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주당, 유희 외 지
이사주당은 1739년(영조 15)에 이창식의 2남 5녀 중 넷째 딸로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부모, 조상이 벼슬하지 못한 가문 출신으로, 늦은 나이인 25세 때(1763년, 癸未) 진주인(晉州人) 유한규(柳漢奎, 1718~1783)에게 시집을 갔다. 10년 뒤인 1773년(35세)에야 아들 희(僖, 초명은 儆)를 낳았는데, 이후로 세 딸을 더 두었다.
<胎敎新記(태교신기)>는 사주당 이씨가 유희를 낳기 전인 1772년경에 지었는데, 여기에 남편인 유한규가 ‘교자집요’라는 이름을 붙여 두었다.
그 후 20년 동안 이 책의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셋째 딸의 상자 속에서 이 책이 발견되어, 62세인 1800년에 <胎敎新記(태교신기)>라는 이름으로 책을 완성하였다. 그의 아들 유희가 여기에 주석과 음의, 언해를 더하여 자신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인 1801년 3월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胎敎新記諺解>). 그로부터 9년 뒤인 1810년(사주당 72세)에 큰딸과 작은딸의 발문과 함께 <부설(附說)> 등 후기와 언해를 덧붙여 하루 만에 묶어서 만든 것이 유희의 후손 가에서 오래도록 세전되어 왔다.
이사주당은 이후 80세가 넘으면서 고질병으로 3년 남짓 고생하다 1821년 9월 22일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태교신기의 ‘실질적인 주인공’(태교로 태어난)이라고 할 이사주당의 아들 유희는 20대 중반에 당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정동유(1744~1808)에게서 사사를 받았다. 그는 사주당의 ‘시험’에 통과하여 유희의 스승이 되었다. 사주당보다 다섯 살 아래인 정동유는 특히 양명학(陽明學)과 상수학(相數學)에 밝았고, 훈민정음학이라 할 수 있는 당대의 언어학에도 밝았다. 이사주당의 태교와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 유희는 훗날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어 언어학 연구서라 할 수 있는 『諺文誌(언문지)』(1824)를 저술하였다.
(1) 이사주당이 30대인 1770년대 초에 유희를 임신하였을 무렵 처음 정리한 ‘태교와 육아’에 대한 글에 남편 유한규가 ‘교자집요’라는 제목을 붙여 두었다.
(2) 그 후 잊어 버렸던 것을 20여 년 만에 우연히 셋째 딸의 서랍 속에서 다시 찾아서, 62세였던 1800년에 ‘胎敎(태교)’ 부분만을 다시 정리하여 ‘新記(신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3) 이 책을 유희가 자신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인 1801년 3월 27일에, <태교신기장구대전>에 음의와 주석을 더하고 이를 언해한 <태교신기장구언해>와 발문(跋文)을 덧붙여 수고본을 만들었다.
(4) 그 후 사주당이 72세가 되던 해인 1810년에, 사주당이 여기에 다시 스스로 언해한 언해문 및 부설과 후기(後記)를 쓰고 큰딸과 작은딸이 언문 발문을 덧붙여서 책을 한번 더 엮었다.
(5)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서에서 역주한 『태교신기/태교신기언해』는 사주당이 처음 유희를 임신했을 무렵인 30대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60대에 한 번, 70대에 한 번씩 최소 총 세 번을 수정 확대한 문헌이고, 남편 유한규가 첫 글의 제목을 정해 주었으며 여기에 아들 유희가 음의와 주석 및 언해를 더했고, 사주당이 각각 언해한 글과 유희의 한문 발문 및 딸들의 언문 발문을 더한 책으로, 아마 조선 시대를 통틀어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한 가족 문집의 성격을 띤 유일한 책이라 할 수 있다.
