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당시, 9월 이후의 전쟁에서[재기포, 2차기포] 동학군은 ‘양반, 관료’들에게 함께 항일 구국 전쟁을 벌이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cf.전봉준]. 그 까닭은 양반 관료들[당대의 기득권자]이 동학군이 지향하는 만민평등사상과 보국안민(백성들이 나랏일을 걱정하고 참여함)의 철학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로서는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들의 지배력과 기득권만 보존된다면, 백성들과 평등한 자격으로 더불어 나랏일을 도모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능동적으로 사고하지 않았더라도, 온몸으로 느끼고, 느낀 대로 행동했다. 그 정점에 있는 이들이 1910년 전후 매국노들이며, 이후 친일매판자본, 친미매판자본으로 계승/진화해 간다) .
1895년 이후의 의병전쟁 당시에 이러한 상황은 급격한 변이를 겪으며, 민중(동학)세력과 유생들의 결합이 급진전된다. 그러나 우국적 양반(유생)관료를 제외한 대다수의 기득권자(양반계층)들은 그 계급적 각자위심의 완고함을 결코 탈각하지 않고, 면면히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욕망/욕심/품성의 문제에 더하여, 인간 본연의 욕망/욕심/품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반면에 당시 동학에 입도한 대다수의 민중들은 입도하는 그날부터 양반 상놈이 맞절을 하고, 서로를 접장으로 공대하는 동학의 평등문화에 열광한 사람들이었다. 1800년대 들어, 국가의 신분제도 완화/타파(관노비 해방=1801) 움직임에 고무되고, 양반들의 수탈 등에 자극받아, 민중들의 신분상승 욕구 또는 만인평등 사회의 희구가 상승하던 시운을 읽으며, 동학이 등장한 것이다[오늘날 헬조선에 절망하는 청소년의 ‘방탄’이기를 자처하는 ‘방탄소년단’에 열광하는 ‘아미 열풍’을 이에 비견할 수 있다].
동학이 당시 민중들의 호응을 얻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유무상자(有無相資)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 서로 나누고, 돕는다는 것! 물론 유무상자 전통의 원형은 이미 전통사회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ex-患難相恤]. 이런 향약 규범이 아니더라도 전통사회에서 서로 돕고 사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라고 보는 게 상식이다. 다만, 조선 후기의 경제적 궁핍과 관의 수탈이 심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미풍양속의 실효성이 상실되면서 실농 극빈층이 급증하였고, 국가는 이들을 구제할 여력이 없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유무상자의 민족적 전통을 지탱할 공동체 내부의 신뢰와 물적 토대가 와해되었다는 말이다.
동학은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유무상자 전통을 ‘민간(동학교단)’ 차원에서 복원하여 제도화하고 더욱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무상자’의 경제체제를 제도화하고, 모심의 혁명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동학의 비전과 실천은 당시 민중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는 생명의 은인 같은 역할로 다가왔다. 그 은덕이 의지로 승화되고, 욕구로 강화되면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그동안 동학의 유무상자 사상/이치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거의 없었다가, 동학을 생명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박맹수]에 의해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다. 유무상자는 그 자체로도 연구 대상이지만, 동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틀을 전복하는 핵심어다. 다시 말해 동학을 ‘가난한 사람들, 천민들에게 먹고 살 길이 열리고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동학의 꿈을 극히 축소 왜곡하는 것이며, 보국안민 및 척왜양창의를 위한 ‘싸움-혁명’을 최고의 성과로 보는 것도, 그래서 일면적인 이해에 불과하나다. 그러한 이해는 일시적인 유행에 편승하는 길이지만, 길게 보아 동학의 가능성을 스스로 망치는 길임에도, 실제로는 오랫동안 그쪽 길을 걸어왔다. 동학의 ‘유무상자의 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아니, 우리 나라의 형편이 그러한 이해를 할 여유를 허락지 않았다는 것이 좀더 적확한 비평이다.
