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Apr 25.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10)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제4절 지기일원론 

3. 지기의 본체와 무사불섭 무사불명


지기의 본체가 간섭하지 아니하는 일이 없고[無事不涉] 명령하지 아니하는 일이 없는[無事不命] 이법(理法)으로 현상계에 나타났다는 증거를 우리는 만유의 생명활동에서 알 수 있다. 


만유는 모두가 한가지로 대우주 대생명의 표현으로, 생물계의 현상과 의식 현상은 같은 생명에 근본을 두는 것이다. 끊임없이 창조하며 흘러가는[流續] 지기의 생명력이 일체의 의식 현상과 생명 현상의 근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생명의 원류에는 다만 유일무이한 본원적 충동력, 즉 생명의 충동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소위 지상에 생존하는 여러 가지 생물은 이 일원적 충동력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장구한 세월 사이에 금일과 같은 여러 가지 형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만유는 생명 충동의 무한한 발전이므로 가장 발달된 인간의 의식 현상이나 가장 저급한 원시적 식물 현상 사이에도 스스로 서로 통하는 생명력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이것이 지기의 본능적 생명력이다. 


지기가 현상에서는 확실히 물적 현상과 심적 현상의 두 가지로 나타나지만 지기 자체의 본원에 있어서는 유일한 생명의 충동력뿐이다. 이것을 인간계로부터 비추어 생각[遡究; 소구]하면 지기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생명체로서 그 생명체의 중심이 양극으로 흘러 생리적 현상이 되고, 음극으로 흘러 정신적 현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기의 생명력이 가장 찬란하게 나타난 것이 인간의 정신 현상이며 따라서 인간은 특유한 정신 현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보다 조직이 불완전한 동물 이하에 있어서는 생리적 충동이 강하고 의식 현상이 미약하여지다가, 하등동물과 식물에 있어서는 의식 현상이 아주 끊어져 버리고, 순전한 생리적 충동만이 남아 있으며, 나아가 동물계보다 훨씬 저급한 물질계에 있어서는 물질의 본위인 원자, 전자의 거력(拒力; 미는 힘)-흡력(吸力; 당기는 힘)으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현상계를 떠난 만유의 본원인 지기의 본체에 있어서는 어느덧 물(物)도 아니요 영(靈)도 아닌 불가사의한 생명의 본체만이 남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의 본체에는 지기의 생명이 만유 생성의 근원이 되어 있는 것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유일한 지기의 생명력이 정신 현상과 물질 현상의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된 원리를 다시 말하면 지기의 생명력은 무시 이전(無始以前)부터 그 자존 본능의 힘에 의하여 유구한 향상 발전을 도모하였는데 일면으로 긴장향상적(緊張向上的) 충동이 일어날 때, 이것이 정신적 의식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에 반하여 생명의 충동력이 이완하여 진화의 반대쪽으로 하강할 때에는 이것이 무의식한 사물인 물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곧 생명 충동의 하강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은 두 종류가 아니요 유일의 생명력의 상승과 하강을 의미하며 이것을 만일 정신의 편으로 본다면 물질은 정신이 그 생명을 잃은 자에 불과하고 물질의 편으로 본다면 정신은 물질이 생명의 힘을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만유일체(萬有一切)의 근저가 되는 것은 오직 유일한 지기의 생명 충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하다. 만물은 실로 지기생명의 연속적 진화의 결과이다. 무한한 ‘한울’의 힘의 일대자율적(一大自律的) 창조이다. 물론 이 생명의 본원적 충동력이 여러 갈래로 분화 발달하는 과정에서 진화의 도정(途程)에서 떨어져 멈춘 것[者]도 있을 것이며 멈춰서 죽어버린[死物化]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 현상이요 ‘한울’ 전체로서의 생명을 보면 일초 일분도 휴식치 아니하고 전적 보편적으로 차례차례 진화 발달하여 나아가는 무한의 도중(途中)에 있다.

 

그러면 여기에 한 가지 남아 있는 문제는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 지기생명의 본체를 인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대개 세상 사람은 우주의 본체를 인식코저 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이지(理知)의 힘을 허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낭비이며 허사이다.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이지는 분석을 주로 하는 것으로 물질 현상을 측정 계산하며 이용하기 위하여 발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적 논리적 분절적(分折的)인 이지의 지식은 본래 물질을 취급하기 위하여 생긴 것이므로, 생명과 의식의 전체적 현상, 유동전일(流動全一)의 현상을 상상하지[可想] 못하는 것이다. 



