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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20. 2022

천도교수도공부-견성공부2

개벽라키비움-천도교수도공부8

[편집자 주] 여덟 번째 천도교수도공부모임이 4월 15일에 진행되었습니다. 천도교 수도의 방법과 절차, 그 과정을 크게 견성공부와 견기공부로 나누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견기(見氣)공부란 성품과 기운 가운데 기운을 단련하는 것이며, 주로 현송(顯誦, 주문을 소리 내어 읽음)을 하는 가운데 한울님 기운[至氣] 내 기운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기운은 약동불식한다고 표현되지만, 그것은 또한 고요하고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체득하는 것이 견성(見性)공부입니다. 고요함의 바탕 위에 자리 잡을 때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왜곡됨이 없이 체득할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떨림(견기공부)을 통해 체득하는 것의 실상은 이 견성(성품을 봄)공부에 의해 해체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견성공부에 대해서는 지난 번 공부모임에서도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이날(4.15)도 견성공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좌장인 라명재 동덕이 이날의 수많은 논의들을 통섭하여, 종합적인 측면에서 이를 재정리해 주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라명재 동덕의 ‘견성공부론’이지만, 그 안에 이날 이야기들이 모두 녹아 있기도 합니다.


-- 이하 라명재 정리


삶은 좋은 일만 있지 않다. 무수히 희로애락을 넘나들며 생로병사를 거쳐 가는 게 삶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게 마련이고 건강이 있으면 병도 있게 마련이다. 이 모두 당연하고 자연스런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건강한 삶은 당연히 여기고 즐기던 사람들도 질병의 고통과 죽음에 직면해선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과 시련이 오는지 갈등하고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생기는 의문과 질문이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며, 그로부터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공부가 시작된다. 삶의 본질에 대한 의문에 답을 구하는 것, 이것이 견성공부이다. 편안한 삶에는 의문과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때문에 석가도 성 밖의 무수한 생로병사를 접하고 비로소 삶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수운 대신사도 부모의 이른 죽음과 자신의 신분의 한계, 또한 당시 조선 민중의 고단함이 없었다면 도를 구하는 길에 나서서 동학을 창도하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엔 바르게 살며, 신심도 두텁고, 누구보다 복되게 오래 살아야 할 것 같은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요절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러한 삶의 예기치 않은, 기대를 위배하는 변화는 무엇 때문인가? 근본적으로 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태어나,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러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의문과 해답 찾기가 종교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종교의 해답에서 현재의 죽음 연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구와 답이 시도되고 있다.


종교적 해답의 대표중 하나가 윤회설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생애 동안의 업에 따라 그 영이 맑아지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한다. 맑아진 영은 우주의 근본 진리에 한층 다가가 다음 생을 좀 더 차원 높은 삶으로 살지만, 타락한 영은 다음 생이 현재보다 더 낮은 차원의 삶을 살게 된다. 꾸준한 수행과 덕행으로 영이 맑아져 마침내 우주의 진리에 하나 되는, 깨달은 사람은 이러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해탈하여 그 영이 영원한 자유와 안식에 든다.


윤회설은 기본적으로는 개체영이 인과에 따라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신사가 깨달은 시천주는 내유신령과 외유기화가 오직 하나의 한울 성령임을 밝힌 것이다. 내유신령도 태어날 때 한울 성령으로부터 받은 것이요, 또한 외유기화의 끊임없는 간섭과 감응이 함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우주의 생명-물건까지-은 오직 혼원한 하나의 기운일 뿐이다. 그 기운이 형상화되어 나타날 때 지역과 때와 모든 여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뿐, 하나의 기운일 뿐이다.*

* “같은 성령이지만, 헤아릴 수 없는 큰 덕의 묘한 법이 큰 하늘과 넓은 땅의 모든 (환경의)차이를 그대로 따라서,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못에는 고기가 뛰는 것으로 나타나느니라.”(성령출세설)


그러나 그러한 맑고 깨끗한 갓난아기의 내유신령은 보고 듣고 배우며 생기는 자의식에 가려지며, 외유기화와 하나이며 그와 소통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점차 잊게 되니 이것이 개인의 습관심이요, 제이천심이고 각자위심이다. 그렇게 하나의 성령이면서 이를 잊고 살면 각자의 개체 의식이 되니 하나의 성령이나 둘이 된 것이다.


