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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6. 2018

동학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다나카 쇼조의 동학 평가를 중심으로 

기록/정리 : 조성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제66호(2017.8) 17-19쪽


[편집실 주 : 이 글은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매주 진행하는 동학원전읽기 강독 모임의 공부 내용 중 일부입니다. <해월문집> 강독에 이어 <전봉준공초> 강독을 진행하는 사이사이 관련되는 자료(원문)나 논문을 함께 읽는 바, 이번 호에는 전봉준을 높이 평가한 일본의 사상가 '다나카 쇼조'의 관련 글을 읽고 토론한 내용을 녹취하여 게재한다.]


박맹수 : 오늘 같이 읽을 자료는 다나카 쇼조라는 근대 일본사상가가 쓴 <조선잡기(朝鮮雜記)>라는 짧은 글 중에서 동학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조선잡기>의 일본어 원문은 1978년에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간행된 <다나카 쇼조 전집(田中正造全集)> 제2권(282-285쪽)에 실려 있고, 2004년에 이와나미서점에서 ‘이와나미문고’의 하나로 간행된<다나카 쇼조 문집(田中正造文集)> 제1권(136-139쪽)에도 실려 있습니다.  나눠 드린 한글번역은 전집 제2권에 실린 내용을 저본으로 삼아 야규 마코토(柳生眞) 박사님이 번역한 것으로, 아마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된번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나카 쇼조는 전봉준과 동시대의 인물로 근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입니다. 몇 년 전에 교토포럼에서 ‘공공하는 인간’으로 주목한 적이 있고, 최근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반성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는 사상가이자 실천가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해월 최시형 선생과 같은 생명사상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중의원 국회의원까지 역임하였는데, 이 분이 뜻밖에도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2년 뒤인 1896년에 쓴 일기 속에 동학과 전봉준에 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마도 동학에 관한 중요한 정보나 지식은 이미 습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잡기>에 실린 동학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전라도 운봉(雲峯)에 최제우라는 사람이 있었다. 동학당의 원조로, 하나의 종교 일파를 일으키기를 희망했다. 그의 학문은 노자의…선술(仙術)과 불교·유교의 세 가지를 묶어서 하나의 종교를 조직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유교를 숭배하기 때문에 뱀이나 전갈같이 위험시되어 최제우는 나이 30세에 일찍 죽임을 당했다. 그 제자(子弟)에 최시형이라는 자가 있었다. (메이지) 27년(1894년)에 나이가 70쯤 되는 사람이다. 경상도 상주 사람으로, 종파 사람들을 지휘했다(아직 생사는 미상이라고 하지만 죽었다고 한다).

또한 전라도에 최시형의 제자가 있다. 영암 마을에 사는 전봉준이라는 사람이다. 부상을 당해 조선정부에 생포되어 처형당했다. (메이지) 27년 음력 9월 23일에 죽었다. 나이는 41세.

○ 이때 일본인 중에 지쿠고국(築[筑]後國) 사람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라는 사람이 있었다. 전봉인[준](全琫人[準])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가 마침 히로시마(廣島) 대본영(大本營)에 있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 다케다는 카바야마를 찾아가서 구출해 달라고 설득했는데, 카바야마가 주저하여 결단이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전봉준은 피살되었다[이노우에(井上) 공사(公使)의 정략(政略)이라고 한다].

동학당은 문명적이다. 12개조의 군율은 덕의(德義)를 지키는 것이 엄격하다. 인민의 재물을 빼앗지 않고 부녀자를 욕보이지 않으며, 병참부대의 물자는 군수나 관아에 의지하고, 병력으로 권력을 빼앗아 재물을 취하되 그 땅을 다스리는 것이 공평하다. 만약에 군율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총살한다.

○ 동학당이 이르는 곳을 ‘제중의소’(濟衆義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시 관청이다. 그런데 동학당의 단점은 전투에 대해 미개하고 대오의 방식은 구식이지만, 책략은 대단히 교묘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조선정부가 관병을 모집한 틈을 타서 동학당이 모집에 응하였는데, 정부는 이것을 몰랐다. 전쟁이 한참일 때 (동학군과) 호응하여 관병을 크게 격파했다.