이지로 ‘한울’을 알고자 하는 것은 마치 그물로 물을 뜨는 것과 같다. 그물로 물을 담아 물 밖에 나오면 어느덧 그물은 물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이지가 현상을 더듬는 때에 본체는 어느덧 그 모습을 숨겨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를 형용하여 ‘형상이 있는 듯하나 형상(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如形而難狀], 들리는 것 같으나 보기는 어렵다[如聞而難見]’이라 하였다. 


즉 본체는 우리의 이지의 힘으로는 형용할 수도 없으며 상상할 수도 없으며 듣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한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지는 어떠한[如何] 방법으로든지 본체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이지는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경험을 초월한 본체 그 자체[其者]를 경험에서 얻은 이지로 알고자 하는 것은 마치 여름철 벌레[夏蟲]가 겨울철 얼음[冬氷]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永達]히 본체의 풍류(風流)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인가? 거기에는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우리에게는 위에 말한 논리적 과학적 지식 작용 외에 또 다른[別種]의 지식 작용이라 할 만한 지[知]가 있으니 이름하여 ‘직각(直覺)’이라는 것이다. 


수운은 이것은 ‘만사지(萬事知)의 지(知)’라 불렀다. 이 ‘만사지의 지,’ 즉 ‘직각’은 생명을 외부[外側]로부터 더듬지 아니하고 직접 내면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감응하고 융화하고 직각하는 것이다. 만사지의 지, 즉 직각이야말로 우리의 의식작용의 근저이며 본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견 불명료하고 혼돈막연(混沌漠然)한 듯한 직각적 지식작용이야말로 전체 정신생활의 본원인 것이며 그 외 보통의 지식, 즉 과학적 논리적 지식과 같은 것은 이 근본적 직각 작용에서 파생하여 특별히 발달된 부분에 대한 특수 지식(特殊知識)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직각의 활동은 실로 생명 그 자체로부터 직접 흘러나온[流出] 것으로 생명의 본체에 관하여 직접으로 그를 감응하고 음미 초대(招待)하는 직능(職能)을 맡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기의 본체를 인식하는 데는 이지가 아니요 직각이 그 직분을 수행하는 것인데 수운은 이를 일러 “그 도를 알아 그 앎을 받는 것(知其道而受其知)”이라 하였다. 직각의 도(道)를 알고 직각의 지(知)를  받으라는 말이다.(다음 '제5절 한울과 무위이화'에 계속)  


*[편역자 주 1] 인식론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305&cid=40942&categoryId=31500


**[편역자 미주2]지금 우리가 현대어로 보고 있는 신인철학의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1980년대에 3쇄 발행한 것이지만, 세로쓰기라든지, 국한문혼용(체)는 초판 발행 당시와 똑 같습니다.


***[편역자 미주 3] 결국 '신인철학'이란 (1)한울은 어떻게 인간으로 진화했으며, 인간은 어떻게 해서 한울 사람인가 (3)한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한다.(2016.04.22)

****[편역자 미주 4] 현재의 현대어역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더 다듬고, 더 번역해 내서 현재의 독자들과 충분히(?) 교감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1924년에 초판이 간행된 텍스트를 90여 년 만에 다시 읽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에 이 텍스트가 의미가 있다면, 그리고 부제에서 표방한 '오래된 미래'라는 접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우리 사회가 지난 90년 동안 그만큼 정체되거나 퇴보했다는 것인가? (2)이 '신인철학'이라는 책이 그만큼 위대한(?) 책이라는 뜻인가? ... 저는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인철학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야뢰의 사상이 아니라, 야뢰가 설명하고자 했던 동학의 철학, 사상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은 '지식'으로서의 동학/동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의 길을 밝혀주는 등대 또는 나와 더불어 가는 동반자(친구)로서의 동학 혹은 내 삶의 궁극적인 의미,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과 그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2016.04.24)  

*****[편역자 미주 5] "불안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부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을 공부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몰입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사람은 몰입할 때 재미를 느낀다. 관심의 대상이 있어야 재미가 있다. 공부의 주제,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친구들 중에 ‘너는 네 맘대로 인생을 사는 게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너는 뭘 좋아하는데?’라고 물어보면 답을 못한다.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도 아니다. 공부만큼 돈이 적게 드는 것도 없다. 지금 내가 행복한 것도 공부하는 것이 있어서다. 그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펴낼 생각을 하니까 설렌다."(김정운,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250)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읽는 신인철학(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