“「모셨다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을 해월신사께서 분석하여 말씀하시기를 「안에 신령이 있다는 것은 처음 태어날 때의 어린아이 마음이요, 밖에 기화가 있다는 것은 포태 될 때에 영이 강림하여 생명이 생긴 것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이 지당하고 극진한 것이니라.”(강론경의)


태어날 때 하나의 성령,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적자지심). 새싹은 자라면서 태어난 곳이 물이 풍부하고 해가 잘 비치는가에 따라 잘 자라기도 하고 덜 자라기도 하며 차이가 생긴다. 그런 상대적인 인식이 자의식이 되고, 각자위심이 되며 모순과 갈등이 빚어진다.

개체의식은 태어난 이후의 사태이고, 부모의 인과와 스스로의 인과에 따라 그 양태가 천차만별이 되지만, 태어나기 전은 그런 자의식 이전 한울 성령일 뿐이다. 이를 전생의 인과로 보는 것은 윤회설의 오해일 뿐이다.


“나 또한 처음은 없는 데로부터 생긴 한 물건일 뿐이니, 내가 태어나기 이전은 처음의 한 물건도 없었다. 만물이 없는 이전에 어찌 그 이치가 있었으랴. 저렇듯이 깨닫지 못한 것들이 옛 습관에 빠져서 생령이 있기 이전의 일을 깊이 연구하기를 일삼으니,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것이 진실로 한심한 것이라, 첫째 헛되이 속이는 것이 이것이오.”(척언허무장)


“사람이 한 번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물리의 자연한 법칙이라. 있는 데서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무엇으로 가히 밝힐 것인가”(척언허무장)


이런 각자위심으로 한울과 단절될수록 진리에서 멀어지는 생각과 행동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그대로 그 사람의 삶을 이루는 인과가 된다. 부모로부터 받은 인과에 더해 희로애락의 모든 삶의 모습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반면에 습관된 욕심과 자의식을 맑고 깨끗한 적자지심으로 회복하려는 수행을 꾸준히 이어가면, 한울님 외유기화의 감응을 조금씩 알고 느끼고, 거기에 하나 되는 생활을 하려 한다. 그러한 마음과 기운은 잘못된 인과를 고치고, 그로 인한 질병을 치유하며, 삶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이를 운명 개척이라 한다.


한울님이 주신 적자지심을 온전히 회복하면 우주의 혼원지일기와 하나 되니 이를 동귀일체라 한다. 살아생전에 마음공부의 수행과 덕을 실천하여 동귀일체가 되기도 하지만, 각각의 형체를 가지고 살던 모든 생명은 죽은 뒤에 형상이 없어지면 그 형상을 이루고 움직이던 영이 한울 성령으로 돌아가 하나 된다. 이것이 환원이고, 또 다른 동귀일체다.


다만 생전에 개체의 각자위심을 깨우치지 못한 개체 의식은 죽은 뒤에도 혼원지일기와 하나 됨을 모르고 생전의 인연을 따라 산 사람(후손과 지인)의 생각에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것을 음사라고 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대방가만이 할 수 있다고 하셨거니와,* 이 모든 이치를 아는 천도교인 이라면 개체영도 깨우쳐 동귀일체 하도록 할 수 있다. 이를 세령(洗靈)한다고 한다.** 각자위심으로 가득한 세상은 다툼과 모순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를 개벽하는 것이 천도교의 진리다. 바른 마음, 하나의 한울성령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포덕이다.

