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비결 2-25
서소문공원은 조선 시대에는 사형터였다. 서학(천주교) 신자들도 희생되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난 곳이다. 서소문공원을 비롯한 서울의 서대문 일대는 조선 시대 풍수설에 따라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있다고 하여 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고 감옥이 있던 곳이다.
숙살지기(肅殺之氣)!
만물을 죽이는 늦가을의 기운이며, 무언가 엄숙해지고 떨리는 기운을 말한다.
서소문공원을 천주교만의 성지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여 공원에 천막을 치고 1년간 농성을 했다. 공원에서 지새우는 밤 기운은 서늘했고, 낮이라도 비라도 오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서소문공원에 서린 역사를 잘 아는 어느 시인은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서소문터를 거닐면 왠지 음습하다. 특히 새벽에 안개가 눅눅한 날은 더욱 그렇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형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런 분위기는 이어질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환원하지 않는다면 마음속의 빛은 언제나 눅눅할 것이다. 내가 없던 자리에 내가 있고 내가 있던 자리에 내가 없다.”
서소문 일대의 역사를 잘 알기 이렇게 표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2015년 5월 서울중구청이 주관한 학술토론회에서 서소문밖 처형지 희생자는 천주교 신자 외에 조선 시대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처형된 역사의 현장이라고 결론지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을 비롯하여 홍경래 난 주동자들, 개혁주의자 허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개혁주의자들, 동학 교조 신원운동을 벌인 이필제 등, 동학혁명지도자, 독립협회 지도자, 구한말 군대해산 과정에서 벌여진 전투 희생자 등 민족사적 인물들의 희생이 더 많았다. 비율도 “천주교 22%, 사회변혁 처형자36%, 나머지 일반사범”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서소문공원에서 처형된 희생자 중 천주교인들보다 조선 시대의 개혁주의자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은 2016년 11월 서울중구청이 발간한 <서소문역사공원과 동학의 관련성 검증 역사고증 학술용역 : 최종보고서>에도 잘 나와 있다.
“모반과 관련되어 처형된 자들은 총 89명이며, 사학죄(모반과 관련된 처형자는 허균, 홍경래, 동학, 갑신정변 등과 연관된 조선 시대 개혁주의자들이며, 사학(邪學) 죄인은 천주교인을 말함)인 처형자 수는 84명으로 확인됨. 사학죄인의 비중이 높긴 하지만, 모반과 관련된 처형자 또한 그 수가 많음을 알 수 있음.” (<최종보고서>, 117쪽)
이러한 역사적 근거가 아니라 하더라도 웬만한 천주교인들 즉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분들은 서소문공원을 천주교 성지로 만드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다 인정한다. 가톨릭 교단에서도 서소문공원을 가톨릭만의 성지로 만드는 것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염수정 추기경의 무리한 욕심이라는 지적도 많았다.
서소문공원의 진실을 침묵했던 언론과 정치권력
그동안 서소문공원을 천주교 성지로 만든 것에 대해 언론도, 정치권력도 모두 침묵하며 천주교단의 과욕을 탓하지 않았다. 가톨릭 선교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순교현장이라며 교황까지 불러와서 마켓팅에 열중한 천주교단 그리고 교황의 선한 이미지에 현혹된 언론도 많은 국민들도 서소문공원에서 죽어난 우리 역사의 의인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염수정추기경의 욕심과 무모함을 지적하면 그것으로 피해를 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천주교의 정치적 영향력, 즉 신자 수가 다른 무리에 비해 조금 많다보니 천주교성지화를 반대하여 선거의 당락에 영향을 받을까 염려하는 정치인들의 눈치보기는 비굴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서소문공원이 위치한 서울중구청의 공무원들의 가톨릭 눈치 보기는 역겨울 정도였다. 구청장을 비롯한 국장, 과장 등은 아예 서소문공원을 천주교에 갖다바쳐야 한다는 식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를 조선 후기 개혁정신이 발현된 것이라는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여기며 오로지 천주교만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편법을 자행하는 공직자들을 보면서 잘못된 역사에 오염된 것이 얼마만큼 큰 죄악인지 실감하였다. 모르고 짓는 죄가 무섭다는 말을 절감하기도 하였다.
