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신인철학 (51)
생물학자는 대개 자연현상과 인간의 현상을 혼동해서, 인간계의 사실을 논할 때에 동물계의 법칙을 남용하여 비교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동물성과 인간성의 차이를 무시하는 데서 생기는 착오이며 인간을 모두 물질적, 기계적 법칙으로 해석하는 데 치우친 까닭이다. 인간은 어느 점으로 보든지 인간이요 동물계의 법칙을 그대로 인간계에 적용할 수는 없다. 이제 동물계와 인간계의 차이점 몇 가지를 열거하면
생식과 축식
첫째, 생물계는 생존경쟁의 힘이 강한 데 적응하기 위하여 스스로 생식력이 강하게 된다. 생식력이 강한 결과는 또한 생존경쟁이 격렬케 되며 한 생물과 다른 생물 간에 먹이[食料]의 공급-수요의 관계가 된다. 예를 들면 벌레[虫類]가 번식한다는 말은 그 벌레를 잡아먹는 조류의 먹이[食科]가 넉넉해진다는 말이며, 조류 자체도 먹이의 넉넉한 공급에 의하여 번식이 왕성해지면 조류를 잡아먹는 다른 동물의 먹이의 수요가 풍부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다른 생물은 자기가 타생물을 잡아먹는 동시에 자기도 역시 다른 생물에게 잡아먹힌다.
그런데 인간은 첫째 이 점부터가 다르다. 물론 인간도 한 개의 생물인 이상 역시 자기도 다른 생물의 먹잇감이 될 만한 소지가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이 이법의 시행을 제한케 하였다. 예를 들면 인간은 고대에는 다른 맹수에게 잡혀 먹히던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에 와서는 과연 근절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오늘날 가장 인간을 양식으로 하고 사는 생물 중에는 미생물(黴菌)을 첫째로 꼽을 수 있는데 그것은 또한 문명과 의술의 진보와 위생의 완비로 인하여 이를 방지하리만큼 되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다른 생물에게 먹히는 경우가 심히 드물게 되었다. 그런데 만일 인간의 먹이의 범위가 고정불변이라 하면 결국 인간은 맬더스의 말과 같이 식량부족으로 인하여 필경 멸망을 면치 못한 것이라 볼 수 있으나 인간의 식량 범위는 결코 고정불변이 아니다. 인간의 수는 25년마다 배가(倍加)한다고 멜더스는 말하였으나 인간 이외의 생물은 인간보다 비상한 수로 증가하는 것인즉 인간은 그 증식하는 생물의 어떤 부분을 먹게 됨에 따라 그를 보충하고 있다.
인간이 요구하는 생물을 인간 이외의 동물도 또한 요구하는 자가 많으나 인간은 지식의 힘에 의하여 자기와 동일한 식물을 요구하는 타생물을 배제하고 자기에게 식물이 되는 생물을 번식케 할 수 있다.
이상은 요컨대 다른 생물과 인간의 차이점의 하나인데 다른 생물은 생식과 축식(蓄殖)에 심대한 차이가 있음에 반하여 인간은 그 차이가 심히 희소하여 간다는 것이다. 즉 다른 생물은 생존경쟁을 위해 서로 잡아먹는[相食] 작용에 의하여 축식이 생식에 비례하여 백분지일 천분지일 혹은 만분지일이라 가정하면, 인간은 생식과 축식의 차이가 심히 적으며 문명의 촉진에 의하여 머지않은 장래에는 거의 균형을 잡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할 수 있다.
자연적 계급과 인위적 계급
둘째, 인간계와 생물계의 차별은 계급에 있어서도 구별할 수 있다.
생물학자는 인간사회의 계급을 논할 때에 문득 생물계의 계급을 인용하여 인간계와 생물계를 혼동하여 말하나 그러나 거기에도 심대한 차이가 숨어[伏在] 있다. 즉 학자들이 인간계의 계급을 말할 때 생물계의 꿀벌의 계급과 같은 계급을 들어 인간계의 계급과 혼동하여 말한다. 꿀벌의 계급은 누구든지 아는 바와 같이 여왕벌, 노동벌, 숫벌의 세 계급으로 되어있는데 여왕벌은 생식만 하고 노동벌은 노동만 하고 숫벌은 종자를 전할 뿐이다. 그런데 학자는 이것을 예로들어 꿀벌에게 계급이 있는 것이 자연[天然]의 법칙이라 하면 인간계에도 계급의 차이를 면치 못하리라 한다.
그러나 꿀벌의 계급과 인간계의 계급은 근본에서 성질이 다르다. 꿀벌의 계급은 각기의 천부생리(天賦生理)로서의 생물학적 계급임에 반하여 인간의 계급은 정치.경제적 계급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계급은 부동적 또는 천연적이지만 후자의 계급은 변천적(變遷的) 또는 인위적(人爲的)이다. 이것이 전자와 후자가 소양의 판이가 있게 되는 이유이다. 전자는 선천적이므로 불변적이지만 후자는 인위적이므로 얼마든지 변동할 수 있는 것이다.
적자생존
셋째, 생물학상의 근본 원칙인 적자생존의 이론으로 볼지라도 생물계와 인간계는 다소 차이점이 있다. 생물계의 적자생존의 이치[理]는 자연환경에 매여 있는 고정 부동의 율법이지만 인간계의 적자생존의 이치는 전연 이와 다르다. 우선 오늘의 사회를 볼지라도 부자의 자식은 그 생리(生理)로 보아 어떠한 불구자라도 생활을 넉넉히 할 수 있지만 가난한 자의 자식은 생리적으로 완전한 적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굶어 죽을[飢死] 상태를 면치 못한다. 이는 물론 인위적 결함인 사회 상태에 관계된 일이지만 고정한 자연계의 현상과 변천 무상한 인간계의 상태는 결코 동일율로 비교하여 말할 수 없다.
생존경쟁과 상호부조
넷째, 생물계의 현상과 인간계의 현상이 다름에 따라 생존경쟁의 원리도 또한 다른 것이다. 자연계에 생존경쟁이 있다 하여 인간계에도 또한 동일한 율법으로 지적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며 화단(禍端)이다. 이 점을 통찰[通見]한 크로포드킨은 일찍이 헤겔을 비판하여 헤겔은 생물계 일반을 통하여 모든 생물간에는 잔인무자비한 생존경쟁뿐이 있다고 말하나 그는 전혀 자연계를 그릇 본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현 사회의 변호에 이용하면 궁극적으로 인류사회의 모범을 최고 형태의 유기적 생명에서 구하지 아니 하고 오히려 최저 형태의 유기적 생명에서 구하게 될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고 그는 또 "동물 중 서로 끊임없이 투쟁하는 자와 상호부조하는 자가 어느 것이 적자(適者)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곧 상호부조의 관습을 취득한 자야말로 의심 없이 적자가 될 것을 안다" 하였고 릿치는 "식물과 하등동물에서 볼 수 있는 경쟁은 대개가 동물개체 간에도 행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인간계의 동포 간에까지 인용하여 말하는 것은 실로 원시적 종류의 소견"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생물계의 경쟁의 원리를 인간계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인간성을 동물성으로 인하 타락케 하는 비열한 학설이며 인간성에 역행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인간성의 순류적 향상을 막아 역류적 향상을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아니한다.
이상 네 가지 차이 외에 근본을 소고하면 여러 가지의 심원한 차이를 들 수 있다. 여하튼 인간계와 동물계를 동일한 율법으로 생각하는 물질적 기계론은 사람성 자연주의로서는 결코 취하지 못할 점이며 또한 천연의 이법에 그러할 리가 없을 것은 명연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