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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27.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12)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제5절 한울과 무위이화 : 1. 목적의 음미 / 2. 종교적 목적론 / 3. 내재적 목적론(이상 11회)


4. 기계적 목적 부인론


목적론을 부인하는 이론 중에 유물적 기계주의를 들어 말할 수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사회현상이나 자연계의 현상은 다만 유리한 조건에서 유리한 결과만을 본다면 물론 모든 현상이 목적이 있는 것과 같이 보이고, 또 극도로 미묘한 듯이 보일 수 있으며, 또 세계 만물이 연쇄적으로 아무 흠결[缺欠]이 없이, 아무 병통이 없이 진전하여 왔다면 거기에는 확실히 일종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나, 이것은 현상의 일면만을 보고 하는 말이니 천지만물은 그렇게 결손 없이 커진 물건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고 자연계 및 사회현상은 결코 영속무결(永續無缺)의 조건이 아니요 모순적 결함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자연계의 현상 중에는 고대에 있든 동물이 지금에 와서 씨도 없는 것도 많다. ‘맘모스’라는 고대 코끼리(巨象)라든가 공룡이라는 고대동물 중에는 종속(種屬)이 끊어진 동물이 많이 있다. 

인간사회도 그러하여 아메리카의 잉카 족, 아즈텍 족 같은 것은 역사상 멸망한 종족이라고 한다. 문화로 보아도 그렇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로마[羅馬] 문화는 지금 멸망하고 말지 않았는가? 그렇게 많은 문화 가운데서 소수의 것이 살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진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것은 차라리 발달의 유리 및 불리를 표현한데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 즉 선한 조건하에서는 이에 대응한 선한 결과가 생기고 악한 조건하에는 또한 악한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요, 내재적으로 어떠한 목적이 있다는 것은 증거가 없지 않으냐? 그들은 나아가 인류 개인의 행위도 이것을 자연계와 구별하여서 자연계와 동일한 결론을 내려서 목적론을 부인하였다. 


마르크스[Marx, Karl, 1818-1883]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칼 마르크스(1818-1883)


“거미는 직공과 같은 작업을 잘하며, 벌[蜜蜂]은 건축사와 같은 작업을 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자연과 인간계와 다른 점은 인간은 작업을 하기 이전에 먼저 그것을 뇌 속에 추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행정(勞動行程)의 전 종결(終結)은 그 당초부터 노동자가 이미 그 행정을 관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노동하는 자는 자연물의 형체를 변하게 함에만 있지 아니하고 그들은 동시에 자연물 중에서 자기가 의식하였던 목적을 실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목적은 법칙으로 그들의 행위의 방법을 인정하고 또한 그들은 자기의 의지를 그 법칙이 결정한 행위에 좇지 아니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종속의지(從屬意志)는 고립된 행동이 아니요, 일하는 기관의 긴장 이외에 따로이 주의가 되어 나타나며 노동의 전계속중(全繼續中)에서 요구하는 바의 목적에 따르는 의지가 되었다.” 


마르스는 이렇게 자연과 인간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지에 확실히 단계적 목적이 있는 것을 밝혔[明言]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신봉하는 후계자 중에는 대신에 원인법칙(原因法則)이라는 것을 세워 가지고 말하였다. 원인법칙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때에든지 모든 현상 간에 일어나는 필연적 연계를 일러 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물체의 온도가 높아지면 부피[容積]가 팽창하는 것, 액체가 충분히 더워지면 열을 발하는 것, 지폐를 난발(亂發)하면 가치가 내려가는(低落) 것 등, 무수 잡다의 인과적 법칙을 말한다. 


인과적 법칙이라 함은 말할 것도 없이 이러 이러한 현상에는 반드시 이에 대응하는 다른 현상이 일어난다는 문제에 의하여 생기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설명은 자연현상에 관해서든지 인간사회에 관해서든지 동일한 논법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물론은 목적론이 아니요, 인과적 법칙론으로 만유의 존재 가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편역자 주1]앞 회차에서도 밝혔지만, 지금 이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시대에 100년 전의 '낡을' '철학적' 서적을 읽어 가는 이유는, 과거 회귀 취향이 아니다. 어쩌면, 이 철학은 동학이 근대라는 산을 만나면서 자신의 꿈(후천개벽 세상)을 다시 어떻게 '설명 내지 스토리텔링'할 것인가를 고민한, 최초의 '수작'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야뢰 이돈화와 그 시대 동학/천도교인들이 기획하였던 새 세상으로의 길을 찾아, 오늘에 다시금 길라잡이로 삼을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다음 ‘5.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우주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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