전라도의 전주라는 곳을 취할 때, 관병이 인천에서 전라도 연안(沿岸)으로 돌아왔다. 주요한 마을마다 곳곳에서 전쟁이 있었다. 전봉준은 별도로 정예 수백 명을 거느리고 산맥을 따라가면서 복장을 지역주민 옷으로 위장하여, 몰래 전주성 옆의 성 꼭대기에 나타나서 갑자기 외쳤다. 성 안(의 군사들)은 당황하여 도주했다. 한 명의 병사도 피를 묻히지 않고 전주를 얻었다고 한다.

봉준의 자는 녹두이고 부하는 3천명이 있었다. 동학당 중에 간혹 잔혹하고 포악한 자가 있었지만 모두 녹두를 두려워하여 ‘전대인’(全大人)이라고 부르니, 숨은 동학당의 태두이다(당원은 대략 10만명). 녹두는 품행이 방정하고 부하들도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모략이 풍부하지만 공명정대하게 스스로 개혁의 업을 맡았다.

하지만 녹두의 뜻은 종교로 근본적인 개혁을 꾀하고자 하였다. 다만 조선의 국교는 유교로 인심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녹두가 쇄신한 종교를 꺼려서, 반역할 마음이 있다고 뒤집어 씌워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부하들은 이에 분노하여 마침내 병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녹두 한 사람이 병사를 일으키게 되면, 이 한 사람은 당 전체와 관련되기 때문에 동학당 전체의 병사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그 우두머리들은 모두 죽음을 함께하고 일본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선 백년의 대계는 정신부터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는 그것을 모르고 새싹을 짓밟았다. 애석하다! 실로 녹두는 공명하고 한시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동학)당인(黨人)들은 그를 꺼리어, 적을 진중에 끌어들이는 것 같은 감정이 있었지만, 녹두는 중론을 물리치고 한시 등 10명을 당 안으로 불러들여 밀의(密議)를 하였다.

한시 등은 봉준으로 하여금 이씨 (조선) 500년의 뒤를 이어서 대혁명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이 대목에 대해 녹두는 주저하였다. 말하기를 “신하(臣子)된 자로서 차마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부하들은 대황락(大荒落), 즉 탕무방벌(湯武放伐)의 뜻을 이야기하였다. (야규 마코토 번역)


이상이 「조선잡기」에 실린 동학 관련 기록으로 전체적으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군데군데 오류도 보이는데, 가령 첫째 줄에 최제우(1824~1864)를 “전라도 운봉”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경상도 경주”가 맞습니다. 그리고 최제우 선생이 처형당한 것도 30세가 아니라 만 40세입니다. 아울러 메이지 27년, 즉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시형(1827~1898) 선생의 나이도 70세가 아니라 67세입니다. 또한 상주 사람이 아니라 경주 출신인데 아마도 상주에 주로 숨어 계셨기 때문에 상주 사람이라고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암 마을에 사는 전봉준”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는 ‘고부’가 맞습니다. 다만 전봉준(1854~1895)이 집강소 시절에 순회하다가 영암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무렵의 정보가 일본에 전해져서 “영암 마을에 사는 전봉준”으로 알려진 것 같습니다. 처형된 날짜도 “메이지 27년(1894) 음력 9월 23일”이 아니라 “메이지 28년(1895) 음력 3월 29일”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가령 동학농민군의 군율이 엄격했다거나 동학군이 머무는 곳에 설치한 임시사령부가 ‘제중의소’였다는 것, 그리고 전봉준의 부하가 3천여 명이었다는 것 등은 모두 사실입니다. 실제로 전봉준과 생사를 같이 했던 정예부대가 3천여 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1863~1911)는 천우협(天佑俠)이라는 낭인(浪人) 단체의 한 멤버인데, 실제로 천우협이 전봉준과 접촉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본의 일부 세력들이 전봉준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조선의 내정 간섭이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처형 직전에 구명 운동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보면 “동학당은 문명적이다”는 표현이 주목할 만합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 저널리스트, 정치가 중에서 그 누구도 동학농민군을 이렇게 높게 평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나카 쇼조는 동학군의 규율의 엄격함과 도덕성을 보고서 동학당을 문명적이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지금 다나카 쇼조와 동학사상을 비교하는 박사논문을 쓰고 계시는 오니시 히데나오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로 합시다.


