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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2. 2018

종교적 사상과 금불문고불문 (1)

다시 읽는 신인철학 58

<신인철학> 연재 (야뢰 이돈화 지음)

제1편 우주관 

제2편 인생관 

제3편 사회관 (이상 '다시 읽는 신인철학' 57까지)



제4편 개벽사상

                                                                                                                                                                            

제1장 종교적 사상과 금불문고불문(今不聞古不聞)


1. 종교의 영지(領地)

  

우리는 이미 현대인들의 종교를 증오하는 관념에 대하여 대개 세 가지 점을 들어 말한 일이 있다. 첫째 종교의 교리가 현대 진보한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것, 둘째 종교는 그 운용상에서 줄곧 특권계급에 이용된 폐단이 있다는 것, 셋째 종교는 현세주의가 아니요 내세주의이므로 현실개조에 급급한 현대인으로는 이를 혐오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장래 종교'의 소질을 아래와 같이 개략적으로 열거[槪擧]한 일이 있다. 첫째 '현실신비주의'로서 신비를 현실에 돌리라는 것, 둘째 사람에게 무궁의 관념이 다하지 않는 한에는 종교적 소질은 이에서 생길 수 있다는 것, 셋째, 종교는 대개 의타의 신앙이었으나 자타 전체의 자력적 신앙이라야 될 것, 넷째 종교는 구식의 위안 방법에 그치지 말고 현실 개척에 흥미를 둔 신앙이라야 할 것, 다섯째 이상과 현실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말한 일이 있다. 


우리는 현대인 중에도 특히 현실 사상과 개조사상을 가진 이들이 한가지로 혹은 종교의 전멸을 주장하고 혹은 종교의 개조를 논하며 혹은 (새로운) 종교의 창조를 논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으며, 또는 이미 종교신자일지라도 확실히 미신에 함락된 자가 아니면 그 신앙에 타성[惰力]이 생겨서 겨우 물질의 힘과 또는 환경의 지배에 끌려 배부른 음식을 대한 경우와 같이 신자 스스로가 종교자체에 대한 의혹을 내가지고 개조를 부르짖는데 까지 이르렀으니 예를 들면 왕년에 스웨덴[瑞典]에 모였던 소위 종교회합과 같은 것은 넉넉히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수운주의는 이미 과거종교의 쇠퇴를 말한 지 오래되었으니 예를 들면 수운은 이미 80년 전 과거(1860)에 유불선의 쇠퇴(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를 말하였으며, 기독교리의 모순된 점을 지적함과 같은 것은 얼마든지 그 예를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이 종교를 혐오하며 또는 개조-창조를 논하는데 이르러서도 또한 당연의 과정인지라 동감함을 마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 우리가 한가지 말해 둘 일은 유물적 논법으로 종교를 배척하는 가운데는 종교를 배척하기 위하여 종교적 근저인 사람성까지 부인하기에 이른 것은 스스로 경계치 아니치 못할 바 있으니 이는 마치 쥐를 잡기 위하여 독을 깨치는 행위보다 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종교 폐해의 동기를 논함에 이르러 이것을 혹은 특권계급이 인민을 농락하기 위한 위조지폐와 같이 생각하며 또는 이심의 미망(迷妄)으로부터 생긴 것과 같이 논단(論斷)하는 폐단이 있다. 


그것은 물론 오늘날 몇천 년 이전의 신화적 배태(胚胎)로 생긴 종교를 회고해 본다면 어떤 때는 승려 또는 귀족등이 종교를 악용한 것으로 보든지, 또는 그 교리가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아서 당연한 비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금일의 처지로 생각하지 말고 종교 발생 당시의 인지 정도와 대조하여 본다면 그 당시 인지에는 그 교와 같이 진정으로 인심에 적합하였던 것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어른들이 어린이가 좋아하는 동화를 듣고 보면 그만치 비과학적이며 허망한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어린이 자체로 본다면 동화와 같이 진정하고 유익하며 또는 심리에 적합된 것은 없을 것이다. 고대인은 사람의 역사로서는 어린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동이 동화를 좋아하는 것과 같이 종교를 심정에 맞도록 창조한 것이다. 


