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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07. 2018

사람성 자연의 구성방식과 사회진화(1)

다시 읽는 신인철학 53

제4절 사람성 자연의 구성방식과 사회진화의 관계



1. 제1법칙   


제1법칙 사람성 본능의 요구와 외계 자연의 에네르기의 조화에 의하여 사람성 능률이 생기고 사람성 능률의 총관계가 사회 기능을 낳고 그리하여 다시 사회 기능과 사람성 능률의 합치가 사람성 자연이 된다.


방식 : 개성본능 + 자연세력 = 사람성 능률 

                                            사람성 능률 + 사람성 능률 총화 = 사회기능 

                                                                                                사회기능 + 사람성 능률 = 사람성 자연


해설 : 여기에 가령 한 마리의 벌이 있다 하면 벌에는 반드시 그의 특수한 본능이 있다. 즉 꿀을 제조하는 본능이다. 벌의 성(性)에서는 그 본능 이외의 것을 찾아 낼수가 없다. 이것은 일반 자연계가 다 그러하다. 자연계에는 다 같이 한가지의 특수한 본능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곧 개성본능(個性本能)이다. 

그러나 개성본능은 내재적이므로서 본능 자체만으로는 아무 능률이 생기지 않는다. 여기에 외계 자연의 에너지[에네르기]를 가하여야 개성 능률이 일어난다. 벌은 꿀을 제조하는 본능이 있으나 본능뿐으론 꿀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외적인 꽃의 에너지를 가해야 벌의 본능에서 능률이 나게 된다. 이것이 곧 개성능률이다. 그리하여 벌의 개성능률 총화, 즉 벌떼[蜂群]의 총능률이 곧 벌의 사회기능이 된다. 여기까지는 동물이나 인간이 동일하다. 


인간도 역시 인간성 본능만으로는 아무것도 되는 법이 없다. 외계자연의 세력을 이용하는 데서 사람성 능률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람 개성의 능률뿐으론 사회기능이 일어나지 않는다 '로빈손 크루소'가 무인도[島中]  혼자 사는 것[獨生活]은 이것이 사회기능이 아니요 개성능률의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성능률 전체가 총화하는 데에서 인간사회에 기능이 이루어진다. 여기 까지는 벌의 사회, 즉 동물의 사회나 인간사회가 다를 것이 없다. 


인간과 동물이 다르게 된 점은 다음 조건 때문이다. 즉 사회기능과 개성능률의 합치가 사람성 자연이 된다는 조건이다. 이 조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벌의 예를 든다면 벌의 생활은 수천년 이래 혹은 수만년 이래 아무 진화가 없는 일정한 생활을 해 온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외적 사회기능이 벌의 개성능률에 반영이 되어 그것을 자기 성(性)에 융화하지 못한 까닭이다. 즉 벌의 성은 단순한 본능만이 있고 의식적 작용이 없으므로 외적 사회기능의 반영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성 본능은 그와달라서 외적 사회기능을 받아들이고 따라서 그를 융화하여 자기성 능률과 합치케 하는 점에서 사람성 능률을 한층 고상케 하며 사회기능을 한층 진화케 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성 자연이 된 원인이다. 벌의 성에는 벌의 성 자연이 있음과 같이 사람성에는 사람성 자연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사람도 선천적 의미에서는 물론 본연한 사람성 본능의 충동에 지나지 아니하다. 다음엔 충동과 외계의 조절에 의하여 경험이 나게 된다. 경험은 자극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성은 그 역사적 과정에서 축적된 유전의 잠재의식이 있음으로써 충동 이외에도 외적으로 자연계의 경험을 얻게 되고 내적으로는 유전적 경험이 발작(發作)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적 경험은 이것이 관념이 되며 이상이 되며 창조가 되며 또 공상이 되어 나타난다.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은 이러한 내외계의 결합적 발작 작용으로 조직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와 같이 경험이 다시 경험을 낳게 되면서 복잡한 의식이 발생케 된다. 그러므로 고등한 의식은 내외계의 기득(旣得)한 경험이 새로운 외계조절을 받아서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곧 개성의 능률이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자각이 사회적 관계를 나타나게 한 것이 아니요 사회적 관계가 도리어 자각을 생케 하였다는 말을 우리로서 해석한다면 그 소위 사회적 관계라는 것은 물질과 물질, 기계와 기계가 엉크러진 돌각담이 아니요 물질과 생산관계와 역사적 의식관계가 서로 합치되고 서로 작용하는 유형 무형의 합일물이라 볼 수 있다. 빛에는 별로 화소(火素)가 없다 할지라도 연소(燃燒)라는 작용체 중에는 물질과 열의 결합이 화학적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음과 같이 유물론적 의미에서 의식은 별로 본체가 없다 할지라도 경제 기타의 사회적 물질작용을 일종의 연소체로 본다면 물적 작용은 연소의 재료가 되고 의식은 연소의 원동력인 열이 된다 할 수 있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사람성 자연이라는 것은 개성능률과 사회기능과 자연의 세력의 세가지의 유기적 합성생장체가 인류의 집합적 의식체제를 통하여 움직이는 것을 이름이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면 개성의 의지활동이라는 것은 본능의 욕망뿐인데 그 욕망이 자연과 조절되고 작용되는 데서 사회적 작용이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욕동(欲動)이 자연과 조절하는 작용을 일러 노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노동은 다시 자연의 에너지를 생산관계로 변작(變作)하는 데서 사회기능이 생겨나게 되고 사회기능은 다시 사람성 능률에 반영이 되어 그것이 삶의 의식으로 화하여 그 시대시대의 사람성 자연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오거스트 콩트

