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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7. 2018

제3장 사회질병설(2)

다시 읽는 신인철학 56



2. 추상적으로 본 사회질병

  

이상에 말한 범죄 사실이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사회 자체의 불완전한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로부터 사회질병이 무엇인가를 찾아 낼 수 있다. 


카펜터는 ‘질병이란 말을 우리의 생리상태에 대해서와 한가지로 우리의 사회상태에도 적용할 수 있다.’라고 했다. 왜 그러냐 하면 육체의 질병이 건강을 구성한 생리에 통일을 잃게 하여 부분적 발달과 부분적 투쟁을 일으키게 함과 같이 현 사회도 어떠한 장해적 발생물로 말미암아 그 조직이 소모됨으로써 현대문명은 생명의 통일을 잃어버리고 각계급 간의 쟁투와 사회의 일부가 손상을 받으면서 기형의 발달을 하고 있다. 


즉 현대사회는 사회적 기생충으로 말미암아 조직이 소모되어 가는 것을 사실로서 증명할 수 있다. 이 의미에서 나는 직접으로든지 응용으로든지 질병이라는 말을 금일의 문명사회에 적용하기를 주저[躇躕]치 않는다. 즉 사실상 통일을 잃어버리고 보조와 호습이 불완전한 현대문명은 확실히 질병에 빠졌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건강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카펜터는 이 점에서 정신주의를 고조하였다. ‘인간의 참된 건강은 단일이며 전적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즉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려면 각자 자기내환에 존재한 단일인 중에 있는 집합인을 의식하여 제반의 관능(官能)과 욕망을 그것에 봉사케 하고 그것과 같게 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카펜터의 유명한 사회질병의 일절이다.


‘우리가 아는 범위에서 인생생활의 화와 악[禍惡]을 고찰하여 보면 이를 대개 3종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우리의 생리적 성질에 붙일 만한 자인데 불타(佛陀)가 말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은 것, 생활하는 동안에 생기는 모든 곤란 같은 것은 이를 육적(肉的) 화악이라 부른다. 

둘째는 우리의 성격의 결함 또는 성벽(性癖)으로부터 나오는 화악을 들어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중에는 무지(無知), 의지박약, 감정격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격의 화악이라 부른다. 셋째는 어떤 개인, 어떤 단체가 다른 개인 또는 다른 단체에게 위임하는 권력에 기반한 것인데 이는 단지 제도의 경우만이 아니요 모든 자유로운 발전에 대한 일절의 간섭도 포함하여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권세에 의하여 생기는 경우도 있고 교육과 같이 과대한 정신적 세력도 이에 경우도 포함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권력의 화악이라 한다. 

무릇 사회생활의 가부 장단은 이러한 3종류의 화악에 대한 관계에  의하여 판단할 수 있는데, 이 화악의 3종류는 이를 획연히 구별하여 말할 수 없으리만치 상호작용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육체적 화악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으니 예를 들면 우리가 죽음을 면하기는 도저히 불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힘에 의하여 그를 연기할 수 있는 일이므로 결국은 대다수의 사람이 그 수를 완전케 하는데 있어 불가능이라 할 수 없고 또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만인에게 건강한 생활을 주어서 무한히 그를 배제할 수도 있다. 식량문제에 있어 토지로부터 한정 없는 수확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노동량을 경감하고 또는 그의 조건을 개선하여 화악을 정지하기에 가능할 수 있다. 

다음 성격의 화악은 육적 선악의 결과로 볼 수 있으나 다수에 있어서는 또한 권력의 해악이 빚은 결과이다. 왜 그러냐 하면 대개 전제(專制)란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와 동시에 그것을 받는 자도 한가지로 타락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권력의 해악은 권력을 가진 자의 성격에 해악을 끼침은 물론 상대적으로 무권력자의 빠지기 쉬운 운명인 육체적 해악에 대한 공포에 의하여 더욱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3종의 해악은 서로 착잡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시 총괄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물질계에 직접의 원인을 가진 우리의 불행은 별문제로 하면 우리자신의 결함에 기한 것과 타인의 지배에 대한 우리의 복종으로 생하는 것을 구별하여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럿셀의 말이다. 그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3종의 해악을 들어 사회적 질병을 논한 것은 성적(性的) 해악에 우리의 정신상태를 편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내가 장차 물어 보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제거치 아니치 못할 근대사회의 근본적 폐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하여는 2종의 가능한 해답이 있으니 내가 본 바로 말하면 모든 선량한 사람이 여기에 대하여 항시 전도된 해답을 주는 줄로 믿는다. 즉 저들은 ‘노예상태’라고 대답할 말을 빈핍(貧乏)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빈핍은 다만 증상이요 노예상태는 그의 질환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폭부(暴富)와 적빈(赤貧)과의 양극단은 필연적으로 방종(放縱)과 노예상태의 양극단을 수반하는 것이다. 저들은 빈핍한 고로, 노예적 굴종을 하는 것이 아니요 노예적 속종을 하는 고로 빈핍한 줄을 알지 못한다. 저들은 흔히 빈자의 물질적 비참에만 착안(着眼)하고 그것이 노예상태의 정신적 타락에 기인한 사실을 이해치 못한다.’ 


이것은 럿셀이 콜씨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이상의 말은 현대사회의 결함은 물질과 정신병자의 병증으로 일어난 것을 말한 것이다.


‘서구의 문화는 이미 1800년 이래 그 발전의 최후 단계, 즉 생산력이 없는 노령시대에 들었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어느덧 참된 ‘문화’의 지지자가 아니요 오직 문명의 지지자이다. 서구의 문화는 서력(西曆) 천년으로부터 2천년 사이에 정확한 한도를 지을 수 있다. 서구문화는 천년경에 ‘새로운 혼(魂)’의 최초의 조후(兆候)였던 로마의 건축 근성(建築根成)과 십자근성(十字根成)과 한가지로 발생하였다. 그 각 문화는 천년이라는 표준적 생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문화는 이미 일세기 이전부터 시작한 서양 몰락의 조후가 2천년경에 그 결말에 달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몰락은 반드시 서구인의 사멸, 축식력(蓄殖力)의 감퇴라는 것이 그 조후의 하나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일컬어하는 말이 아니요, 또 세계대전 기타의 대사건에 의하여 우리의 문화가 외면적으로 멸망한다는 것도 아니요 근본으로 문화를 생산케 하는 힘의 쇠퇴와 고사(枯死)를 일컬어하는 말이다.’


이것은 스펭글러의 저서 <서양의 몰락>에서 예언한 말이다.

대개 말하자면 현대의 모든 청명(聽明)한 선각자로서 이미 현대사회의 결함을 지적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하여 그 말의 이면에는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신시대 신문화의 출현을 많이 암시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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