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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04. 2018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 일본인의 시각으로 본 한국을 보다

- 이 글은 [개벽신문] 제71호 (2018년 1/2합병호)에 게재되는 글입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역, 모시는사람들 


글 : 임소현


“나는 누구인가?”만큼 의견이 분분한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 

본래 ‘나’의 인식은 ‘타인’이란 거울에 비추어 생겨나는 법! 

동경에서 태어나 자란 일본인이 한국으로 유학 와서 8년 동안 한국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성찰한 책이 바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맨 먼저 든 생각은, ‘한국인은 자신들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서양의 물질문명을 쫓아 매진하다 보니, 한국의 혼, 한국의 사상, 한국의 문화라는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오구라 기조 교수가 한국을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 이기론(理氣論)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었나 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행동양식과 정서, 한국 문화를 관통하고 있는 이기론의 출처는 조선시대에 꽃 피었던 양반들의 ‘주자학’이다.


대중성을 획득하기엔 매우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유교 추상 논리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주자학이 조선의 양반부터 상민까지 나라 전체, 조선 민중 생활 전체를 좌지우지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렇기에 오구라 교수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고 명명한 것이리라.


여기에서 다시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그렇게도 한국 전체를 사로잡았던, 아니 현재까지도 사로잡고 있을 ‘주자학’에 대해서 ‘한국인=우리’ 자신은 별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사고와 무의식, 생활양식을 크게 규정짓는 규범이나 도덕철학에 대해서 전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칸트나 데카르트, 플라톤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정작 우리를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주자학에 대해선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시 돌아보니 조선시대를 관통했던  ‘유교=주자학’의 철학 체계를 역사적으로(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떠난 지 오래고, 현재는 ‘신한류’로 명명되는 세계적인 대중문화를 이룩한 한국 문화가, 실은 그 문화 저변에서 ‘주자학=이기론’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리(理)와 기(氣)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그 안에서 항상 서열이 매겨지고, 최상위인 ‘리’를 오매불망 바라는 동경 때문에 온갖 한(恨)과 복잡다단한 한국적 사건들과 문화가 만들어진다. 추상적 본질인 ‘리’를 숭상하기 때문에 항상 명분을 앞세우며, 하위 차원인 ‘기’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허례허식, 체면치레가 과하게 된다.

조선시대 말기, 조선 인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양반으로 기록된, 그리고 남성 혈통의 기록, 아들만의 대물림 기록인 ‘족보’ 중시 문화는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리’중심의 대표적 코미디이다. 또한 지방에 갈수록 흔하게 목도하게 되는 양반/상놈, 윗사람/아랫것, 귀/천, 남/녀의 분별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것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전북 김제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상놈 백정이었던 ‘동록개’(이름마저도 동네 개란 의미)가 ‘반상타파’, ‘인간평등’을 꼭 이루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김덕명 장군에게 바쳤던 개혁과 혁명의 상징, 집강소가 있다. 최근에 복원된 이 집강소에 ‘동록개의 꿈’이란 제목을 새겨 장승을 세우려던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강력한 동네 유지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유는 천한 상것인 ‘동록개’의 이름을 새겨 기념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모든 인간을 하늘로 대접하자고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담은 ‘집강소’에서,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현재, 동학농민혁명 정신에 반하는 ‘리’ 중심 세력/의식이 여전히 판치고 있다는 것에 비애감마저 느끼게 된다.


사실 처음, 오구라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한국을 그렇게 ‘리’와 ‘기’로 추상화, 단순화시켜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올라왔다. “그가 말하는 ‘리’와 ‘기’의 정의가 주자가 말했던 ‘리’와 ‘기’에 꼭 들어맞는 것인가?”에서부터, “중국에서 넘어와 조선에 정착된 이황이나 이이의 ‘리’와 ‘기’와는 어떤 공통점이 있고 다른 점이 있는가?” 그리하여 “그가 말하는 ‘리’와 ‘기’는 일반적인 리기론의 것이 아니라 오구라 교수만의 ‘리’와 ‘기’가 아닐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그의 책 내용을 찬찬히 곱씹어보면서 그것이 중요한 논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남과 북의 한국인들이 아직도 유교적인 잔재, 유령 속에 살고 있음을 타국인의 눈을 통해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도 자체,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를 객관화하는 경험을 가지게 된 것 자체가 중요하고 감사할 일이었다.


또한 오구라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의 책 제목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한국인만이 가지는 특성들에 대해 떠오른 생각들이 있다. 그것은 ‘한’이란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무수한 의미이다. ‘한’은 한자로 한국을 뜻하는 ‘韓’이 되기도 하고 흔히 한국의 정서를 뜻하는 ‘恨’이 되기도 한다.


한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의 의미이다. ‘한’은 ‘하나’, ‘큰’, ‘전체’, ‘대단한’, ‘같은’, ‘중간’, ‘대략’ 등등의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이면서, 전체이고, 중간인 것이 ‘한’이다. 또한 큰 전체이면서, 대략 어중간한 것이 ‘한’의 의미이다. ‘한’이란 낱말이 갖고 있는 의미의 진폭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가 지적했던 대로, “이는 전체가 완숙하여 파열됨으로써 개체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개체가 자유자재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동경대전]에 나오는 ‘불연기연(不然基然)’과 같은 사상”이 내포된, 상황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묘한 말이다.


오구라 교수는 ‘한’, ‘하나’를 ‘일개성(一個性)’으로만 파악했다. 이것은 정말 오류다. 한민족, 한사상은 그렇게 단일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앞으로 오구라 교수와 달리 ‘한’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과제이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하나의’를 빼면 “한국은 철학이다”가 남는다. 한국, 한국인은 철학적이다. 오구라 교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도덕 지향적’이다.

[산해경]에서 한국을 가리켜 ‘군자국’이라 칭했다. 예로부터 예의와 도덕을 중시했던 민족이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못살아도 격식을 중시하였고, 어떤 처지에 놓여도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도우려는 인정이 넘쳤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항상 정성을 다하는 민족성이 있다. 지나칠 정도로 노력하는 민족이었고, 그 결과 오늘의 경제 성장과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단점으로는 우리 안/바깥의 구별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우리에 포함되는 것에는 예의와 염치, 인정이 넘쳐흐르지만,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바깥에 대해선 야만, 폭력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 하나의 단점은 급한 성격이다. [산해경]에서 한국 사람들을 ‘동방예의지국’이라 칭하였는데, 한국은 오행에서 ‘목(木)’에 속한다. 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하나의 지향점이 강하며,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전투적일 정도로 매진한다. 목(木)의 성격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각종 다양한 약초가 자라났고, 의학이 발달하였다. 그래서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한반도까지 사람을 보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반면에 목(木)은 손쉽게, 순식간에 불타 없어진다. 한국인에게 흔히 지적되는 ‘냄비근성’이 바로 이런 나무의 특질과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오행의 관점에서 보는 한국인의 심성 분석도 더 심도 있게 지행해야 할 과제이다.

오구라 기조 교수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시도한 한국 사회 분석은, 타국인이 철학적 심안으로 보고 분석한 거의 첫 글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타인의 눈을 빌려서든, 우리 스스로든 한국 사회의 집단 문화 심리를 논리적으로 분석해 가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의 문화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지된 방향성 속에서 우리 문화를 더 아름답게, 세계 속에서 활짝 꽃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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