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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19. 2022

감응이론과 정동이론

우보칼럼-004




오늘(7.18, 월) 생명학공부모임이 진행되었다(지구인문학연구소). '생명사상연구소' 주요섭 소장님이 '정동이론'을 소개하였다. '정동이론' 자체는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주제이므로, 그 강의 내용을 소개하는 일조차 필자에게는 아직 이르다. 다만 편린으로나마, '정동(情動)'이론이 동학-천도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동이론'은 다르게는 '감응(感應)이론'이라고도 번역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이 오늘 이 시점에서 동학-천도교가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 중 하나가 '심학과 신학'에 관한 내용이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생각을 아래에 (사후적으로) 좀 자세히 정리해 본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은 1860년 4월 5일의 종교체험(신비체험) 이후로 1년 2개월 동안, 즉 1861년 6월경까지, 자신의 종교체험을 객관화함으로써 설명 가능한 체계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수운 자신은 이를 "닦고 단련하기"[修煉]라고 표현하였다. 그 과정을 거치고서야 수운은 공개적으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했다. 수운의 종교적 저술 활동은 이 수련 기간에 시작되어, 그가 관에 체포되기 1개월 전인 1863년 11월까지 계속되는데, 그렇게 마지막으로 저술된 것이 바로 <팔절(八節)>이라는 글이다.


이보다 몇 개월 앞서서 <불연기연(不然其然)>이라는 비교적 짧은 글과 <흥비가(興比歌)>라고 하는 가사체의 글을 각각 지었는데, 필자는 이 세 글을 "최후의 경전"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즉 이 글들은 수운의 말년 저술로서, 수운(동학) 사상의 핵심 요지이자 최후의 경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최후의 경지'란, 비유하자면 산의 정상과도 같은 것이라, 그곳을 오르는 길은 360도에 걸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 그 가운데도 첩경이거나 비교적 평탄한 길은 있게 마련이다. 이 '최후의 경전'들은 그런 쪽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팔절>은 '전팔절'과 '후팔절'의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명덕명도성경외심(明德命道誠敬畏心)이라는 8개의 키워드에 대하여 그 '소재(所在)'와 '소치(所致)'와 '소위(所爲)'와 '득실(得失)'을 묻고, 그것을 연찬하고 수련하는 화두(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즉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음의 해답을 찾는 길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그 앞 두 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不知明之所在어든 遠不求而修我하라

不知德之所在어든 料吾身之化生하라


"밝음이 있는 곳(所在)을 알지 못하거든 멀리서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고 했고, "덕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내 몸이 화생한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이 말을 "밝음이 있는 곳은 '나[我]'"이고 "덕이 있는 곳은 '내 몸이 화생한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나'나 '내 몸이 화생한 곳'은 각각 밝음과 덕의 소재지로 가는 입구, 그것을 알 수 있는 실마리이지 그것이 질문(소재)에 대한 '정답(유일하며, 부합하는)'은 아니다.


여기서 '밝음'이란 '궁극의 진리나 한울님의 지혜'와 같은 이지적이며 각성과 관련된 것, '기쁨의 충만이나 괴로움의 소멸'과 같은 심리적인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명과 영성의 존재원리'와 같은 것[理]이라고 본다. 또 "덕"이란 것은 진리나 지혜가 베풀어지는 것 혹은 기쁨의 충만, 괴로움의 소멸을 가능케 하는 진리-지혜의 역능(力能)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명력의 물적, 동적인 토대[氣]'라고 본다.


이를 동학의 종교철학관점에서 한마디로 "한울님의 존재[明]와 하눌님의 활동[德]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이 글에서 새삼스럽게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한데) 이 '밝음'과 '덕' 즉 한울님의 존재와 그 존재의 활동(현상)이 '나의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밝음과 덕이 어디에(누구로서, 무엇으로, 왜, 언제, 어떻게) 있는지 알고자 하면 '나의 몸'을, 닦고 헤아려 보라[修我料吾]고 하는 것이다. 물의 온도를 재기 위해 온도계를 물속에 집어 넣듯이,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숨쉼의 상태를 알아보듯이.


'몸'의 '감각'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바로 '정동이론'이다. 동학의 관점에서는 '감응이론'이 더 익숙하겠다. 감응에 관하여 가장 적실한 말씀은 해월신사(최시형) 법설 가운데 다음의 대목이다.


해월 선생이 묻기를 “그대들은 식고할 때에 한울님이 감응하시는 정(情)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제자인 김연국이 대답하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해월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한울님께서 감응하시지 않는 정은 혹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람은 다 각자가 모신 한울님의 영기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먹고 싶어 하는 생각이 곧 한울님이 감응하시는 마음이고, 먹고 싶은 기운이 한울님이 감응하시는 기운이며, 사람이 맛나게 먹는 것이 바로 한울님이 감응하시는 정입니다. 사람이 먹고 싶은 생각이 없으면 이것이 즉 한울님이 감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신 한울님의 영기가 있으면 산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죽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 입에 한 숟갈 밥을 드리고 기다려도 한 알 밥도 먹지 못합니다. 이는 한울님이 이미 사람의 몸 안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히 먹을 생각과 먹을 기운을 내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한울님이 감응하실 수 없는 이치입니다.”


여기서 감응 여부는 '마음(생각)'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마음이란 결국은 '몸'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목격'하는 것이다. 이 목격은 '알아차림'이다. "내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싶은 마음과 기운"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감응은 '알아차림'이 아니라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몸이 먼저고 '생각(마음)'은 그다음이다.


이것이다. 


수운은 동학을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우리 도는) 심학(心學)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심"은 "나의 몸"과 더불어, 고착되어 있다. 나의 몸을 떠나서 마음이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은 몸으로부터 화생한다. "심학"은 "신학(身學)"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을 두고 지난 2천5백년(붓다) 혹은 2천년(공자) 동안 왈가왈부 말이 많았으나, '닦는다'라는 말과 호응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는 점에서 보면, '심학이 곧 신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마음을 내려놓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도 하지만 이 역시 "몸에 구애된 생각을 중지(한 것과 같은 상태에 이름)함"이나 "몸이 있음을 잊음, 다시 말해 감각을 중지(한 것과 같은 상태에 이름)"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둘 사이의 오해하고 간과함으로써 몸과 다른 마음을 닦고, 몸과 다른 마음을 비우거나 내려놓기 위해 '남의 다리 긁는 식'으로 수련을 해 온 것이다.


남의 다리를 긁지 않고, 가려운 곳을 직격하는 것 그것이 정동이론의 목표이다. 동학식으로 말하자면, 한울님의 감응을 직감하는 것, 강령과 강화, 해탈과 견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바로 정동이론이며 감응이론이다.


오늘 이후의 동학 - 천도교의 화두는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 이 글은 네이버 - 모시는사람들(카페)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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