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로의 전환
* 이글은 KCRP(한국종교인평화회의)의 기관지 <종교와 평화> 186호(2023.11.30)에 기고한 글입니다.
종교를 개창하는 신인성자(神人聖者)들은 당대의 핵심적인 갈등을 치유하는 가르침과 대안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그 일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기득권 세력, 전통적인 가치관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종교든 시대적, 지역적, 인종적 특수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그중 일부는 특수성을 포월(包越)하며 전 인간적, 전 지구적 보편성을 획득한다. 좀 더 근본적인, 그래서 긴 세월(역사) 동안, 대다수의 인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과 모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종교가 이른바 ‘세계종교’가 된다.
천도교(동학) 역시 처음에는 당대 조선의 시대적 모순과 그로 말미암은 갈등을 감지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求道)한 결과로 창도되었다. 그런데 동학 창도주 수운(최제우)의 경우 당면하는 과제가 당대, 일국(조선)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중국과 일본), 나아가 당시에 서세동점의 형태로 감지된 전 지구적 갈등의 비등(근대 자본주의의 세계화)과 맞물려 있다. 그런 까닭에 창도 당시부터 천도교(동학)은 이미 세계사적 과제에 대한 해법을 내장(內藏)하였다.
인간이 직면하는 갈등은 인간적(개인적)인 것과 사회적(국가적)인 것, 그리고 세계적(보편적)인 것의 세 층위로 나눠볼 수 있다. 물론 그 셋은 서로 얽혀 있다. 생전 복락(도성입덕)과 사후 극락(영생불멸)의 삶에 대한 희구와 그 유한성으로부터 말미암는 갈등, 개인과 공동체 - 공동체와 공동체 간의 갈등, 국가 간 전쟁을 비롯하여, 세계관(이데올로기)의 대립적 구도, 문명사(종교사)적인 전환으로부터 야기되는 갈등을 들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세대간, 남녀간, 빈부간의 갈등은 물론 인간과 자연의 갈등 같은 것이 끊이지 않는다.
수운(최제우)은 인간과 세계에 갈등이 야기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고 통찰했다. 각자위심은 내가 우주-일체-존재임을 망각하고, 개체화된 존재라고 착각하는 데서 발생한다. 각자위심은 개인적으로는 이기심(利己心)이나 물욕(物慾)으로 드러난다.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권력자는 권력자대로 민중은 또 민중대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위한 이기심과 물욕에 휩싸여 쟁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회적으로는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는 태도로 드러난다. 수운이 특히 주목한 것은 당시 동양사회를 미개시하며 “천주의 뜻을 가르쳐 준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동아시아로 밀려들어오는 서학의 행태이다. 세계적으로는 이 갈등이 인류 역사의 거대한 전환기(개벽)에 직면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갈파하였다. 선천의 운이 쇠하고 후천 오만년의 새 운수가 이제 막 돌아오는 과도기에 처한 인생(人生)과 세계의 고난을 말한 것이다.
수운은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동귀일체와 다시개벽을 제시한다. 동귀일체(同歸一體)는 나(인간)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자(타인, 만물)와 연결된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본질을 깨닫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수운의 동귀일체는 공동체성(전체성)의 강조에 앞서서 우주적 존재로서의 개인(個人, 個物)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사람과 만물이 시천주자(侍天主者)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전통적인 조선사회는 ‘나’에 선행하여 공동체(가문, 국토, 국가)가 존재하고, 나는 그 공동체의 일부로 이해하는 것에서 그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수운의 시대에 이르러 우주적 기운의 흐름에 따라 ‘나의 나됨’을 자각하는 세상이 되었음에도, 그 의미를 자각하거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사회(조선)와 개인 간의 갈등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그에 더하여 새롭게 도래하는 서학은 ‘한울님(天主)의 뜻’이라고 하면서 나 한 몸의 천국행을 기원하는 편협한 개인주의를 조장하고 갈등을 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또 서양 세력은 자국의 이익을 폭력적으로 갈취하면서도 야만을 문명화한다는 그럴 듯한 허울을 쓰고 아웅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공동체 우선주의, 천하(중국) 중심주의 전통과 부딪쳐 갈등을 빚어내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수운은 “‘나’는 우주적 영성, 신성을 갖춘 우주적 일체이니,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인간상, 그리고 동귀일체의 존재성을 ‘시천주’라는 일성(一聲)으로 선언하였다. 다시개벽도 같은 맥락이다. 낡은 인간관, 시대인식, 세계관을 새롭게 바꾸는 것, 존재의 진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앎, 그것을 마음(정서)으로 긍정하고 회복하는 것이 곧 다시개벽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나 세계는 다종다양한 갈등이 빈발, 남발, 폭발하고 있다. 이는 우리(인간) 삶의 현장이 전 지구적(우주적)으로 연결되고, 관계의 왕래가 빛의 속도로 빨라지고, 관심의 범위가 전 세계적으로 확장된 데 따른 것이다. 인간사회뿐 아니라 자연세계로까지 확장되고 그 결과로 인류세( Anthropocene, 人類世)라는, 인간과 자연의 갈등 문제까지 그 규모가 커졌다. 천도교(동학)에서도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갈등을 치유하며, 평화와 구원의 세계를 예비하는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을 세 갈래로 소개한다.
