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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26.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11)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제5절 한울과 무위이화(無爲而化)


1. 목적론의 음미 


먼저 목적론을 염두에 두고, 모든 현상을 돌아보자. 사시(四時)가 순환하되 순서가 있으며, 모든 자연이 자연율(自然律)에 어김없이 진행하는 것을 보든지 어느 점으로 보더라도 하나도 합법적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의 현상을 볼지라도 그가 여하히 천차만별로 복잡하더라도 모든 문화적 역사가 질서정연하고 순서 있게 한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 옮겨간 것을 볼 수 있으며, 모든 정치적 현상, 경제적 현상이 서로 서로 상호작용[交互作用]을 한 실례를 볼 수 있다. 


이것은[변화-편역자 주] 한 개인 혹은 단체의 주관적 의식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요, 개성으로 이를 공평히 본다면 자연계는 자연계 전체의 합법성이 있음은 물론이요, 인간사회도 또한 인간사회 전체의 객관적 독립성을 가지고 성장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개성을 떠난 객관적 합법성의 운동 가운데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목적론은 처음으로 존재할 만한 소지를 갖춘다. 


목적론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종교적 입장의 목적론이요 다른 하나는 철학적 입장의 목적론이다. 이 두 가지 목적론과 아울러 비무위이화(非無爲而化)의 법칙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2. 종교적 목적론  


일신교적(一神敎的) 구식(舊式)의 종교가는 “인간사회의 현상을 보라. 한 가정에는 가장이 있고, 국가에는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 혹은 대통령이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들은 일정한 목적을 세워 가지고 인민을 다스리며 사회를 유지하지 않느냐? 이와 같이 전 우주에도 전 우주를 질서 있게 다스리는 신 혹 부처[佛]가 있을 것이 아니냐? 만일 그를 '전체적으로 섭리[總攝]'하는 '최고의 주인[宗主]'이 없다면 자연계가 무엇 때문에 저와 같이 질서 있는 발전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이 전 우주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속에 그를 총섭하는 신이 있어 일정한 목적 아래에서 일정한 법칙을 베푸는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것이 종교적 목적론이다. 


이러한 종교적 목적론은 옛날 부족적 존장시대(尊長時代)로부터 봉건시대 말기[終末]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람[俗人]의 귀에 들어가기 쉬울 만한 설교의 하나였다. 왜 그러냐 하면 당시 사회는 봉건시대였으므로 종교적 목적론은 국가의 군주도덕, 가족의 가장(家長)도덕의 발달로 생긴 관념에 부합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목적론은 철학의 발달과 과학의 발명 또는 사회제도의 개조에 따라 당연히 소멸될 운명을 가진 것은 물론이다.


3. 내재적 목적론


내재적 목적론은 종교적 목적론을 부인하고 천지만물이 일체 내재적 의식으로 어떤 목적의식 하에 진행한다는 것이다. 즉 “한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든지, 한 동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든지, 모든 자연이 질서 정연히 진화한 것을 보든지 나아가 사회현상을 볼지라도 다 같이 순서 있는 합법적 발전인 것을 보면 전 우주에는 만유(萬有)를 목적으로 지배하는 범신(汎神)이 있어 만유의 내부에서 목적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는 것이 명백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우주에는 신과 부처[佛] 같은 독재적 군주격인 총섭자(總攝者)가 있어 목적을 미리 세워 가지고 천지 만유를 진행시키는 그러한 목적은 없다 할지라도 천지만물의 내용에는 스스로 어떤 자율적 의미의 목적이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내재적 목적론이다.


(다음 '4. 기계적 목적론'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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