(6) 그에 더하여 사주당 동시대의 유학자인 신작의 서문 및 묘지명과 구한말의 국학자 정인보의 서략, 안동 권문의 권상규, 권두선 및 유희의 후손인 유근영, 이사주당의 먼 권속인 이충호 등의 발문이 포함된 것으로, 조선시대 여성이 쓴 것으로는 보기 드물게 연속성과 연계성을 가진 책이라 할 수 있다.
(7) 이 책의 존재는 이 책이 만들어지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이미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이를 구해서 보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결과로 1908년에 『기호흥학회월보』에 게재되었고, 1938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책이 출간되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고 소개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기존의 많은 번역서가 대부분 사주당이 처음 작성한 원문만을 번역하고 있다든지, 번역의 원칙 같은 것이 분명하지 않아서 번역자들마다 동일한 원문에 대한 번역이 들쭉날쭉 하다든지, 번역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든지 하는 점들이 그것이다.
그동안 많은 주해서와 해설서가 있었음에도, 처음 원본이 지어진 후 250년 만에 다시 이 책을 번역하고 주석한 책을 새로 더하는 까닭은 사주당의 글에 달아 둔 유희의 주석이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것이어서 이 자체가 또 다른 주석이 덧붙어야 하는 것이고, 이 책이 여러 차례 깁고 조정되면서 덧붙은 다양한 주석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언해된 두 가지 수고본(존경각본과 유기선 소장본)의 글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태교신기>를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이사주당의 이야기와 그 아들 유희의 주석 간의 연계성을 강조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본 역주서는 바로 이 지점에 초점을 두고 편역되었다. 특히 사주당의 글에 대한 유희의 주석을 완역하고 이에 대해 각 장절(章節)마다 <해설>을 덧붙이고 자세한 설명을 보충해 두었다.
● 아버지의 낳으심, 어머니의 기르심, 스승의 가르치심은 하나이다. 잘 치료하는 이는 병이 들기 전에 고치는 법이고, 잘 가르치는 이는 태어나기 전에 가르치는 법이니, 따라서 스승은 십년을 가르치지만 어머니의 열 달 기름만 같지 못하고, 어머니의 열 달 기름은 아버지의 하루 낳음만 같지 못하다. - 본문 53쪽
● 태를 기르는 일은 어머니 스스로 할 뿐만이 아니라 온 집안사람이 항상 거동을 조심하여야 할 것이니, 감히 분한 일을 듣지 않게 하니 그 성낼 것을 걱정하는 것이고, 감히 흉한 일을 듣지 않게 하니 그 두려워함을 걱정하는 것이고, 감히 난처한 일을 듣지 않게 하니 그 근심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고, 감히 급한 일을 듣지 않게 하니 그 놀랄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성내면 태아로 하여금 피가 병들게 하고 두려워하면 태아로 하여금 정신이 병들게 하고 근심하면 태아로 하여금 기(氣)에 병들게 하고 놀라면 자식으로 하여금 전간병이 들게 한다. - 본문 89~90쪽
● 임부의 말하는 도리는 분해도 모진 소리를 하지 말며, 성나도 나쁜 말을 하지 말며, 말할 때 손짓을 말며, 웃을 때 잇몸을 보이지 말며, 사람들과 더불어 희롱하는 말을 하지 말며, 부리는 종들을 몸소 꾸짖지 아니할 것이며, 닭이나 개 등을 몸소 꾸짖지 아니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지 말며, 사람을 훼손치 말며, 귓속말을 하지 말며, 근거가 없는 말은 전하지 말며,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임부의 말하는 도리이다. - 본문 107쪽
● 아이를 밴 어머니는 (아이와) 혈맥으로 이어져 있어서, (어머니의) 숨 쉬고 내뱉음에 따라 (아이도) 움직이므로 그(어머니의) 기뻐하고 성내는 바가 아이의 성품과 감정이 되고, 그(어머니의) 보고 듣는 바가 아이의 기질(氣質)과 물후(物候)가 되며, 그(어머니의) 먹고 마시는 바가 아이의 살과 피부가 되니, 어머니 된 자가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 본문 126~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