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국안민의 발길로 서울을 걷다]를 따라 걷는 길
- [개벽신문] 제69호, 2017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지난해 9월 2일에 수년 동안에 걸친 공사를 마치고 동대문구 신설동과 북한산 아래 우이동을 왕래하는 경전철이 개통되었다. 공사비와 수송 인원 등을 고려하여 선로의 폭이 기존의 지하철보다 좁고 2개의 차량으로 만들어져 경전철이라고 불린다. 특히 차량에 손님을 싣고 무인운전시스템으로 운행된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경전철이 개통한 이후로 나도 천도교의 수도원인 봉황각이나 천도교여성회본부 주말수련을 위해 천도교 여성교육복지관에 갈 때면 훨씬 편리하고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어 점점 발전하는 기술 문명의 덕을 맘껏 누리고 있다.
우리 천도교 교인들은 우이동에 있는 봉황각과 의창수도원을 자주 방문하여 야외시일도 보고 합동수련도 하며 주요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신설 우이경전철이 개통되기 전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대충 두 가지 방법으로 갈 수 있었다. 서울시내에서 봉황각으로 갈 때는 바로 가는 버스가 있으면 정말 다행이지만 이 또한 오랜 시간을 버스에서 참아야 다다를 수 있었다.
또한 지하철로 이동할 때는 적어도 두 차례는 갈아타야 하고 내려서 다시 버스나 택시를 타고 25분 이상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이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우이동 봉황각에 가기 위해서 수십 리 길을 걸어서 가거나 혹은 전차나 기차를 타고 나머지는 상당한 거리를 직접 두 발로 걸어야 했었다.
[보국안민 발길로 서울을 걷다](이동초 지음, 모시는사람들)에는 1920~30년대 우리의 선배 동덕(천도교인)들이 "경운동 중앙총부에서 우이동을 왕래하는 방법은 도보로 창경원->박석고개->미아리->무네미->가오리천(加五里川)->우이동 입구->봉황각에 이르는 길과 종로에서 전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내려서 다시 경의선 기차를 타고 창동역(기차표5전)에 내려 쌍갈내 주막을 거쳐 주씨산계(朱氏山界)에서 냉수를 마시고 우이동에 이르는 10리 길을 따라 이동해야 다다를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내천과 사인여천 교리를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우리 천도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이처럼 교통수단이나 소요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횟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방문하여 기도하고 수련하여 보국안민의 방안을 구상하고, 교단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하여 수많은 다짐을 하였던 장소이다. 나아가 각자의 마음의 때를 닦아내기 위해 수심정기하는 성서로운 곳이 바로 봉황각이고 의창수도원이다.
이와 같은 뜻을 다시 새겨보고 보국안민의 정신을 느끼기 위한 작은 기행을 하는 심고를 하고 우이신설 경전철을 타고 신설동역에서 출발하였다. 약 30여분 만에 마지막 역인 북한산우이역에 도착하였고 2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걸어 오르니 짙어 가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봉황각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기온과 함께 차고 비고 갈아드는 계절의 순환에 부응하기라도 하는 듯이 늦가을 찬바람이 제법 살결을 파고들었다.
봉황각은 의암 손병희 성사가 독립운동을 구상하고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481명의 천도교 전국 지부의 지도자들을 교리공부와 수련으로 보국안민의 개벽정신을 고취시켰던 곳이며, 서울에 위치한 천도교 교인들의 수련의 장(場)이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천도교 한강교구에서는 봄과 가을에 이곳 봉황각의 의창수도원에서 참석한 많은 동덕들과 함께 야외시일을 봉행하고, 의암성사 묘소를 참배한 후 모두 둘러 앉아 맛있는 찰밥과 반찬들로 점심을 먹으며 소풍의 시간을 갖는다. 많은 교인들이 이동해야 하는데 많은 비용도 들지 않고 또한 봉황각과 의창수도원에 가능하면 더 자주 교인들의 온기와 마음을 덧보태고 나아가 성심수련의 기운을 받자는 취지에서이다.
봉황각 마당을 지나 부엌이 있는 안채로 들어가면 천도교 초대 여성회장을 엮임하고 오랫동안 천도교 여성회를 이끌어 오셨던 수의당 주옥경 종법사의 사진이 걸려 있다.
자신감이 샘솟고 당당하면서 담대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지금 나에게 그런 성품과 기개를 오롯이 전달하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성회본부에서 교화부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나의 자세와 정성이 혹 초심과 달리 흐트러지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계속 불어대는 바람에 의해 흣날리는 은행잎들의 안내를 받으며 의암성사 묘소에 갔다.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준비하여 3.1운동의 주역이 되시고 뜻하신 보국안민의 덕을 행하시다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시고 병을 얻어 환원하시어 성령출세하시고 육신은 영면에 들어 계시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오늘은 이은상 시인이 쓴 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써 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펜과 종이를 꺼내 적어 내려갔다. 양쪽에서 관통하는 찬바람으로 손이 시리어 두 번 정도 햇빛을 쪼이며 손을 데운 후 마침내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대의의 횃불을 높이 드심이여,
겨레의 갈 길을 비취시도다.
큰 뜻 천추에 드리심이여,
조국의 역사와 함께 가도다’
묘소 참배 후에 시문을 읽고 적어보면서 의암성사의 삶의 궤적과 마음에 품었던 큰 뜻을 느껴보고자 의식을 집중해 보았다. 성령출세 하신 큰 스승으로서 아직은 많이 부족한 후학인 나에게 마음의 기둥을 올곧이 세워 시천주 신앙인의 자세를 잃지 않아야 그다음에 계획하는 일들과 봉사가 본래의 의도에 따라 만사여의 한다고 알려 주시는 듯하였다.
몇 걸음 아래쪽 옆에 위치하고 있는 수의당 주옥경 종법사의 묘소도 참배하고 후학의 자세로 종법사가 생전에 교단중흥과 여성회 부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그 뜻을 이어 가겠다고 다짐하였다. 여성회본부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까지 1박2일에 걸쳐 서울·경기 인근 지부 여성회원 및 일반 교인들이 모여 주말수련을 하면서 기운을 모으고 있는 천도교여성교육복지관을 찾아 잠시 심신의 휴식을 즐겼다.
다시 우이신설 경전철을 타고 신설동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종로3가역에 하차하여 낙원상가를 지나 중앙대교당으로 향했다.
"답게살겠습니다" 운동 범 종단 다짐대회가 막 시작하여 식순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다. 천도교를 비롯하여 개신교, 민족종교협의회, 불교, 원불교, 유교, 천주교의 교인들이 참석하여 중앙대교당을 가득 채우고 행사의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재계 인사들로 결집된 33인 대표들이 앞장서서 보국안민의 길을 열기 위해 3.1운동의 만세소리를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펴지게 했던 의암성사의 리더십이 뿌리를 두고 있는 바로 이곳, 중앙대교당에서.
서구문명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동시에 물질 만능주의의 폐해가 먼지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을 가려왔다. 그리고 서서히 그 부작용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침잠되어 있었기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각자의 직분과 근본을 다시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에 의하여 자유와 정의가 바르게 토대를 다지고 사인여천의 삶을 가꾸어 동귀일체의 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마를 딛는 현장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얼핏 그 형상은 달라 보이지만 내면으로 눈을 돌려보면 의암성사께서 앞장서서 노력하였던 보국안민의 깃발이 지금도 이곳 중앙대교당에서 후학들에 의해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기행경로 : 봉황각→의암 손병희 성사님 묘소→수의당 주옥경 종법사님 묘소→천도교 여성교육복지관→천도교중앙대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