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신인철학 61
야뢰 이돈화 지음 | https://goo.gl/vKaRhD (이돈화)
1. 종교의 영지(領地)
2. 종교와 생활혁신 (이상 지난 호)
어떤 사람이, 수운에게 ‘세상 사람이 선생의 도를 비난하는 자 많으니 그는 어찌 된 까닭입니까’라고 물었다. 수운은 이 말에 대답하기를 ‘우리 도[吾道]는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던 법이요[今不聞古不聞之法]이요 지금도 비교할 수 없고, 예전에도 비교할 바가 없는 일이다[今不比古不比之事]’라고 하면서 (동학을) 비난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럴 수 있다[猶或可也]’라는 말로서 용서한 일이 있었다.
이 말에 의하여 우리가 수운주의를 검토해 본다면 우리는 먼저 수운주의는 종교이냐 비종교냐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세상에서는 수운주의에 대하여 다대한 의혹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뿐이 아니라 수운주의를 믿는 신도 중에도 혹 수운주의가 종교인가 비종교인가를 의심한다. 이러한 의문은 수운주의 자신이 금불문고불문인 까닭이라 할 수밖에 없다. 수운주의는 비종교인 동시에 종교라 대답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인 동시에 ‘비모든 것’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운주의가 어찌하여 비종교인 동시에 종교이냐 하는 것을 우선 종교의 어원상으로 찾아보자. 원래 종교라 하는 말은 로마 4세기경에 법승[法僧] ‘마탁누트’가 지어낸 것인데 그 어의(語義)는 신과 사람의 결합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이 어원상으로 보아 수운주의는 우선 종교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수운주의는 신과 사람의 결합이 아니요 인내천주의상(人乃天主義上)에서 소위 신과 사람의 결합이라는 인격적 신을 근본으로부터 부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오늘날 종교의 명맥은 단순히 위안의 일도(一途)에 있는 점으로 보면 수운주의도 여기에 반대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운주의 자신도 위안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서로 용납지 못할 경우에 처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같은 위안이라 할지라도 그 소질에서 구름과 진흙[雲泥]의 차이가 있다.
과거 종교의 위안이란 것은 비진실적 내용으로 아직 남아 있는 어두운 부분의 인심을 방편적으로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위안은 인심의 어두운 부분이 밝아짐에 따라 그 거짓을 각파(覺破)하는 날이면 위안을 얻기 이전보다 도리어 성성하여지고 말 뿐이다.
수운주의의 위안은 이러한 방편적 위안이 아니요 위대한 인간격을 실현키 위하여 위대한 이상주의밑에서 그 이상을 달하기 위하여 현실과 분투하는 인간격의 신념과 용감에서 나오는 실천적 흥미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즉 이상현실주의의 위안이다. 이 점에서 수운주의는 종교가 아니다.
다음 종교는 어느 것이든지 내세주의임에 반하여 수운주의는 현세주의이다. 물론 수운주의에도 내세적 사후관이 없지 아니하나 수운주의의 사후관은 그의 독특한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에 의한 초월적 사(死)이므로 다른 종교적 사후관과 다르다. 요컨대 수운주의는 현대에 남아 있는 종교와 같은 종교는 아니다.
그러면 동시에 종교라는 말은 어찌된 것인가? 전술한 바와 같이 원시종교에서 종교는 종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요 그 당시의 생활전체에 혁신운동이 곧 종교가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종교이다. 수운주의는 현대의 모든 문화를 혁신하기 위한 일종의 생활혁신운동으로서의 종교이다. 모든 문화를 통일하여 조화하며 지도하며 그리하여 그를 인간격 중심주의에 귀납케 하여 일대 신생활의 활로(活路)를 개척하여 주는 의미의 종교다.
마치 일신교의 원시적 종교혁명이 그 당시의 생활혁신이었던 것과 같이 수운주의는 현대에서의 원시종교적 생활혁신을 가진 것과 같은 종교이다. 수운은 이것을 후천개벽(後天開闢)이라 이름하였다. 후천은 신사회를 의미한 말이요 개벽은 문화의 개조를 의미한 것이니 후천개벽은 곧 신사회건설을 의미한 것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