서소문공원, 가톨릭 역사상 최악의 선교 현장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바 서소문공원은 가톨릭 선교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빛나는 선교의 현장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은 가톨릭 역사상에서 최악의 선교 현장의 한 곳이었다. 조선에서 왜 1만이나 되는 순박한 백성들이 순교했는가. 한마디로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을 고수한 로마교황청의 잘못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제사금령을 내려 문화적 마찰로 이땅에서 순교한 1만여 명의 무고한 생령을 순교자니 성인이니 하며 추앙하는 것 자체가 죽은 이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이거니와, 교황청은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조상제사금령의 잘못에 대해 한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3년 전 서소문공원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교황청의 지난 잘못을 사과하지 않았다. 천주교수원교구의 어느 신부는 교황이 방문하기 2년 전부터 조상제사금령에 대한 교황청의 잘못된 선교정책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아직껏 교황청이 사과했다는 뉴스는 없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가톨릭이 조선후기 개혁사상의 본보기나 되는 듯이 서소문역사공원 사업의 사업목표는 “조선 후기 개혁사상의 발현과 탄압이 근현대 시대에 미친 영향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더불어 이곳 서소문 형장에서 처형된 역사적 인물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정신적 가치를 되새기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대로 서양역사를, 가톨릭의 실상을 아는 분들은 따끔하게 지적한다. 조선후기 개혁사상에 ‘천주교’를 포함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서학은 우리 사회에 평등사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서학에는 평등사상이 담겨 있지도 않았다. 교과서에서는 서학과 평등사상을 유관한 것으로 가르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다. 서학 즉 천주교는 서양의 역사에서 마지막까지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에 저항한 세력이다. 17~18세기의 서양사에서 천주교의 역할은 ‘반동’이었다. 가톨릭교회가 시민사회의 가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였고, 특히 사회정의의 문제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20세기의 일이었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그들이 관심을 갖게 된 문제들은 유독 한국에서만은 18세기부터 그랬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백승종, <역설>)
“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도 참된 고백성사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전개된 가톨릭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오히려 가톨릭 내부에서 더많다. 2년전 어느 신부는 “민족의 고난은 뒷전이고, 극악무도한 패륜 정권하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교회와 무관한 일로 여긴다면 교회가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심각한 물음을 갖게 할 것”이라며 가톨릭 교회의 친일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바 있다. 조금 장황하지만 그 일부를 옮겨본다.
“경술국치(한일 강제 합병, 1910년)의 공로자는 가톨릭 신자인 반 비르브리트라는 인물로 밝혀졌다. 뮈텔 주교 일기 1910년 8월 26일'반 비르브리트 씨 덕분에 한국이 병합되고 그 조약이 29일에 공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경술국치의 공로자인 반 비르브리트(Biervliet)는 누구인가?
1909년 12월 3일자 뮈텔 일기에 그에 대한 소개가 있다. '며칠 전에 부임한 신임 대리 부영사(프랑스 부영사) 알퐁소 반 비르브리트 씨도 방문했다. 그는 어제 우리를 방문 왔었다. 그는 벨기에의 유명한 가문에 속하고 또 자신은 아주 열심한 가톨릭이기도 하다.'
경술국치는 5천년 한국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을 병합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 가톨릭 신자였다니 교회가 민족에게 저지른 엄청난 죄악은 어떤 변명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다. 이런 사실들을 왜 지금까지 숨기고, 속죄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이번 추계주교회의에서 고백성사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정작 교회는 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왜 아직까지 참된 고백성사를 하지 못하는가?”
천주교의 친일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천주교를 폄하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천주교 내부에서 이렇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성찰하고자 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서소문역사공원에 관하여서도 천주교에서는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 단초의 하나가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순교자들도 지금의 서소문공원 현양탑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현양탑에 순교자로 기록되어있는 황사영 등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조선을 청나라로 편입시키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벌해 달라고 요청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인물이다. 황사영 등은 우리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일본에 나라를 바친 친일매국노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천주교 순교자를 국민의 세금으로 기념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천주교단 내부의 진지한 판단은 늦었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황사영 등의 반역행위를 서소문역사공원에 기록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여지껏 천주교 내부에서 황사영백서 사건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지지 않았다.
정난주 마리아
서소문공원 천주교성지화를 반대하며 황사영이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나에게는 좋은 공부의 기회였다.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는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로 15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정조는 황사영이 장성하면 등용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고 한다. 황사영은 왜 전도양양한 장래를 버리고 서학에 빠져들었고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반역행위(무력 원조)를 했을까?
