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용 지음 [말로 말을 버린다 - 因言遣言], 모시는사람들
팔순을 넘겨서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업과 더불어 학업을 지속하고 있는 노학자의 평생에 걸친 학자로서, 또 불교인으로서의 삶의 역정을 고스란히 녹여, 종교론, 불교론, 인생론으로 빚어낸 보석 같은 책이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강단에도 섰지만, 홀연히 미국으로 건너가 학문과 담을 쌓고 지내며 생업(보석상)에 전념한다. 다시 인연에 이끌려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이후 미주 한인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동국대학교 역경위원, 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 대표 등의 불교계 활동과 동국대 객원 교수를 위시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 동아시아 불교사상사를 전공하고, 서구 불교학과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내밀하게 탐색하였으며, 내부자의 시각과 외부자의 시각을 겸비하여 한국 근대불교와 불교학, 불교고전어와 인도사상사에도 해박하다. 이 책은 저자가 불교의 화법인 세상사나 불교(계)의 현장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되, 말하는 바의 한계와 위험성을 항상 경계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자 좌우명으로 삼아온 ‘인언견언(因言遣言)’의 견지에서 써 온 글들을 담아낸 것이다.
1.
이 책의 저자는 “내 인생을 금강경(金剛經)을 천착하는 것으로 보내려 했으나 결국 금강석을 다루는 일로 끝마치게 됐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회고한다. 불교학 연구의 길로 접어들었다가, 보석상의 길로 전업하였으나, 다시 학문과 직업을 병행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격의 없는 친구들에게 농 삼아 하던 말이다. 그러나 객관의 견지에서 보건대 저자는 세속과 탈속, 학문과 수양, 이념과 현실을 겸전하고, 이변비중(離邊非中), 중도의 삶을 살아왔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그 이유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심연의 깊이를 품고, 쉼 없이 파도치며 육지와 교감하는 바다와도 같다.
저자는 한창 학문적 성숙을 향해 가는 36세의 나이에 홀연 학문 현장을 떠나,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자의식이 생길 때부터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학문의 길을 벗어버리는 과정은 만남도 고(苦), 헤어짐도 고(苦)의 연속이었다. 당시 대학의 부조리한 관행 속에서 배제되는 과정이 학문 자체에 대한 회의를 불러온 것이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공부 없는 인생도 훌륭한 인생일 수 있’음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던 그는 우연한/필연적인 기회에 하버드 대학의 동양학 강의 하나를 청강하면서, 다시금 학문의 길로 회귀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하버드대학의 동양학 내용에 한국의 불교나 유학에 대한 관심과 언급이 일절 없었다는 것이 그의 의욕을 자극했다. 미국사회에서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 전통과 일본 불교 특징 사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재수’한 학문 여정의 최정점, 바로 아래(박사학위 논문 제출)에서 그는 또 다시 전회를 선택한다. 즉 논문 제출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학문과 수양을 겸전하는 삶의 자세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 이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찾아 헤매는 자”로서 초빙교수, 방문교수로 강의하거나, 한국불교연구원, 종교문화연구소의 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하며 ‘소임’을 수행해 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학자의 책상 위에 책갈피에 존재하고,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 상품으로서 존재하는 불교학을 벗어나, 기존의 틀을 깨고 껍질을 벗겨 내온 과정이었다. 이렇게 “재수하는 학문과 삶”이라고 명명한, 자신의 학문 여정을 회고한 1부에 이어 2부 불교리뷰, 3부 이민자의 눈으로 본 세상, 4부 단상은 한국과 미주에서 신문, 뉴스레터 등에 기고한 단편들이 수록되었다.
2.
미주 사회, 기독교가 종교를 넘어 하나의 생활양식이 된 미주 한인 사회에서 ‘섬’처럼 떠 있는 불교를 (신앙)하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로서 그는 끊임없이 미국 내의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위상을 탐문하고, 그 진로를 모색한다. ‘수입불교, 수출불교, 수하물 불교’의 방식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한 동아시아 불교 전반에서 한국 불교 또한 위 세 가지 정체성을 모두 아우르며 정착하고, 때로는 도태되며, 때로는 두렷한 족적을 남기며 이어져 오고 있다. 저자의 단편적인 글들을 통해서, 미주 한인 사회에 불교가 이식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다. ‘내부를 간직한 외부자’로서 저자는 미국에서, 불교의 진면목을 더 넓게, 더 멀리, 더 깊게 천착해 나간다. 폭넓은 학문 작업(서구 불교학에의 접근과 기독교-신학과의 교류를 포함하여)의 일단이 담담하게, 그러나 깊은 울림을 안겨주며 전개된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축은 그가 평생 불교학의 언저리를 떠돌며 만났던 적지 않은 수의 불교학, 종교학의 선배, 동학, 후배들의 면모를 알려준다는 점이다. 36세에 학문의 길을 접으며 그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부조리한 학교 사회의 관행보다도, 그동안 만났던 뛰어난 스승, 동학(同學)들과 이별하는 일이었다. 그들로부터 받은 영감과 그들의 혜지(慧智) 들은, 저자의 단편적인 회고 속에서도 생생하다. 이기영, 서경수, 박성배, 안병무(기독교), 일타스님 등의 불교학 석학과 그리고 스승 이기영을 통해 접한 장 필리오자, 포르 드미에빌, 주세페 투치, 라모트, 외젠 뷔르누프 등 서구의 불교학자에 이르기까지 짧은 글 속에서도 그들의 학문적 업적을 간접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학문 여정에 대한 에세이 들을 통해 우리는 미국 사회에서 (한국)불교의 여러 가지 행태와 과제 상황을 접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종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의 빛을 얼핏얼핏 엿볼 수 있게 된다.(그 본격적인 이해는 이민용 교수의 근작으로 그간의 불교학 관련 논문들을 엮어 편집한 연구소에서 다루어진다.) 또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폭넓은 시각을 통하여 오히려 한국(내) 불교의 문제점과 그 대안적인 방향을 간결하게 정리해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 동아시아에서 건너간 불교를 기반으로, 혹은 유럽을 통해 수용한 불교 이해를 바탕으로 미국 사회에서 미국(현지인)인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서양 불교’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울지도 흥미롭게 개진된다.
3.
‘말로 말을 버린다’(因言遣言)이라는 <대승기신론>의 경구는 그가 미주 한인사회, 그중에서 불교계에 대하여 말의 위험성, 말로 인해 오해되고 빚어질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우려를 무릅쓰고 자기주장을 펼쳐 나갈 때, 스스로를 경계 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나아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소통단절’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돌려주는 경구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그는 말을 통한 소통이 자기주장의 강조가 아니라, 나의 한계와 처지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일이며, 말을 통하여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심지어 다르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 그리고 그 차이마저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바로 소통이라는 깨달음의 말을 전한다.
저자는 불교인이면서 또한 불교학자이면서, 그러나 ‘거리를 둔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또는 벗어던지지 못하면서, 다시 한 번 더 나아가 학문적 추구자와 생활자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서/않으면서 바람직한 불자상, 건전한 종교인상과 더불어 종교론, 불교론과 그의 인생론을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