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칼럼-003
1.
동일성(유일성)을 환대하는 것은 차이를 서열화하고, 열등자를 배제하는 분위기를 낳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문화를 조장하며, 마침내 혐오를 강변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동일성은 흐름을 멈추게 하고, 물이 고이게 하며, 마침내 호와 흡을 정지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차이성을 환대하는 것은 동일성 이면의 다양성을 발견하고, 차이 사이에 흐름이 살아 있게 하고, 타자와다른 나의 희소성 그리고 그로부터 유리하는 존재가치를 드높인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찌즘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이상형은 모심공동체이다.
원자 단위에서조차, 똑 같은 원자가 아니다.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의 위치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다. 빅뱅은 그 차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차이에서 우주가 생성한 것이며, 차이가 있어서 우주가 함몰-소멸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며, 차이야말로, 즉 그 차이와 차이 사이를 오고감-흔들림-흔들리는 만큼 기우뚱함이야말로 우리 조재의 항상성이다.
이 차이에서 저 차이로 넘어가는 어느 찰라에만 우리는 균형을 경험한다. 그것조차 경험되는 실체가 아니라, 관념에 불과하다.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본향이다.
2.
이른바 "대량생산 - 대량소비" 체제를 근간으로 성립되는 근대(산업)자본주의는 이러한 '차이'를 끊임없이 무화함으로써 성립하였고, 자기 생존과 번영(=성장)을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 차이를 '이질적인 것'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도록 세뇌하였다. 포드주의(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상품 생산과정을 표준화하고 규격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동일한 과정의 연속으로 치환함으로써 생산력의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케 한 것이다.
'차이가 무화된 물질'이 곧 '상품'이다. 자본주의는 자연 내 '차이들'을 수집하여 이를 '무화'함으로써 원료로 만들었고, 노동자들의 차이를 무화함으로써 그들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둘을 '기계'와 결합함으로써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자본주의의 1단계가 완료된다.
1단계만으로 자본주의가 완결-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된 상품은 소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은 사람들을 끈임없이 동일한 존재로 몰아세우면서, 오직 한 방향으로만 빛이 통하도록 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상품을 소비할 때만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대량 생산된 상품을 처리하는 '무한동력'시스템을 창안하자 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것이므로, 그것은 아주 절묘한 선택이었고, "성공"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생각 없는 존재'로 살아가다가 오직 상품을 소비할 때만 '존재자'로 깨어나곤 하였다. 그 '깨어남'의 희열은 대단히 중독성이 강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금세 '소비에 중독'되었고, 마치 "살아 있는 인간의 피와 살(?)"을 탐닉하는 좀비처럼 '상품'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상품의 소비'로부터 소외된, 다시 말해 상품 구매력을 갖지 못한, 쉽게 말해 '돈이 없는 사람'은 '생각 없음'을 너머 "좌절감"과 "패배감" 그리고 "고립감"과 "죄책감"을 느끼도록 세뇌되었다.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든 혹은 "사회 탓"이나 혹은 "자본주의 탓"으로 돌릴 때조차, 그는 "나도 남들처럼 상품을 소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제1의 해법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른바 인류세, 다시 말해 "무한생산 - 무한소비"의 매커니즘이 전 지구적인 규모로 "탈"을 일으키는 시대는 "상품"을 매개로 한 이러한 "무한증식의 암적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과열된 엔진이 폭발하듯, 자본주의적인 논리로 움직이던 하나의 체제로서의 지구는 지금 균열을 일으키고 폭발의 임계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현재 모습 - 끊임없이 방사능 물질을 생산해 내고 있으며, 곧 그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 은 일본 동북부에 있는 한 원전이 아니라, 바로 지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동일성 신화'로부터 유래한 비극이다.
*이 글은 네이버카페 <모시는사람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