을 실천하고” 있는 ‘동학페미니스트’이다.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움직임들이 머지않아 ‘여성동학’의 탄생으로 이어지리라 기대된다.


광주한살림의 김진희 이사의 <한살림과 동학사상>도 필자에게는 귀한 글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광주 무등공부방)을 오가면서 매달 1번씩 1년 동안 ‘동학사상사’ 공부를 같이 해 주신 동학(同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1년 동안의 강의 후기에서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에서 ‘한살림’을 이끈 무위당 장일순에 이르는 140여 년간의 ‘동학사상사’를 개관하면서, 앞으로 한살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한살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엄마로서, 주부로서, 운동가로서, 1인 3역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원고청탁에 응해 주신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댄스만달라’를 주제로 연구와 활동을 겸하고 있는 원광대학교 박사과정의 송지용은 지역과 국경을 넘나들면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 시대의 ‘동학 청년’이다. 최근에는 동학과 개벽학에서 지구학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지구되기’ 워크샵과 퍼포먼스를 실험하고 있다. <‘지구의 몸짓’으로 나와 지구는 ‘우리’가 된다>에는 그가 참여한 예술적 활동과 실험적 도전들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독자들은 이 글에서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한 청년의 고민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전주시평생학습관에서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박은정 님의 <내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까닭과 의미를 생각해보다>는 인문학 비전공자가 지역 인문학 강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솔직담백하게 들려주고 있다. 특히 강유원 선생님의 저작이 커다란 안내서가 되었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저자의 뚝심과 인내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곡성의 ‘이화서원’에서 동양고전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타마 고석수의 <타마, 공부하다, 글쓰다, 놀다, 바라다–이화서원에서 부치는 편지 1>은 21세기에도 서원운동이 가능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화서원’은 [동학의 천지마음]의 저자 김재형 선생님이 문을 연 새로운 형태의 학문공동체이다. 이곳에서 [주역]과 [도덕경]을 한중일 3개 국어로 연마하고 있는 저자는 대학이 아닌 서원이야말로 살아있는 배움의 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시대의 ‘학’으로서의 동학】


원불교 이주연 교무의 <‘여성’으로서의 여성, ‘한울’로서의 여성>은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동학을 조망한 글이다. 그런 점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이은영 님의 <성평등의 시작은 동학이다>와 상통하고 있다. 여성유학은 요원한데 여성동학은 활발한 느낌이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모습에서 여성의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점이 일상적이면서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모습에서 해월이 말한 ‘한울로서의 여성’을 발견함으로써 ‘한울로서의 어머니’를 도출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울로서의 여성관이야말로 자칫 페미니즘이 범하기 쉬운 이분법적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성성에 대한 포괄적 접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종래에 ‘동학’이라고 하면 혁명이나 전쟁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대개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과 어머니를 연결시킨 기획은 동학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한울’적인 사람은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이병창 명예교수의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본 동학의 탈서구중심주의 – 유학사상, 기독교사상과 동학사상의 차이를 통해>는 서양철학자의 시각에서 본 동학론이라는 점에서 귀를 쫑긋하게 한다. 이 글에서 저자는 동학을 “유학적 사상의 전통 위에서 기독교 사상을 수용하면서 동서양 사상의 결합을 시도”한 사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이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깨달음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서 동학과 유학, 동학과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섬세하게 구분하고 있다. 특히 동학에서 말하는 ‘영적 능력’을 “집단의지를 형성하는 사회적 능력”으로 해석하는 대목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철학적 훈련과 종교학적 소양이 겸비된 학자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어지는 사회학자 김상준 교수의 글도 [다시개벽]으로서는 행운이자 영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홍박승진 편집위원과 박길수 대표의 ‘모심의 정성’ 덕분일 것이다. <역사사회학자가 본 동학>에서 김상준 교수는 ‘세계근대사 3단계론’의 지평에서 동학을 ‘후기 근대’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동안 가려져 온 동학의 미래적 가치를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관민공치의 집강소’가 지니는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분석은 다시 읽어도 탁월하다는 느낌이다.


동학・천도교 연구자이자 실천가인 김용휘 교수의 <수양학으로서의 동학―어떤 하늘을 열어낼 것인가가 내게 달렸다>는 서구중심적 철학 개념을 비판하면서 ‘수양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동학을 재조명하고 있다. 수운 최제우가 설파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마음챙김과 내맡김으로 해석하면서, 동학=천도를 ‘하늘 파도타기 기술’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은 그동안 막역하게 느껴졌던 ‘수심정기’의 의미가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달될 것이다.


오스트리아 유학생 이희연의 <평화와 전환의 역동, 평화학과 동학의 만남>은 동학을 ‘평화학’이라는 지평에서 재구성하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평화학으로서의 동학’ 연구를 위해 유학길을 떠난 용기있는 청년이다. 저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올 여름 원광대학교에서 있었던 ‘[동경대전] 공부모임’(좌장 박맹수 총장)에서였다. 매주 수요일 아침 8시에 시작되는 스터디에 참석하기 위해 광명에서 새벽차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유학을 가게 된 자초지종을 듣고 “이제 동학을 이런 식으로 하는 시대가 됐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동학이 진화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 사건이었다.