유무상자의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동학에서, 유무상자의 유래를 보자.
“귀천이 같고 등위에 차별이 없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유박(帷薄; 포교소)을 세우니 과부와 홀아비들이 모여 들며, 재물과 돈을 좋아하여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이 서로 도우니(有無相資) 가난한 자들이 기뻐한다.”( 「동학배척통문」, 1863)
이 글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용담(경주)에서 동학의 도를 가르치고 덕을 펼치자,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을 ‘양반의 입장’에서 묘사한 것이다. 양반유생들은 동학에 몰려든 사람들이 ‘재물과 돈을 좋아하여’라고 비아냥댔지만, 유무상자의 경제공동체는 가난한 사람들끼리 콩 한쪽을 나눠 먹는 공동체가 아니라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이다. (돈과 곡식을) 가진 사람도 동학에 들어왔으며, 또한 그들의 일방적인 시혜로 공동체가 꾸려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재물과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면, 괜히 동학에 참여하여 맥없이 자기의 재물과 돈을 나눠 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이러한 유무상자의 공동체는 ‘경주 용담’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반짝했던 사건이 아니라,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면서 동학(신앙)공동체의 핵심 원리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무릇 우리 동학 사람들은 같은 연원(최제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니 마땅히 형제와 같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형은 굶고 있는데 동생만 배부를 수 있을 것이며, 동생은 따뜻하면서 형은 추위에 떨어서야 되겠는가. (중략) 크게 바라건대 모든 군자(동학신자)들은 자신이 소속된 접안에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끼리 각각 서로 힘을 합해서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해를 어떻게 보낼까 걱정하는 마음을 면하도록 하시오.”(『해월문집』, 1888)
“같은 소리는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이치이니 지금 우리 동학에 이르러서는 그 이치가 더욱 크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환난을 서로 구제하고 빈궁을 서로 보살피는 것 또한 선현들의 향약에 들어 있는 것인데 우리 동학에 이르러서는 그 정의가 더욱 막중하다고 하겠다. 그러니 우리 동학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약속을 지켜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서 규약에 어김이 없도록 하시오.”
(同聲相應, 同氣相求, 有古今通義, 而至於吾道, 其理尤著. 患難相救, 貧窮相恤, 亦有先賢之鄕納, 而至於吾道, 其誼尤重. 凡我同道之人, 遵一約束, 相愛相資, 無或違規事.『 해월문집』, 1892)
위의 인용문에서 우선 유무상자가 ‘연원을 같이하는 형제 같은 사람들’, 즉 동학공동체의 공공적 전통임을 상기한다. 둘째, 경제와 ‘마음’이 서로 관계되는 것임을 상기한다.(cf.恒産-恒心) 즉, 유무상자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수도수양의 동학공부와 직결되는 핵심 가치임을 보여준다. 셋째, ‘같은 소리, 같은 기운’이라는 말에서 “이질적 기화와 동질적 기화”의 ‘이천식천(以天食天-海月法說)’의 경제[살고 살림] 이치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환난상구(患難相求), 빈궁상휼(貧窮相恤), 상애상자(相愛相資) 등의 덕목은 전통을 계승한 것이되, 동학에서 그 이치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정의(正義=誼)가 막중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무상자’의 원리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긴급조치가 아님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동학은 신앙/수행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생명/생존/생활 공동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동학은 그 시대의 ‘방탄소년단’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결단은 ‘가난한 자들이 누리는 혜택’만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의 재부(財富)를 나누고, ‘가난함’ 쪽으로 이동하거나, (예전과 비하여) 가난하게 사는 삶을 수용하는 결단, 즉 ‘부유해짐’과 ‘가난해짐’이 상존(相存)하고 상존(常存)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동학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정신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무상자’, 즉 ‘안빈낙도’는 과거 ‘한가하고 유복한’ 선비들이 산천계곡에 유유자적하며 읊조리는 한시(閒詩)가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회복해야 할 미래의 윤리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은 개인 윤리에 국한되었던 ‘안빈낙도’를 사회적 정신이 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동학혁명 이후의 역사는, 그러나, 동학의 이러한 꿈이 좌절되고, 뒤틀려 온 역사였다. 동학 창도로부터 160년, 동학혁명으로부터 123년, 천도교 선포(1905)로부터 114년. 기나긴 가시밭길과 늪지대를 지나면서, 우리 민중들은 수많은 혁명을 거듭하여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러, 동학이 꿈꾸던 만인평등의 ‘제도적’ 성취[=헌법적 가치와 위력의 발휘]에 이어, 동학의 유무상자 혁명에의 예언을 서서히 성공시켜 가고 있다. ‘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그것이다.