*  “세상 사람은 천령의 영함을 알지 못하고 또한 심령의 영함도 알지 못하고, 다만 잡신의 영함만을 아니 어찌 병이 아니겠는가. 성황이니 제석이니 성주니 토왕이니 산신이니 수신이니 석신이니 목신이니. 이러한 고질은 대방가의 수단이 아니면 실로 고치기 어려우니라.”(심령지령)

** “신이 곧 한울이요, 영이 곧 사람이니, 영은 신에서 유래하여 나온 것이니라. 그러므로 신은 영의 으뜸이니라. 신은 도로써 행하고 영은 성령으로써 나타나니, 신도 하나요 영도 하나요 그래서 사람과 한울이 하나이니라. 살아서 닦아 (그 사람의) 성령이 도에 합한 사람을 (아직 성령이 개인적 활동하므로) 작은 환원이라 이르고, 죽어서 화하여 영이 신에 돌아간 것을 (성령이 한울과 합하여 활동하므로) 큰 환원이라 이른다. 착하지 않은 사람이 (사는 동안) 잘못을 고치지 못하면 (한울에) 돌아가지 못한 성령이라고 하고, 잘못을 고치면 성령을 씻고 돌아갔다 이른다.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죽으면 (한울에) 돌아가지 못한 영이라 하는데, (생전에 스스로 고치지 못한 영이) 한울에 돌아가면 (누군가의 도움으로) 영을 씻어 돌아갔다고 말한다. 영을 씻는다는 것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죽어서나 살아서나 크게 부끄러운 것이니라.”(천도교전, 환원)


수련하다 보면 수많은 잡념이 섞여 있는 현재의식에서 맑은 적자지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의식이 한울 성령과 연결되어 확장된다. 한울의 혼원지일기에는 중심의 고요한 자리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만들어낸 좋거나 나쁜 기운들이 마구 섞여 있다. 나쁜 기운이 많으면 우주가 나쁜 쪽으로 가고, 좋은 기운이 많으면 우주의 혼원지일기가 좋은 쪽으로 간다. 이것이 수도자의 역할이다. 수련하며 우주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나쁜 생각, 나쁜 기운을 꾸준히 지워나간다. 그러면 우주의 공기가 맑아진다. 내가 나쁜 생각을 지우면 나와 관계없는 멀리 아프리카의 소년의 삶도 달라진다. 온 우주가 하나로 이어진 하나의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부터 깨달은 사람이 나오면 인류전체의 의식의 파동, 의식의 진동수가 한 차원 진화하며 변화한다고 하였다. 한 사람의 의식이 한울성령과 하나 되면(시천주) 한사람이 개벽되는 것을 넘어 온 우주의 기운이 그 사람만큼 맑아지고 나아가 그 사람의 영향(포덕)만큼 더 맑아진다.  

* “천지 만물의 개벽은 공기로써 하고 인생 만사의 개벽은 정신으로써 하나니, 너의 정신이 곧 천지의 공기이니라.”(인여물개벽설)


이렇게 내가 형상을 가진 개체에 한정된 것이 아닌 한울로서의 본 모습을 찾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삶과 죽음의 윤회를 해탈한다. 생사일여,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져 하나가 된다. 희로애락을 겪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고 자유로워진다.* 모든 삶의 고통이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극복하지 못해서 생긴다. 육신이 있는 동안 이를 겪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 삶이 무한히 확장된다.

* “좋으면 좋고, 착하면 착하고, 노하면 노하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모든 일과 모든 쓰임을 (사사로운)마음 없이 행하고 거리낌 없이 행하니 이것을 한울님의 공변된 도와 공변된 행이라 하느니라.”(삼심관)


이를 위해선 나의 육관으로 이루어지는 탐진치(貪瞋痴)의 습관된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止). 이를 멈추고 한울 성령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관법이고 마음공부다. 우리 몸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한울 성령은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우주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오직 하나의 성령일 뿐이기 때문이다.**

* “심령이 생각하는 것이요, 육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라.”(수심정기)