개인심리의 발달은 다만 사회심리의 발달을 설명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직접적 증거다. 개인의 출발점과 인류전체의 출발점은 동일하므로 개인심리가 경과하는 각 계단은 인류심리의 각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아 그 유소(幼少) 시대에 자기가 일개의 신학자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청년시대에는 형이상학자이며 자라서는 자연철학자가 된 것과 같은 과정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시대사조에 뒤떨어지지 않은 사람일 것 같으면 누구든지 이 진리를 자신의 몸에 맞추어 입증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자 꽁뜨의 말이다. 이 말을 받아 헤겔은 


유아의 신체는 대인에 비하여 보면 삼천년 이전의 우리들 조선의 신체와 근사하다. 이 신체 중에는 물론 우리의 생리적 기관의 하나인 뇌수(腦髓)도 포함되어 있다. 필경 소아의 뇌는 대인에 비하여 멀리 원시시대의 미개인과 근사한 터이므로 따라서 원시시대의 우리 조선(祖先)이 공통히 가지고 있던 신학적 미신은 동시에 지금 아동심리의 특징이 되지 아니치 못할 사정이다. 나아가 우리 개인의 심리는 그뿐이 아니다 한 종속(種屬)의 발생과 한 개체의 발생은 공동의 보조를 취한다. 한 종속이 몇만 년을 경과하여 온 그 여정을 한 개체는 겨우 수년 혹은 수십년의 일생에 복습하고 만다.


하였고, 헤겔은 또한 


개체 발생의 역사는 종속 발생의 서서한 역사를 한숨에 축사(縮寫)해 버린다. 시험으로 우리가 일반 척수동물의 태아를 조사해 보면 어느 것이든지 그가 어떤 시기에서 어류시대(魚類時代)를 경유하여 온 증적(證跡)을 알 수 있다. 그 머리둘레에는 아가미의 형적(形跡)이 남아 있다. 필경은 이상의 모든 생물이 일찍 선조시대에 고기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는 것인데 그는 다시 


사람이 모태 중에서 십개월간을 자라나는 각 계단을 조사해 보면 그는 생물이 아메바 시대로부터 진화하여 인류까지 온 형적을 십개월간에 복습한 증적을 표시하고 나온다.


고 하였다.


이것은 물론 과학으로 실험한 말이다. 그 외에 우리 개성에 대한 신비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렇다면, 우리의 개성에는 실로 우주의 전축도(全縮圖)가 박혀 있는 것을 넉넉히 알 수 있다. '천지만물이 모두 내 한 몸에 갖추어져 있다(皆備吾身)'이란 말이 관념상 유심적 주관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요 차라리 과학상으로 그런 것이 아닐까? 개성은 그만치 인연이 기고 범위가 복잡하고 연대가 오랜 것이 아닌가? 이런 개성으로 가졌으므로 이런 인류사회를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닌가? 원류(猿類)나 다른 동물이 사람의 사회와 같은 사회를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은 그의 개성이 그만치 부족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우리가 사회기능의 유기적 체제 중에 개성의 그마만한 능률을 집어넣지 않고 그저 경제 그저 기계 그저 물질이라는 종합을 사회라 할 수 있을까? 경제와 기계와 물질의 종합은 필경은 인간성 능률, 즉 인간격을 종대(枠)로 하고 굴러가는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의 진화를 전혀 사람성 자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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