우회와 좌절을 거듭하며, 그러나 끊임없이 민주화를 향한 길을 헤쳐 나온 덕분에 ‘평등’은 정치적으로 제도화되었다[물론 그 명목상의 성취와 그 실질적인 진전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그러나 명목과 실질은 당대 기득권 - 민중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며 넘나든다. 그것이 오늘 현재의 모습이다; 촛불혁명-대선-지선 승리의 의의]. 기득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악인에게조차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게 마련이다[한울님은 무선선악]. 조선시대의 양반관료가 신분제도, 즉 반상의 윤강(倫綱)을 기득권을 수호하는 최전선의 보루로 삼았다면, 오늘날은 ‘사유제산제도’나 ‘자유로운 이익추구’ 혹은 그러난 이념을 숨긴 ‘ 경제성장’ 절대주의가 그 보루이다.
온갖 정경유착과 노동착취로 축적된 자본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이익 추구의 결실로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경제적 성장을 성취한 것은 보는 대로다. 그러나 그 경제적 성취는 얼마나 많은 주검 위에 올려진 탑인가.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노동’은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그 경제적 성취를 공유하기보다도 여전한 노예 노동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한편으로, 우리가 전취한 경제적 성과와 문명적 성과(利器)들은 우리의 욕망을 들쑤시고 강화하여, 상대적 빈곤감이나 박탈감, 인간적인 소외감으로 인한 우리의 불안과 불행과 불만은 얼마나 더 높아졌는가. 그 속에서 신분제도에서 후퇴한 기득권자들은 ‘자본’을 매개로, 유구한 (신분적) 기득권을 여전히 실질적으로 누리며 산다. 금수저 이야기다.
이제, ‘경제민주화’로 대변되는 새로운 시대에 직면한 그들이 최저임금 상향, 소득(임금)주도성장, 기본소득제 도입 등에 반대하는 까닭도 그것이다. 최저임금이나 소득주도성장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나 서민들의 생활여건/복지 향상에 ‘긍정적’이냐 아니냐의 갑론을박도 점입가경이고, ‘을과 을의 싸움’으로 자칫 공멸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지 우려를 낳기도 하고, 진보 진영의 일각에서도 실제 결과는 오히려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보고와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근시안적(직접적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나로서는 부족하다. ‘될지 안 될지 한번 해 보기라도 해야지’라고 밀어붙이기에는 그 후과가 너무도 가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얘기는 할 수 있다. 어떠한 제도든, 장기적으로 그것이 선순환을 낳느냐 악순환의 시발점이 되느냐는 단지 제도 자체의 성질에서 기인하기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삶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간’들의 수용 자세로부터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정밀한 계산을 통해 정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만들어 가는 문제”라는 말이다.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언제나 ‘대체로 틀리는 것’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무능해서라기보다는, 그 예측치가 현실적인 인간들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것이 실제 현현되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저임금제’ ‘소득(임금)주도성장’ ‘기본소득제’ 등이 지금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며 추진되어야 할 가치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정책은 채택하는 순간 성공이 보장되고, 실행되는 순간 행복이 도래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매 순간 옳은 방향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산출하도록 키워 나가야 하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이 정책을 책임진 위정자들은 정책 자체의 완성도를 높여 가는 노력과 더불어 ‘그래 얼마나 잘 되나 보자’라는 마음과 ‘글쎄 그 길이 아니라니까’라는 말/마음들을 거름과 채찍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제도와 법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유무상자 경제학의 본지이다. 유무상자의 경제학은 ‘경제이론’만이 아니라 수양학이며, 정치학이며, 문화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세 가지 혹은 그 여러 가지가 ‘합쳐진’ 것이 아니라, 경제와 수양과 정치와 문화 등등은 본래 하나로 이어진 문제이기 때문이다(cf-恒産恒心).