황사영보다 더 기막힌 사연은 황사영이 처형당한 후 홀로된 아내 정난주 마리아와 아들의 행적이다. 서소문공원 천막에서 밤을 새우며 알게 된 정난주 마리아와 황사영의 아들의 뒷이야기는 참으로 눈물겨웠다. 사형수의 아내와 아들은 제주 섬으로 귀양간다. 젖먹이의 엄마는 평생 노비로 살아가야 할 아들을 염려하여 흑산도에 잠시 배가 머물 때 섬주민에게 아들을 맡기고, 담담히(?) 자신은 제주도 대정 땅에서 평생을 노비로 살다 여생을 마친다.
흑산도에 남겨진 젖먹이 아들은 황씨 집안의 대를 잘 이어간다. 천주교단에서는 제주도와 흑산도의 황사영 관련 유적을 잘 가꾸어 놓았다.
순교자 가족의 지난했던 삶을 잘 증언하고 있는 황사영의 처 정마리아의 행적은 신앙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내가 믿는 것은 동학이지만 정난주 마리아의 행적에서 많은 공부가 되었다. 수운께서 동학과 서학을 비교하여 한 말씀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던 한 계기도 되었다. 수운 선생은 이렇게 기록했다.
신유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묻기를「지금 천령이 선생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대답하기를「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
묻기를「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 합니까.」
대답하기를「천도이니라.」
묻기를「양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
대답하기를「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 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니라.」
수운 선생은 동학과 서학을 비교하여 운도 하나요 도도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고 하였다. 어느 누가 보아도 정난주 마리아 삶에서 많은 감흥을 느낄 것이다.
나는 언제가 제주도 대정 땅 그의 묘를 찾아 한송이 꽃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황사영의 행위를 반역행위로 분명히 기록하고 천주교에서도 이를 공식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학과 서학은 이치는 다른 법이다. 이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동과 서라는 지역적인 구분만큼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헛되지 않았다.”
최근 서울중구의회에서 열린 서소문역사공원 사업 조사특위에 증인으로 출석한 서울중구청 공무원들의 인식은 종교편향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서소문공원에서 희생된 천주교 순교자 외의 동학 및 우리 역사와 관련된 희생자들을 잡범이라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공무원들과 구의원들의 문답의 한 토막이다.
공무원1 : 신자가 많은 종교를 모티브로 관광자원, 수익사업으로 추진한 것. 나머지는 잡범으로 생각한다.
의원 : 천주교 희생자 22%, 동학 등 희생자 36% 그들을 잡범으로 보나? 처음 구청장이 부탁한다 했을 때 이 사업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파헤칠수록 문제가 많다.
공무원2 : 천주교 성지로 공원조성하면 관광객 많이 와서 활성화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문답을 직접 접한 해월신사의 후손인 어느 동덕은 “천주교 순교자 외는 잡범이라 한 공무원들을 좌시하시 않겠다. 동학혁명유족회분들과 함께 강력대응하겠다.”며 분개했다.
지난 3년 동안 이들 공무원들은 서소문공원을 천주교성지로 만드는 것을 반대하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반영해 달라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분명한 역사적 자료를 제출하면 검토하여 반영하겠다는 말은 했지만 말뿐이었다. 자신들이 주관한 학술토론회의 결론이나 자신들이 발주한 학술용역의 결과가 서소문공원을 천주교성지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중구의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서소문범대위 위원장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다행한 것은 중구의원들이 서소문공원 사업의 예산집행에 절차상의 하자가 있음을 알고 예산을 삭감하여 서소문역사공원 중사를 중단시켰다. 그러자 천주교단에서 난리가 난다. 자신들의 의도대로 서소문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중구의회라는 의외의 복병을 만난 것이다. 중구의원 9명중 5명이 서소문사업의 예산집행 절차상의 잘못을 문제 삼고, 본질적으로 서소문공원 사업이 특정 종교를 위한 것임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천주교단에서 15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내년 지방선거에서 보자며 중구의원들을 압박하자, 중구의원들은 서소문범대위에도 연락을 취하게 되고 서소문역사공원을 둘러싼 논란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서울시의회에서도 서소문역사공원의 종교 편향을 쟁점으로 삼겠다며 서소문범대위에 연락이 취하여 자료를 요청하고 있다. 아직 국회의원들은 잠잠하지만 서소문역사공원의 종교 편향에 대한 논란은 조만간 국회에서도 쟁점화될 것이다. 기초의원인 구의원들이 국회의원들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지난 8월 초 중구의회와 중구청 앞에서 집회를 하루 앞두고 지난 3년 동안 서소문범대위 활동에 노심초사했던 어느 분은 이런 느낌을 밝혔다.
“내일 8시 중구청 앞에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투쟁이 헛되지 않았음을, 한울님 감응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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