** “모든 운용의 맨 처음 시작은 나이니 나의 시작점이 곧 성품한울이 시작된 (우주만물의)근원이다. 성품한울의 근본은 천지가 갈리기 전에 시작되었으니 그러므로 이 모든 억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 모든 억억만년이 또한 나에게 이르러 마무리 되는 것이니라.”(성심변)


수도자는 삶의 근본적인 의문을 물어야 한다. 이것이 수행을 이어가는 힘이 된다. 그러나 한울님은 흰 것을 구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여 주신다.* 그렇게 수도자의 의식 수준에 맞는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치 공부를 병행해 가며 수행해야 한다. 어느 정도 이치가 통했으면, 뭔가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의식의 생각을 비우고 한울님 그 본래의 마음에 닿기 위한 기도를 하도록 한다. 이것이 견성공부다.

* “마음이 흰 것을 구하고자 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붉은 것을 구하면 붉은 것으로 보이고, 푸른 것을 구하면 푸른 것으로 보이고, 노란 것을 구하면 노란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이느니라”(신통고)


모든 것이 내 마음과 내 성품에 있음을 알게 되면 어디서 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아야 한다.* 수련의 과정에서 오는 깨달음의 체험은 의식을 한 차원 확장시키며 변화시킨다. 산 밑에서 보는 풍경과, 산속에서 보는 풍경과, 산꼭대기에서 보는 광경은 다를 수밖에 없다.

* “천도를 구하고자 하면 구하는 마음을 스스로 가져야 하니, 구하면 구할 것이나 구하기를 다하면 받을 것이 없느니라.” 묻기를 “구하기를 다하여 받을 것이 없다 하면 어디서 구합니까?” 대답하시기를 “네가 구함을 묻는 것은 이는 네 마음이요, 내가 네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이는 내 마음이다. 내가 없고 네가 없으면 나와 너 사이에 어떻게 이 말이 있으리오. 무릇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로 많은 중생의 움직임과 일체 선악이 다 사람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마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 내 성품과 내 마음이라. 이 본래의 마음을 제거하면 마침내 별다른 한울이 없는 것이요, 이곳을 떠나면 다시 구할 곳이 없으니, 내 성품을 내 마음에서 스스로 구하라.”(후경2)


또한 한울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선천 시대 이후 인간의 의식에 잠재된 오랜 관습이었다. 모르는 것은 두렵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을 저하시킨다. 정상적인 생각 작동을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대신사께서도 처음 한울님을 만나셨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으신 것이다.* 한울님은 부모처럼 공경하되 친하게, 언제 어디서나 모시고, 묻고 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포덕문)

** “주(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논학문)


실로 사람은 본래 한울로 태어난 것이다. 이를 잊고 고해 속에 살아가는 게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본래 한울사람으로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게 수도하는 사람들의 목적이다.* 또한 세상도 본래 무형의 한울 성령이 유형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한울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한울세상이고 지상천국이다. 본성을 잊고 각자위심으로 아귀다툼하는 세상이 지옥이다. 각자위심의 세상을 지상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개벽이고, 그게 도와 도를 하는 사람들의 역할이다. 한울은 무형이라 사람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때 그 이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너는 반드시 한울이 한울된 것이니 어찌 영성이 없겠느냐. 영은 반드시 영이 영된 것이니, 한울은 어디 있으며 영은 어디 있는가. 구하면 이것이요, 생각하면 이것이니, 항상 있어 둘이 아니니라.”(법문)

** “우주는 원래 영(한울성령)의 표현인 것이니라.”(성령출세설)

*** 마음은 본래 비어서 물건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탄도유심급); “사람은 (생명을 주는)한울을 떠날 수 없고 (무형한)한울은 사람을 떠나 실현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호흡, 모든 움직이고 머무는 것, 모든 입고 먹는 것이 다 서로 화하는 기틀입니다.”(천지부모)


[개벽라키비움은 개벽의 라이버러리, 아카이브, 뮤지엄 복합공간을 지향합니다.]

[천도교수도공부모임은 격주로 진행됩니다. 현재는 비공개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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