오니시 히데나오 : 저는 현재 다나카 쇼조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동학사상과 비교하여 다나카 쇼조 사상이 동아시아사상사에서 지니는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다나카 쇼조가 동학을 높게 평가한 글을 남겼다는 사실을 박맹수 교수님으로부터 소개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의아한 마음과 함께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저는 다나카 쇼조에 대해 ‘위인’이라는 정도의 이해만 있었을 뿐 사상가라는 인식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학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코마츠 히로시(小松裕)라는 다나카 쇼조 연구자가 이 사실을 지적하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동학에 관한 정보가 그때 그때 신문에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나카 쇼조가 동학에 대해 여러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2년 후까지 다나카 쇼조가 왜 그런 높은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메스컴도 처음에는 동학농민군에 공감하는 보도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894년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가 먼저 조선에 들어오고 그것을 구실로 일본군도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신문의 보도 내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조선에 있는 일본상인들을 비롯한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본군이 출동하였다는 내용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점점 일본군을 변명·옹호하는 내용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다가 동학군이 진짜 동학군이 아니라는 보도가 나오게 되고, 마지막에는 그런 가짜 동학군은 탄압을 해도 당연하고 섬멸해야 한다는 사설로 변질됩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4~1901)가 <시사신보(時事新報)>에서 제일 먼저 이런 논조의 사설을 쓰자, 이후에는 여기에 동조하는 사설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다나카 쇼조는 전혀 동조하지 않고 동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잡기>와 이에 대한 고마츠 히로시 선생의 연구서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나카 쇼조가 동학을 ‘문명적’이라고 평가한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명’이라고 하면 서양 근대 문명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서양근대 문명이야말로 문명적이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였습니다.

그런데 다나카 쇼조는 후쿠자와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다른 문명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동학을 ‘문명적’이라고 평가했을 때의 문명의 기준은 곧 덕의(德義)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2개조 군율에 입각해서 덕의를 엄중히 지킨 동학농민군을 문명적이라고 평가했다고 생각됩니다.

또 하나는 “녹두의 뜻은 종교를 가지고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는데 있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다나카 쇼조는 동학농민군이 ‘무력’으로 봉기했다는 현상적 사실만 보지 않고, 그 바탕에는 종교에 의한 개혁을 꿈꾼다는 ‘사상’이 있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점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동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다나카 쇼조만의 특징입니다. 당시 일본의 다른 사상가나 매스컴에서 이런 평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나카 쇼조가 동학에 공감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이상의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나카 쇼조가 동학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동학의 생명사상 때문이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나카 쇼조가 나중에 생명존중사상을 확립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조선잡기>를 쓴 1896년 4월 당시에는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고마츠 히로시에 의하면 아시오동산의 구리광독 반대운동 초기에 다나카 쇼조가 의거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소유권’이 광독피해 때문에 침해된다는 논리였고, 국회에서 정부를 추궁한 것도 바로 이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잡기>의 이 부분에서 동학의 생명사상에 공감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다나카 쇼조가 생명사상을 확립한 것은「 조선잡기」를 쓰고 나서 그 해 여름에 일어난 와타라세강의 대홍수로 인하여 그 유역의 광대한 지역이 아시오 구리광산에서 유출된 광독에 오염되어 그 지역 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광독피해 지역 어린아이의 사망자수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에 다나카 쇼조는 경악했습니다. 그는 광독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특별히 “비명(非命)의 사자(死者)”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이후에 다나카 쇼조의 광독반대 운동의 논리가 ‘소유권 보장’으로부터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생명=생존권 보장’으로 바뀌어 갑니다. 정부에 대한 책임추궁도 이 논리로 전개하고 광독반대운동도 이 논리로 추진하게 됩니다. 또 이 논리가 하나의 근거가 되어 청일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이라고 인정했던 주장을 극복하고 러일전쟁 직전에 비전론(非戦論)을 표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나카 쇼조가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게 된 밑바닥에는 그가 만년에 이르기까지 애독했던 <맹자>의 인화(人和, 공손추(하))로 대표되는 인본사상이 있었고, 그 밖에도 청소년시절에 열심히 신앙했던 ‘후지코(富士講)’라는 민중종교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나카 쇼조가 <조선잡기>에서 동학에 대해 높은 평가로 일관했다는 주된 이유는 덕의에 바탕을 둔 문명관과 종교에 의한 개혁이라는 두 가지 점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나카 쇼조가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군율의 내용을 다 읽고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면, 동학의 생명사상에 대해 공감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이 동학에 대해 공감한 주된 이유로 보기에는 좀 비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나카 쇼조의 동학관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공공(하는)철학’이라는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맹수 : 아마 한국에서 다나카 쇼조의 동학관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있는 논의를 하는 것은 오늘 이 자리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야규 박사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야규 마코토 : 다나카 쇼조의 사상이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 동학에 대해서 알게 되고, 와타라세강 아시오 구리동산 광독문제에 관여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평화사상과 생명사상이 점점 깊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맹수 : 실은 제가 다나카 쇼조의 <조선잡기>를 분석하면서 동학의 생명사상에 공감하고 있다고 주장한 장본인입니다. 구체적인 자료에 입각해서 주장했다기보다는 다나카 쇼조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고서 추측한 것입니다.

