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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6. 2023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책 이야기  - 어떤 죽음 2


“나는 나의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문학 속에서 죽음은 경험되고 연습된다.”


현대 사회는 ‘죽음의 의료화’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치료의 실패’로 간주하고 귀결 짓는다.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전횡하는 데로 타락하듯이, 의료인 또는 병원이 ‘죽음’을 독점함으로써 날이 갈수록 인간의 삶의 완전성, 전체성은 훼손되고 있다. 이것은 그렇잖아도 경험하기 어려운 ‘죽음’을 온전히 비정상적이며 병적인 사건으로 간주하도록 길들이고 제도화하는 것이다. 


현대 의료 체계, 장례 시스템에서는 죽음을 인간 삶의 일부분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 철학자들이 되풀이해서 말했듯이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분리시키면 삶마저 훼손되고 만다. 인간의 삶은 ‘살아 있음’과 ‘죽음’이라는 동전의 앞뒷면으로 구성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사’라고 하는 급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예외적인 죽음의 경우를 제외하고, 죽음은 오랫동안 살아온 집에서 가족에 둘러싸인 채 맞이하는 자기 삶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세대의 시작이라는 의미는 아주 오래전에 퇴색하고, 중환자실 또는 요양원에 유폐된 채 ‘죽어가다’가 가족들에게는 “사망통지”의 형태로, 사후적으로 전달되는 형식으로 변질되고 있다. 하루 또는 길어야 일주일 내에 사망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경우조차도 가족은 하루 30분씩 2회만 ‘죽음과정’에 있는 가족을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는 가운데 쓸쓸히, 외롭게, 그리고 ‘공포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 현대인이 되고 말았다. 오직 ‘장례식장’에서, 그것도 아주 잠깐의 ‘조문시간’ 속에 ‘죽음’을 가두어 버린 채, 죽음을 회피하고 짐짓 망각하며, 살아가도록 길들여진다. 이는 도살장에서 짧은 생애를 마치는, 공장식 축산에 의해 길러진 ‘고기’들의 생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가 하면 이태원 참사는 159명이 죽은 1회적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159회나 잇달아 일어난 사건이다. 시인 정현종이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노래한 대로 하자면, 그 순간에 159개의 ‘과거-현재-미래’를 포함한 우주가 소멸하는 사건이라고 해야 옳다. 이렇게 죽음은 문학적 상상력과 도약적 표현을 통해서 비로소 실감되고 실증될 수 있다. 


인간이 죽음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을 결코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의 죽음을 목격한다고 해서 죽음이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의 죽음은 오직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다가올 뿐, 그 실체에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문학 작품 감상을 통한 죽음 이해야말로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가장 근사(近似)하게 경험할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나의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원한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죽는다”고 하는 ‘획일적인’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고 경험되는 우주적 사건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는 사실의 자각은 내 존재의 보편성, 나와 모든 것의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죽음은 ‘나’의 생애가 완성되는 최종적이며 경이롭고 거룩한 순간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통찰을 감성의 측면에서 내면화할 수 있는 ‘직접적’ 계기는 ‘문학적/서정적’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주어진다. 


죽음을 회피의 대상, 치료(생명/수명 연장)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생애(삶)을 성찰하는 계기이며, 한 사람의 인생을 완성함으로써 마감할 수 있는 계기라는 점을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죽음에 대한 문학적 접근, 문학 속의 죽음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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