첫째, 나의 나 됨(시천주, 동귀일체)을 각성하고 회복하고 포덕(布德, 덕을 베풂)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한 근원(天地父母)으로부터 유래한 동포(同胞)임을 알고 이해와 사랑을 우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시천주인(侍天主人)은 시시비비에 섣불리 간여하지 않고 조용히 나의 지혜(덕)를 베풀고자 한다. 타자의 악을 내 마음에 숨겨서 소화하고 타자의 선은 세상에 드러내 빛내는 삶을 실행할 수 있는 심성을 매일매일 연마(수련)하고자 한다. 사람과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과 만물이 한 동포이며, 사람과 한울님도 일체임을 깨닫고, 그러므로 경천, 경인, 경물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둘째, 언제나 한울님께 묻기(質問)를 잊지 않고자(不忘), 멈추지 않도록(不息) 한다. 한 생각, 한마디, 한 걸음, 한 만남의 굽이굽이마다 이것이 한울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묻고(告天) 그 답을 따른다. 심고(心告), 식고(食告)를 비롯하여 기침, 출입, 거래, 수수, 왕래, 진퇴의 일거수일투족에 한울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그리하면 인심(人心, 私心)을 비우고 천심(天心, 公心)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한울님은 덕과 지혜를 베풀라고 했지, 시비(是非)와 정사(正邪)를 가리는 데 나서라고 하지 않았다. ‘내 옳고, 네 그르지’가 분분한 국면을 만들지 않는 것, 만들어지면 그곳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을 우선의 덕목으로 삼고자 한다. “일이 있으면 이치에 따라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고요히 앉아 본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
셋째, 드러난 현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더러운 것, 같잖은 짓, 기막힌 일이 횡행하는 세상이지만, 갈등은 그것에 정의와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에 비로소 촉발된다. 현상에 발끈하여 부딪치기 전에 그 이면을 헤아리고 대처하면, 갈등은 일어나지 않거나 사라진다. 똥은 더럽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몸에 덕(德, 영양분)을 베푸느라 스스로를 희생한 결과임을 알고, 용납하면 잘 처변하면 된다. 같잖은 짓이나 기막힌 일 또한 그 유래를 거슬러 살펴보면, 사연이 없는 구석이 없다. 잘 처변하면 갈등으로 비화할 일이 없다. 수운은 이 이치를 불연기연(不然其然)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렇지 않은 듯, 잘못된 것인 듯해도 거기에도 다 이유와 이치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헤아릴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즉각적인 해결을 욕심(慾心)할 때 갈등은 현실이 된다. 타자가 아니라, 주체가 갈등 생성과 해소의 핵심 관건이다.
해월은 이러한 갈등 해소, 치유, 극복의 길을 달리 표현하여 “한 사람이 착해지면 천하가 착해지고, 한 사람이 화해지면 한 집안이 화해지고, 한 집안이 화해지면 한 나라가 화해지고, 한 나라가 화해지면 천하가 같이 화할 것이니, 비 내리듯 하는 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라고 노래하였다. 수천 년이 걸려도 안 될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 종교의 위력이고, 천도교의 존재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