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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30. 2018

종교적 사상과 금불문 고불문(4)

다시 읽는 신인철학 62

야뢰 이돈화 지음 | https://goo.gl/vKaRhD (이돈화) 


제4편 개벽사상

                                                                                                                                                                            

제1장 종교적 사상과 금불문고불문(今不聞古不聞)

1. 종교의 영지(領地)

2. 종교와 생활혁신

3. 수운주의는 종교냐 비종교냐 (이상 지난호)


4. 수운주의와 종교 및 과학의 융원합일성(融圓合一性)에 대하여


수운주의에서 최종 토구(討究)할 문제는 종교와 과학이 구극(究極)에서 융원합일성을 가졌다는 것을 일언할 필요가 있으니 종교와 과학의 합일성은 즉 문화의 통일을 의미하며, 후천개벽의 전적 생활을 실현할 가능성을 전제한 것으로 극히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먼저 참고로 볼 만한 것은 스펜서의 불가지론(不可知論) 가운데 있는 종교와 과학에 대한 논증이니 그는 금일 이후 장래에는 과학과 종교가 융통합일할 가능성이 있다 하고 그 명제로 종교의 비종교성 과학의 비과학성이란 것을 들어 말한 일이 있었다.

  

1) 종교의 비종교성

  

일신교가 일어나기 이전에 원시종교의 다신관(多神觀)은 극히 비자연한 또는 극히 불통일(不統一)한 모순적 신화가 그들의 신념이었다. 종교의 원시적 관념은 유령설(幽靈說), 조령숭배(祖靈崇拜), 홍수/맹수/뇌전풍수화토(雷電風水火土) 등의 자연적 위력에 대한 신화적 소산이었다. 


원래 최하급의 야만인들은 사물의 창성(創成)이라는 관념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다만 기괴한 가상과 행동이 그들의 영력문제(營力問題)를 야기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관념의 성장은 점차 그들로 하여금 현상의 배후에 가상한 유령설이 생기게 되고 그리하여 이러한 인격적 유령관념이 개괄화(槪括化)하면서 다신론이 되었다. 나아가 다신(多神)적 관념은 사람성 자연의 진화에 따라 일신관이 되고 그리하여 이 개괄화된 인격이 현상과 일치되면서 범신론이 되었는데 어느 것이든지 다같이 우주에 대한 개념을 상정한 가정인 것이 명백하다.


우주에 대한 상정적 개념이 다신이거나 일신이거나 범신이거나를 물론하고 한가지고 상정적 가설이 되는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신조에 이르러서는, 즉 종교 자체의 소질적(素質的) 변화에 이르러서는 원시적 종교성이 발달된 종교성으로, 발달된 종교성이 일층 비종교성에 가지 나아간 증적(證迹)을 찾아 낼수 있다.


종교가 어찌하여 종교성으로부터 비종교성에 나아가게 되었느냐 하는 원인을 일언으로서 끊어 말하면

첫째는 종교적 소질이 그 내용에서 자율적으로 자각된 것과

둘째는 외계에 있는 과학적 지력(知力)이 종교에 대하여 타율적(他律的) 충동을 준 것이다

  

내계의 자각은 종교와 종교의 시간상/공간상의 충구(衝究)과 조화로 볼수 있는데 그것이 공간상으로는 타종교와 타종교 사이에 있어 우주에 대한 구극원리(究極原理)는 어찌 되었든지 신조와 명정상(名定上) 모든 속성에 있어 피차가 서로 차이점을 가진데서 그를 서로 배척하며 충돌하며 조화코저 하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종교의 가장 자각한 부분으로부터 일어난 감상(鑑賞)과 반성과 포용 등의 자율/자각이 필연적으로 종교의 내부적 변화를 생기게 하였다. 


외율적(外律的) 충동은 인간의 순수한 과학적 지력의 발달이니 인간의 나날이 진보되는 과학적 지식은 필경 종교로 하여금 내적 자각을 일으키게 함에 독한 자극을 주게 되었다. 

과학은 예민한 지력으로 종교가 뒤집어 쓰고 있는 왕관을 박탈하게 되었다. 종교의 왕관은 다신관으로부터 일신관에 이르기까지 여지없이 빼앗아 버렸다. 그리하여 벗겨 놓고 본 종교의 왕관은 종교 자체로 보아도 그 실 거짓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권력자들은 유럽에 있어서는 로마교 대 종교개혁운동과 문예부흥은 그의 초기상태였고 그리하여 뒤를 이어 계속하여 일어나는 과학운동에는 종교도 필경 굴복의 태도로 나서게 되었다. 


종교는 과학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모순 없이 나아갈 수 있을까 하고 노력하였다. 가령 예로 기독교의 성경을 들어보면 성경 속에 있는 신화적 가정설이든지 특히 우주 본체설에 대한 신의 창조설과 같은데 대해서도 아무쪼록 과학적 해석과 조화를 붙이고자 노력하였다. 


예수가 신통력으로서 몇 개의 빵을 수천인에게 나눠 주고도 오히려 몇광주리가 남아 있다는 데 대하여 이것은 예수의 신통력이 아니라 예수의 인격력이, 욕심 많고 인색[貪吝]하던 당시의 유태인을 설복하여 그들이 비밀히 가지고 있던 빵 전체를 숨김없이 내어 놓은 결과라고 설명하게까지 이르게 된 것도 그의 현저한 구체적 일례이며, 신이 6일 만에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신화를 신이 6회의 단계를 밟아 창조하였다는 해석을 붙이는 것도 한 예이다. 그리하여 일신교적 관념은 점차로 범신론적 관념이 되면서 종교의 비종교성은 일층 명료하게 되었다. 


