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일순의 한살림철학을 중심으로
조 성 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 [개벽신문] 제70호, 2017년 12월호
‘4차산업혁명’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우연히 일본의 ‘4차산업혁명’ 동향을 조사할 기회가 생겨서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지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에 못지않게 ‘인더스트리 4.0’이라는 말을 애용하고 있고(특히 현장에 몸담고 있는 경영인이나 전문가의 경우에), 그것도 ‘일본형’이나 ‘일본판’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1
예를 들면 [일본형 인더스트리 4.0](2015), [일본판 인더스트리 4.0의 교과서-IoT 시대의 모노즈쿠리 전략](2016), [일본형 제4차 모노즈쿠리 산업혁명](2015)과 같은 책제목이 그것이다.2 이러한 용어들은 제조업 강국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모델을 일본적 현실에 맞게 변용하여 제2의 제조업 부활을 꿈꾸려는 의도를 암시한다. 말하자면 4차산업혁명의 ‘일본화’이자 ‘토착화’인 것이다. 마치 과거에 일본이 서구 근대문물을 수용할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경우에는 아직 구체적인 ‘한국형’이나 ‘한국판’ 논의는 없는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냥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만 ‘유행’하고 있는 느낌이다.
반면에 근대화나 4차산업혁명과는 다소 거리가 먼, 어쩌면 정반대편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생명운동’의 경우에는 ‘한국형’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의 전통이 있다. 그것이 바로 ‘동학’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의식에 ‘동학’은 ‘종교’나 ‘저항’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근대적 세계관에 입각한 역사학자들의 역사서술에서 기인하는 편견에 불과하다.
몇몇 선구적인 선학들이 이미 지적하고 있듯이 동학의 본질은 생명운동이었다. 이 점을 현대 한국에서 최초로 간파한 이가 한살림을 창시한 장일순이다. 최시형보다 1세기 뒤에 태어난 장일순은 한편으로는 동학의 생명사상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살림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이 관료의 부패와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여 일어난 생명운동이라고 한다면, 장일순의 한살림은 근대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탄생한 생명운동이다. 1세기를 차이에 두고 일어난 이 두 운동은 모두 가장 반(反)생명적인 시기에 일어난 생명운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은 조선의 동학을 한국의 동학으로 부활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생명운동은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위기의식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동학은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대해서, 장일순은 현대 산업문명의 비인간성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보이면서 생명과 살림의 가치를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서양의 무기는 세상사람 중에 대적할만한 자가 없다. 무기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도구(殺人器)이지만 도덕은 (사람을 살리는) 활인기틀(活人機)이다.3
천지의 도에 밝고 음양의 이치에 통달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업을 얻게 하면 이것이 어찌 도덕문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4
여기에서 최시형은 서양의 근대문명과 동학의 생명문명의 차이를 ‘살인(殺人)’과 ‘활인(活人)’이라는 단어로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살인의 도구가 무기인 데 반해 활인의 기틀은 도덕이고, 동학이 추구하는 문명은 사람을 살리는 ‘도덕문명’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최시형의 이 말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동학의 ‘도덕’ 개념이다. 최시형이 말하는 ‘도덕’은 유교윤리에서 말하는 예적(禮的) 질서에 바탕을 둔 오륜도덕이나 차등도덕이 아니라, 우주적 생명력에 근원하는 생명도덕 또는 살림도덕을 말한다. 이것을 최제우는 [동경대전]에서 ‘천도(天道)’와 ‘천덕(天德)’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여기에서 ‘천(天)’은,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天主)을 때리는 것이다”5는 최시형의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 ‘우주적 생명력’ 그 자체 또는 그것에 의해 탄생된 개‘ 별적 생명체’를 가리킨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유학자들이 민보군(民堡軍)을 조직하여 동학군 진압에 나선 이유는 동학군이 유교적인 차등도덕에 반하는 평등도덕을 주장하였기 때문인데, 이 평등도덕의 존재론적인 근거가 바로 ‘생명’이었다. “하늘은 반상을 구별하지 않는다”(唯天無別班常)는 최시형의 말은 “생명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다”(唯生無別班常)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공자식으로 말하면 “유교무류(有敎無類)” 대신에 “유천무류(有天無類)”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학은 철학적으로 보면 양반과 상놈 사이의 계급투쟁이기 이전에 생명운동이었고, 설령 계급투쟁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철학적 근거가 ‘생명의 평등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한편 동학이 추구한 생명문명은 당시에 첨단무기를 앞세운 서구 열강 및 아시아에서 서구화를 선취한 제국 일본과도 충돌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살림문명과 동서양을 대표하는 기존의 두 문명, 즉 안으로는 전통적인 유교문명과 밖으로는 근대적인 서구문명과의 충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후에, 한국은 이른바 서구적 근대화, 그중에서도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어갔는데, 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절정에서 등장한 것이 장일순의 생명사상과 살림운동이다. 장일순(1928~1994)은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에 서구 근대문명의 비인간성과 서구적 이원론의 폭력성을 절감하고 생명운동으로 돌아섰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1세기 전의 최시형(1827~1898)과 동일한 문제의식 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도 그렇고 소련도 그렇고, 영국, 독일, 불란서 같은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문화인이라고 문명인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완전히 난센스죠. 그것은 반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거예요.6