홍박승진 편집위원의 <동학 민주주의는 상향식 평준화다>는 자신이 서양철학사의 미궁 속에서 어떻게 동학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자전적으로 소개하면서, 동학은 모든 생명이 절대적으로 존귀한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는 점에서 ‘상향식 민주주의’라고 평가하고 있다.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세종실록에서 자주 접했던 ‘승평(昇平)’ 개념이 떠올랐다. ‘승평’이야말로 한국인들이 추구한 ‘상향식 평준화’ 개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김동민 이사장의 <대중문화의 과학>은 최근에 다시 대두되고 있는 SF 장르 등을 예로 들면서, 대중문화 연구도 이제는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학의 역사를 다시 듣다】


이번 호의 압권은 30대의 신진 동학연구자와 60대의 원로 동학연구자 사이에 주고 받은 ‘동학문답’이다. [다시개벽]의 편집위원 홍박승진(1988~)이 묻고 원광대학교 총장 박맹수(1955~)가 답한 <뼈와 풀에서 사상의 몸을 느끼는 역사학자>는 33년이라는 시간 차를 ‘동학’이라는 사상으로 잇고 있다. 무엇보다도 박맹수 총장의 일생의 동학 연구를 집대성한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과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를 정독하고, ‘학적인’ 질문을 던진 최초의 인터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터뷰가 끝나고 박맹수 총장은 “질문 수준이 높으니까 답변 수준도 저절로 높아진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동학의 의미를 다시 묻다】


이번 호의 ‹다시읽다›를 홀로 지키고 있는 <문명전환의 시대에 동학의 답은 무엇인가 – 창비 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를 읽고>의 저자 강주영 선생은 목수이다. 그러나 그는 SNS에서 가장 논쟁적인 담론을 하는 ‘시민동학론자’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가장 진지한 ‘동학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동학농민혁명으로 말하면 ‘김개남’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지난 2019년 여름, 전주에서 ‘동학과 개벽’ 시민강좌를 마치고 [전봉준평전 - 봉준이 온다]의 저자 이광재 선생님과 셋이서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은 “이분들에게는 아직도 80년대 혁명파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글 역시 이번 호에서 가장 논쟁적인 글이다.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학 이해를 ‘개신유학’과 ‘개신노자’로 정면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옥의 동학 이해는 동학의 종교적 측면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은 앞에서 살펴본 김용휘의 <수양학으로서의 동학>에서도 반복되고 있어 흥미롭다.


【동학의 유산을 다시 잇다】


신동엽 연구자 박은미 님의 <조선인의 민족성을 논하노라>는 천도교 이론가 야뢰 이돈화가 1920년에 쓴 글을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 이돈화는 대종교 계열의 「단군신가(檀君神歌)」를 인용하면서 조선인의 민족성을 ‘선심(善心)’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선심’은 다른 말로 하면 ‘도덕’으로 바꿀 수 있는데, “앞으로의 세계는 반드시 도덕이 승리하는 세계가 되리라”는 야뢰의 확신은, 오구라 기조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도덕지향적’인 한국인의 성향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 도덕이 시대와 함께 변해야 한다는 지적은 도덕의 개벽을 주창한 개벽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천도교 경전 공부하기]의 저자 라명재 선생의 <천(天)은 인(人)의 기용(器用)>(1910)은 삼일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나용환의 글을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노자』 41장에 나오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을 38장의 ‘상덕부덕(上德不德)’의 사상에 맞춰서 ‘대기불기(大器不器)’로 수정한 점이 인상적이다. 아울러 이것을 천도교의 한울 사상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동학,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지난 11월에 동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3차례나 참여한 적이 있다. 나주에서 있었던 ‘한일동학학술대회’, 여주에서 있었던 ‘여주동학학술대회’, 공주에서 있었던 ‘[동경대전] 학술 세미나’가 그것이다. 이들 동학학술대회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동학 연구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사실 규명에만 집중해 왔던 지난 30여년 간의 연구 경향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촉발시킨 것은 아마도 코로나19, 기후변화, 지방소멸과 같은 각종 ‘위기’의 징후들일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동학은 과연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마치 19세기 말의 위기의 시대에 유학을 다시 물으면서 동학이 나왔듯이 말이다. 이 물음은 김용옥 선생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5)에 빗대어 말한다면, “동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새로운 물음은 새로운 학문을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다시 동학’의 징후이기도 하다. [다시개벽]은 이러한 물음과 징후에 답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런 추세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이하는 2024년에는 ‘다시 동학’에 대한 구체적인 답안과 전망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개벽] 제5호, 2021년 겨울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