종교는 그가 초기부터 양성해오던 신적 속성의 가식은 지금 와서는 전부 비종교적 과학성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점에서 종교를 단순히 속성의 편으로 만 본다면 종교는 확실히 비종교적 경애에 들어섰다 할 수 있다. 이것이 종교의 비종교성이다.

  

그러면 종교는 영원히 비종교에 들어가고 말 것인가? 아니다. 종교의 원질인 종교의 절대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미 없어진 비종교성은 인간의 의식이 진보됨에 따라 당연히 없어질 만한 속성 그것만이 없어진 것이요 속성을 초월한 종교의 무궁성은 그대로 아무 동요가 없다. 즉 우주의 절대 무궁성을 어떠한 과학의 힘으로도 파괴치 못할 만한 영구성을 가지고 남아 있다. 


과학이 파괴해 버린 종교적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종교를 정화케 한 정화작용으로 볼수 있다. 당연히 있어서는 안될 부정물(不淨物)을 청소[掃除]하였을 뿐이다. 종교는 이 정화성을 가지고 이제로부터 다시 신창조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요 그리하여 얻어진 신종교야말로 신사회, 신인간에 부합되는 신생활혁신과 통일 급 조화를 맡은 대도대덕(大道大德)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비종교성은 종교의 타락을 의미한 것이 아니요 신우주관, 신인생관의 통일을 긍정하는 후천개벽의 예비조건으로 볼 수 있다.

  

2) 과학의 비과학성

  

고찰의 개념을 다시 과학 편으로 옮겨 보자. 오늘날에 있어서 과학은 금일 이후에 그 진보성이 어떠한 방면을 취하게 될까 하는 것이 큰 흥미있는 문제이다. 


원래 과학이라 하면 그 성질이 우리의 경험 범위 안에서 순수한 경험지식을 기초로 한 것을 이름이다. 이 점에서 어떠한 비과학적 시대에서도 과학은 이미 있어 왔다. 불을 대하면 덥다든지 얼음을 대하면 차다든지 하는 것부터 과학적이다. 과학은 야만미개의 시대부터 있어 왔다. 불의 발명, 석기, 동기(銅器), 목축, 농업 등은 다같이 인간의 과학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것이 직접 방법의 과학이다. 


그리하여 직접 방법에만 의거하던 과학성이 다시 간접 방법의 과학성으로 진보하게 되었다. 현대 문명은 모두가 이 간접 방법의 과학이 주어진 결과이다. 이렇듯 과학은 나날이 진보하면서 철학의 영분(領分) 또는 종교의 영분까지 점령하려는 용기를 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만 비평의 태도 또는 실증적 행위만을 취하던 과학이 다음은 그 자체의 진보적 흥분성에 의하여 과학 그것이 곧 종교의 영역을 점령해가지고 모든 왕관을 자기 홀로의 머리 위에 얹고자 하였다. 이에 과학은 어느덧 비과학성을 띠게 되었다. 즉 과학성은 경험과 실증적인 것에서 점차 비과학이 되면서 추상적 개념으로 기울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상징적 가정 개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이 구명(究明)한 우주 본체는 분자론, 원자론, 전자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과학이 이러한 극미분자(極微分子)를 상정하기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어느덧 과학적이면서 비과학적이다. 왜 그러냐하면 그러한 극미분자설과 같은 것은 적어도 실증 또는 경험의 영역에 거리를 둔 가정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일례로서 물질의 극치는 가분성(可分性)이냐 불가분성(不可分性)이냐 함에 이르러 말해 보자. 우리가 물질을 무한 가분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필경 어찌 될 것인가? 물질을 나누고 다시 나누어 원자를 얻고 전자를 얻고 또 그를 무한히 분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끝없는 무궁성 발현에 의하여 도저히 개념적 상정이 서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한성의 파지(把知)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요 다시 우리는 물질은 어떤 정도에까지 이르고 보면 불가분적 한도가 있어서 거기서는 이미 가분성이 없어진다고 보면 아무리 극미분자의 물질일지라도 그가 이미 물질인 이상은 물질의 속성인 장단광협(長短廣狹)과 사면으로의 접합면이 생길 터인즉 그 상상절도(想像絶倒)의 극미한 접합을 가진 물질을 서로 접합케 하려면 여기에는 절대한 힘이 필요할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면 이 절대한 힘은 물질자체의 무궁적 속성이 되어 있을 것이니 우리는 이 절대력을 무엇이라 형용할 것인가? 여하튼지 물질 자체의 무궁성은 어떠한 지력으로든지 상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과학으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비과학성을 가지게 된 원인이 될 것이다. 과학자체는 필연적으로 비과학적으로 나아가지 아니치 못할 운명을 가졌다 볼 수 있다.

  

3) 최후의 대도(大道)

  

우리는 여기서 종교와 과학의 융합성을 알았다. 종교의 비종교성은 과학적 남상방법(濫賞方法)으로 종교 중에서 모든 부정한 속성을 소제하여 버린 순결한 종교적 소질이 남아 있다는 것이요, 과학의 비과학성은 실증 또는 경험의 내부를 기초로 한 과학성이 점차 과학성을 가지고 발달된 우주본체론에 이르러서는 종교 과학 양자가 융합할 가능성을 표현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로부터 토구(討究)할 문제는 우주본체론적 고찰 및 인생의 근본문제의 해결이 비과학성에 속한 종교적인 것인가 비과학성에 속한 과학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양자의 해답은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순수통일성을 가진 것인즉 여기서 무엇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이 이제 소실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할 만한 최후의 대도는 과학과 철학, 종교 어느 것에든지 의속(依屬)치 아니한, 그러면서도 어느 것에 든지 일관통일될 만한 전일(全一)의 대도의 표현을 요구함에 있다. 그리하여 이 요구에서 생긴 것이 수운주의의 대도대덕이라 함을 자신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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