오늘의 산업문명은 환경, 즉 생태계로부터 단절되어 고립된 기계와 흡사한 세계이다.(<한살림선언>)
여기에서 우리는 1세기 전의 최시형의 말에 나타난 서구인식과 구조적인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최시형이 서양을 ‘살인무기’라는 말로 규정했던 것처럼 장일순도 서양 선진국들을 “사람을 죽이는 무기” 생산국으로 규정하고 있고, 그것을 반문명적이며 반생명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즉 과거의 동학이 그랬던 것처럼 ‘개화’나 ‘문명’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서구 근대의 반문명성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다만 최시형과 장일순의 차이가 있다면, 양자의 사이에는 1세기 동안의 산업화 과정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이다. 즉 장일순의 시대는 동학이 배척한 서구의 산업문명이 이미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온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 장일순은 다시 동학의 생명운동을 불러왔는데, 그것이 바로 한살림운동이다. 따라서 한살림은 동학의 살림운동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동학과 한살림은 “한국형 생명운동”의 원류와 전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장일순의 한살림철학은 최시형의 ‘밥사상’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최시형의 밥사상은(萬事知, 食一碗)7 흔히 “우주의 이치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이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이 말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논하는 대목에서 나오고 있다. 즉 인간은 하늘이 생성해낸 밥을 먹고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하늘에 의존해 있고(人依食而資其生成), 하늘은 반대로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조화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인간에 의존해 있다는(天依人而現其造化), 하늘과 인간의 상호협력성(天人相與) 또는 상호의존성(天人相依)을 밥 한 그릇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장일순은 이것을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해석한다. 즉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온 우주가 참여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밥 한 그릇에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밥 한 그릇
해월 선생이 일찍이 말씀하셨어요.
밥 한 그릇을 알게 되면 세상만사를 다 알게 된다고.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려면
거기에 온 우주가 참여해야 된다고.
우주 만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질 수 없어요.
밥 한 그릇이 곧 우주라는 얘기지요.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힘을 합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으니
밥 알 하나, 티끌 하나에도
대우주의 생명이 깃들어 있는 거지요.
여기에서 장일순은 밥 한 그릇은 천지인(天地人)이 공공(公共)한 산물이라는 점에서 밥 한 그릇에는 온 우주가 들어 있다고 한 뒤에, 그것을 바탕으로 밥 알 하나 티끌 하나에도 대우주의 생명이 깃들여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다. 즉 밥 한 그릇은 하늘과 인간의 상호협력 또는 상호의존이라는 ‘관계성’을 말해주기보다는, 하늘과 인간이 상호협력한 ‘결과물’임을 의미하고, 그런 점에서는 밥 한 그릇에 하늘과 인간의 생명력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흔히 “좁쌀 한 알,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로 표현되는데(이것을 편의상 ‘한알사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8, 이 ‘한알사상’은, 밥 한 그릇이 온 우주가 참여하여 만들어지듯이, 모든 존재는 설령 그것이 티끌과 같이 하찮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온 우주의 공공(公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장일순은 바로 여기에서 만물의 존엄성을 본다. 즉 장일순에게 있어서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가 어떤 의미에서는 “시우주(侍宇宙)” 또는 “시만물(侍萬物)”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우주만물의 합작품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안에 온 우주가 담겨 있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장일순의 한알사상은 일견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 있다”는 화엄적 진리와도 상통하고 있는데, 다만 그 진리를 최시형의 생명사상에서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동학적이다.
장일순의 한알사상은 한편으로는 ‘경물’과 같은 만물의 존엄성을 함축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타불이의 존재론과 비폭력 평화사상으로까지 나아가고있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9
여기에서 우리는 장일순의 사상이, 최시형의 밥사상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한알사상으로 발전시키고, 결국에는 타자와 내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존재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나’라는 생명은 온 우주의 도움을 받아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독립된 ‘나’가 아니라 ‘남’에 의존해 있는 ‘나’이고, 그런 점에서는 ‘남’이 곧 ‘나’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나와 남의 존재론적인 구분조차 사라지게 된다. 장일순은 이러한 자타불이의 사상을 바탕으로 비폭력 평화사상을 이끌어내고 있다.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악순환이 끊어진다.