포이에르 바하는 '인류의 본질이 인류의 지상(至上) 실재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지상실재는 객관적 본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신을 지상실재인 객관적 본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 신인 지상 실재도 필경은 인류의 본질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종교는 인류성의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 인류성이 무궁의 신을 대상으로 한 것은 그 실은 인류성이 자체의 무궁성을 대상으로 한 데 지나지 아니한다. 마치 사람이 자기의 얼굴을 자기가 직접 보지 못하므로 거울에 비추어 그의 반영으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이 유치한 고대인은 자기의 천성을 직접으로 볼만한 지력이 없음으로 신이라는 관념의 거울에 그 본질을 비춰놓고 보게 된 것이 곧 종교적 신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궁자의 신을 객관적이라 보는 것은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객관적이라 생각함과 동일하다. 이렇듯이 종교는 인류의 본질표현이다.


다음으로, 종교는 때를 따라 변천하였다. 정치조직에 따라 변천된 감이 있다. 부락시대(部落時代)에는 부락적 신인 다신교가 유행하였고, 국가시대에는 일신교가 유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종교 비난자로 하여금 종교는 특권계급의 남조물(濫造物)과 같이 보이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실은 종교관념이 정치관념에 따라 자생적 발달로 그렇게 된 것이요 특권계급이 일부러 종교를 남조하고 이용한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사상이 그 시대의 환경과 사람을 따라 커진 것을 권력자가 자기편으로 끌어다 붙인데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일찍이 헤겔이 ‘모든 실재한 자는 합리(合理)다. 모든 합리한 자는 실재다’라고 한 것을 독제(獨帝)  '카이젤’은 이렇게 해석하였다. ‘모든 현존한 자는 실재다. 고로 합리다’. 그래서 은연중에 자기의 군국주의적(軍國主義的) 정치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변호하는 재료로 이용하였다. 


헤겔은 본래 독일황제를 위하여 이 표어를 낸 것이 아니었으나 독일황제의 신분으로 이를 이용할 때는 자신의 경우에 좋도록 만들어 붙인 것이다. 종교도 당초는 권력자의 이용물이 되기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요 인간성 본연의 요구에서 생긴 것이다. 마치 ‘게’가 자기 몸에 맞도록 구명을 뚫는 것과 같이 사람성은 그 발전과정에서 자기성에 맞도록 종교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사람성에 맞던 종교가 금일 사람성에 맞을 리가 없으므로 종교도 스스로 변천의 도정道程을 밟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람에게 무궁에 대한 관념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은 종교적 동기는 없어질 리가 만무하다’는 것을 명언한바 있거니와 그를 종교라 할는지 혹 도덕이라 할는지 그 명사名辭는 여하하였든지 사람성 무궁의 관념으로 흘러나오는 대우주의 동태는 언제든지 남아 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최하급의 야만인에 있어서는 사물의 창성(創成)이라 하는 데 대하여 문제도 되지 아니 하였다. 다만 기괴한 가상(假想)과 행동이 영력(營力)의 문제를 야기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이상한 현상의 배후에는 인간적 인격이 있다고 가상하는 데서 종교적 유령설(幽靈說)이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가상적 제 인격이 일부분 개괄화(槪括化)되면서 다신교가 생겼고 전부 개괄화되면서 일신교(一神敎)가 되고 이와 같이 개괄화되었던 인격이 현상과 일치하는 데서 범신론(汎神論)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것이든지 우주에 대한 개념화인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즉 우주를 개념화로 상정하는 한 가설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아가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까지도 이 범주 속에 몰아넣을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도 역시 공간과 물질과 운동과의 자기존재를 주장하는 가설에 의하여 한 학리(學理)로부터 제 사실을 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펜서의 말이다. 그렇다. 우주의 속을 해부하여 신이 없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인간의 신체를 해부하여 영혼이 없다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한 무신론자일지라도 공간과 물질과 운동이 없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공간 물질 및 운동의 힘의 자기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간 물질 및 운동의 힘은 타방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자방(自方)의 자존(自存)은 없지 않을 것인즉 우리는 그 기원에 대하여 고찰할 지적 동기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고 그것이 한번 생긴다 하는 순간에 우리는 그의 자력자존을 무엇으로서 시원하게 판단할 지력을 가지지 못한 이상 즉 무궁의 관념을 제하지 못하는 이상 무신론이나 유물론자의 지적 요구도 또한 종교적 근저에 돌아가지 아니치 못할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고야 말 것이다. 즉 종교적 여지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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