결국 “함께 살기, 더불어 살기, 천천히 살아가기”라는 태도/인식/문화와 더불어 수용되고, 실행되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나 실패 요인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데 모두 마음과 기운(힘, 노력)을 보탠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유무상자든 경제민주화든 혹은 그 하위의 최저임금, 기본소득 등은 단지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52시간 노동”과 “일자리나눔” 등에서 보듯이 삶의 전반위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본래, ‘경제’라는 말 자체가 살아가는 일을 아우르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서, 익히 보듯이, 오늘,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을 매개로 (준)신분제 사회를 암암리에/노골적으로 구가해 온 것이 그들이다[갑질/ex-아시아나, 대한항공]. 그 마음을 내려놓고/비우고, 재생과 상생, 그리고 영생(지속가능한 성장)으로 향하는 마음가짐, 그러한 방향에서 기업의 성장(성숙)의 경로를 모색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는 상대적으로는 ‘무산자’일지라도 절대적으로, 또는 인류사 전체를 기준으로, 혹은 생태공동체 전체의 관점으로 볼 때는 너무나 많이 가지고, 너무나 많이 누리는 ‘ 유산자’ 중의 유산자이다.
기득권자, 재벌, 사용자로부터 최저임금을 받아내면서, 우리 스스로는 무엇을 내놓을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돌이켜 보고(성찰) 다시 말하면, ‘그들’이 ‘내 안’에도 있다. 혁명은 밖으로와 더불어 안으로도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는 다른 말로, 모심의 혁명이다.
“모신 것이란 안을 신령스럽게 하고, 밖으로 기화하여,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감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水雲, 東經大全, 論學文, 이 해석은 필자가 처음으로).”
안으로 ‘신령’의 혁명과 밖으로 ‘기화’의 혁명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방법은 각지불이다.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것이 내 할 탓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을 풀어가는 순서가 그렇다는 말이다[ex-하루 한 송이 꽃].
신령스럽게 한다는 것은 ‘도통’한다는 신비주의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말로는 일상생활에서 수양을 거듭[日用行事莫非道]하여,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너그럽게 함으로써, 한울님께 부끄럽지 않게 하는 일이다. 밖으로 기화한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기’이다. 그것만으로 한편의 드라마요, 한 권의 책이 되는 이야기다. 만사지 밥 한 그릇의 이리를 아는 데 있듯이, 만사지가 ‘신령’과 ‘기화’를 아는 데 있다. 각지불이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다. 신령과 기화를 지속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더불어 공부’하는 것이다.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함께 공부하기 위하여 좋은 것은 함께 읽기와 함께 말하기이다.
유무상자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촛불혁명 이후 오늘까지의 온 여정은 이제 겨우 사립문을 나선 격에 불과한 것이다. 아침마다 쓸기를 거듭하여 평평하던 마당을 나서, 우툴두툴 돌부리가 연신 발끝으로 돌진해 온다. 그러나 이마저도 넘어야 할 산길에 비하면 ‘ 양반’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왔다. (다음 호에 계속).
*유무상자를 경제(먹고사는일)을 넘어, 서로 공부하고(과실이 있거든 서로 책하고 공덕이 있거든 서로 권하세), 서로 더불어 삶으로 확장시키며, "호혜경제"로서 우리 시대 삶의 원리로 재조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