상대를 죽이고 가려 하면 악순환만 초래할 뿐이다. 10
여기에서 장일순은 나와 타인을 실체적으로 구분하고,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여 ‘악’을 징벌하는 이른바 ‘정의로운’ 사회운동이 아니라, “상대와 내가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자각을 통해서 원한과 폭력의 연쇄 고리를 끊는 비폭력적 사회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해월의 밥사상에서 출발하여, 자타불이의 우주론을 거쳐, 비폭력적 평화운동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전일적(全一的) 세계관과 인간관은 대부분의 비서구지역에서는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이었다. 가령 아프리카에는 나와 타인이 상호의 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우분투사상'이 있었다.
우리 아프리카의 세계관 중에 ‘우분투’라는 것이 있다. …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들(타자)을 통해서 인간이 된다.” 우리는 인간이 되는 법을 알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만약에 다른 인간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이야기하는 법, 걷는 법, 생각하는 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분투’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것은 나의 인간성은 당신의 인간성에 어떻게 불가피하게 연루되고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나는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나는 타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재능으로 가지고 있고, 당신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재능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다른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우분투’는 관대함, 포용, 자비, 동정, 공유와 같은 영성적 속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분투’를 지닌 사람들은 배려가 있고 친절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힘을 약자를 위해 사용하지 타자를 이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즉 타자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인간으로 대우하고 친절하게 대한 것이다. 11
여기에서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설명하고 있는 우분투사상에는 장일순이 말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적 인간관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 즉 동학의 경인사상(敬人思想)이 모두 담겨 있다, 기타지마 기신에 의하면. 아프리카가 20세기에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 간의 평화적인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우분투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2 마찬가지로 장일순도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동학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장일순의 시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언론에서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저출산, 자살률, 우울증, 좌절감, 지방공동화 등은 우리 사회의 생명력이 급격하게 고갈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압축적 산업화과정에서 ‘하늘님’(생명가치)을 소홀히 한 대가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21세기적 ‘한살림운동’을 전시민적 차원에서 전개해야 하지 않을까? 죽어가는 한반도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새살림운동’을 말이다.
주석
** 이 글의 제목은 환경사회연구소 구도완 소장이 쓴 글「 한국형 생태주의 운동의 태동과 진화」『( 모심과 살림』 3호, 2014년 여름호)에서 계발을 받았다.
1) 조성환, <4차산업에 대한 일본학계의 연구 동향>, 한국동서철학회 2017년 추계학술대회 발표집 [4차산업혁명의 도래와 인문학의 대응], 2017년 11월 25일,
2) 吉川良三·日韓IT経営協会, [日本型 第4次ものづくり産業革命-経営者よ、このままで生き残れるか], 日刊工業新聞社, 2015; 長島聡, [日本型インダストリー4. 0], 日本経済新聞出版社, 2015; 山田太郎, [日本版インダストリー4.0の教科書 : IoT時代のモノづくり戦略], 日経BP社, 2016.
3) “西洋之武器, 世人無比對敵者. 武器謂之殺人機, 道德謂之活人機.”(해월신사법설, 오도지운(吾道之運))
4) “明天地之道, 達陰陽之理, 使億兆蒼生, 各得其業, 則豈非道德文明之世界乎! ”( 해월신사법설, 성인지덕화(聖人之德化))
5) “打兒卽打天矣.”(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6)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개정증보판), 녹색평론사, 2017, 69쪽.
7) “天依人, 人依食. 萬事知, 食一碗. 人依食而資其生成, 天依人而現其造化. 人之呼吸動靜屈伸衣食, 皆天主造化之力. 天人相與之機, 須臾不可離也.” (해월신사법설, 천지부모)
8) 장일순의 또 다른 호가 ‘일속자(一粟子)’였던 점을 고려하면 ‘일속사상(一粟思想)’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9) 김익록, [(무위당 장일순 잠언집)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12, 첫 페이지에 나오는 장일순의 시화.
10) 위의 책, 213쪽.
11) Desmond Tutu, God Is Not a Christian, Rider, 2011, pp.21-3쪽. 기타지마 기신, <한국·일본의 근대화와 민중사상>, 2017년 10월 20일,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50주년기념 한일국제학술대회, [한·일 전통사상의 근대화 과정과 비판적 성찰]에서 재인용.
12) 위의 논문; 기타지마 기신, <토착적 근대란 무엇인가>, [개벽신문] 58호, 201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