다나카 쇼조는 젊은 시절에 전봉준 장군과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주로부터 마을의 통치임무를 위임받는 동시에 영주에 대하여 농민을 대표하는 직무였던 나누시(名主)직을 맡고 있었던 시절에, 농민들이 영주로부터 종래의 관례를 어기는 과혹한 착취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에 저항하다가 투옥을 당합니다. 그 후에도 자유민권운동 시절이나 아시오광산 광독 반대운동 시절을 포함해서 무려 네 번이나 투옥을 당하게 됩니다. 마치 전봉준이 고부 군수 조병갑에 항의하고 청원하다가 체포당한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2011년 늦가을 쯤에 오니시 선생님과 함께 다나카 쇼조의 고향인 도치기현(栃木県) 사노시(佐野市)로 답사를 간 적이 있는데, 이 지역은 메이지 시대에 매우 가난한 동네였고, 또한 자연재해가 극심해서 농민들이 굶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나카 쇼조는 나누시 역할을 하면서 고통당하는 민초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 경험들이 그로 하여금 생명존중사상을 잉태시키는 단초가 되었고, 그런 단초가 있었기에 동학에 대해서 직감적으로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야규 박사님도 언급했듯이, 만년에 사상의 개화가 젊은 시절의 단초나 뿌리 없이 갑자기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가령 해월 선생은 만년에 “향아설위”(向我設位)나 “이천식천”(以天食天)과 같은 엄청난 설법을 쏟아내는데, 이런 사상들이 갑자기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의 여러 시행착오를 격은 뒤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다나카 쇼조 역시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동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실은 무교회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한 우치무라 간조도 청일전쟁을 ‘의전론’(義戰論), 즉 ‘문명의 전쟁’이라고 옹호하는 글을 영문으로 발표할 정도였습니다.

조성환 박사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조성환 : 제가 이해하기로 오니시 선생님의 주장은, 다나카 쇼조는 <조선잡기>를 쓴 이후에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생명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잡기>를 쓸 당시에 동학농민군에 공감을 한 것은 ‘덕의,’ 즉 도덕성을 중시했고 종교에 의한 혁명을 꿈꾸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인 것 같습니다. 저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하지만 박맹수 교수님의 견해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광산이나 홍수의 피해로 인한 주민들의 죽음은 거의 모든 일본인이 직간접적으로 목격하고 경험했을 터인데, 왜 유독 다나카 쇼조만이 그것을 계기로 생명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혹시 그가 그 이전에 그런 생각의 단초들을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최소한 처음부터 생명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것이 나누시 시절의 경험이나 동학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조금씩 키워지고 깨어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만약에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동반된다면 선생님의 학설이 보다 더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가의 임무란 이처럼 사료에 나오지 않는 공백들을 역사가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충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오직 사료만이 객관적이고, 사료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주관적이라는 관점인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과학적 태도이지 인문학적 태도는 아닙니다. 과학적 태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그냥 데이터를 분석하고 정리하거나 사료에 나와 있는 사실을 밝히는 수준에 그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나 사상과 같이 가치지향적 부분들은 다 제거되어 버립니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니까요….

그러나 <사기>를 쓴 사마천은 황로학 계열의 사상가였지 단순히 실증사가는 아니었습니다.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도 사상가였습니다. 다나카 쇼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을 분석하려면 적어도 이들의 사상에 대한 인식이나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역사학자는 자료를 다루는 과학자나 통계학자로 전락했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합니다.

한국 역사학계에 사상사가 부재한 것은 역사가가 사상가가 아니라 과학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에게 ‘사상’이 없기 때문에 ‘사상’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해석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관계만 규명하는 과학자가 어떻게 사상가를 분석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다나카 쇼조가 동학의 ‘덕의에 의한 문명관’과 ‘종교에 의한 개혁’에 ‘공감’을 했다고 하셨는데, “동학은 문명적이고 종교를 통한 개혁을 추구한다”는 다나카 쇼조의 서술이 단지 사실적인 기술인지 아니면 거기에 대한 공감을 포함한 서술인지에 대해서도 보충 설명이 있었으면 합니다. 특히 다나카 쇼조가 동학의 종교에 의한 개혁에 공감했다고 한다면, 그 역시 종교의 개혁에 공감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가 <조선잡기>를 쓸 당시에 이런 생각이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홍지훈 : 저 역시 이 글만 가지고서는 다나카 쇼조의 생명중시 사상을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성환 박사님도 지적하셨듯이, 다나카 쇼조가 젊었을 때 주위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뭔가 의분을 느꼈을 것이고, 거기에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싹트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생명을 지키는 것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네 차례나 투옥되면서까지 항의를 한 것이 아닐까요?


조성환 : 방금 말씀을 듣고서 드는 생각은, 확실히 이 당시에 다나카 쇼조가 생명에 대한 자각까지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사람에 대한 존중의식은 있었고, 그것이 동학에 대한 평가의 바탕에 있지 않았나라는 것입니다. 즉 최시형이든 전봉준이든 다나카 쇼조든 모두가 사람을 존중하는 사상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단지 동학군이 ‘도덕적’(덕의)이어서 공감을 했다고 보기에는 좀 약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지금 원불교의 경산 종법사가 “사람이 가장 큰 보배다”고 하였듯이, 당시의 다나카쇼조 역시 이런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람이 하늘이다”는 사상을 내걸고 있는 동학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근대 일본이 추구한 이른바 ‘서구적 문명화’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산업중심 문명에 대한 반발로 사람중심 문명을 표방했고, 이것이 “사람이 하늘이다”를 표방하면서 근대식 일본군에 저항하는 동학군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국 다나카 쇼조의 동학에 대한 평가는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역사적 지평을 빼놓고서는 그 사상사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오니시 히데나오 : 박사님이 궁금해 하시는 “동학의 종교성에 대한 다나카 쇼조의 공감”에 대해서는, 다나카 쇼조가 <조선잡기> 집필 전후에 유사한 종교적 체험을 한 적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지금 쓰고 있는 박사논문 속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조성환 : 오늘 토론을 통해서 제가 든 생각은 “전봉준과 다나카 쇼조의 토착적 근대화 운동”이라는 테마로 본격적인 비교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대에 비슷한 체험을 한 전봉준과 다나카 쇼조라는 두 인물을 통해서 서구적 근대와는 다른 길을 모색한 사상적 여정을 비교고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니시 선생님의 박사 논문이 기대됩니다.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

근대 일본의 사상가이자 정치가로,일본 최초의 공해사건인 ‘아시오동산광독사건’(足尾銅山鉱毒事件) 때 공해반대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아시오동산광독사건은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 도치기현(栃木県)과 군마현(群馬県) 사이를 흐르는 와타라세강(渡良瀬川) 상류에 있는 일본 최대의 광산인 아시오구리 광산에서 나오는 유해물질로 지역주민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다나카 쇼조는 이에 저항하기 위해 구리 채굴 중단을 촉구하는 연설을 국회에서 계속하였고, 1901년에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천황에 직소(直訴)까지 하였다. 그 후 만년에는, 정부가 아시오광산 광독의 침전지를 만들기 위해 와타라세강 중류에 위치한 야나카촌(谷中村)을 폐쇄하려고 하자, 야나카촌으로 이주하여 주민과 함께 생애의 마지막까지 반대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화하지 않고 강을 황폐화하지 않으며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 오늘날근대 일본의 ‘생명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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