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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06. 2018

삼대개벽1 - 정신개벽

다시 읽는 신인철학 64

야뢰 이돈화 지음 | https://goo.gl/vKaRhD (이돈화) 


[제1편 우주관 / 제2편 인생관 / 제3편 사회관]

제4편 개벽사상  

      제1장 종교적 사상과 금불문고불문(今不聞古不聞) 

      제2장 개벽 방식과 삼대개벽

             1. 개벽 방식 (이상 지난호) 


2. 삼대개벽1 - 정신개벽

  

수운은 ‘보국안민’  ‘포덕천하’의 사상과 아울러 먼저 개인의 정신개벽을 고조하였다. 정신개벽이라 함은 일종의 사상 개조를 의미한 말인데 "나에게서 영부를 받아[受我靈符] 사람들을 징병으로부터 건지라[濟人疾病하라"라고 한 어구에서 정신개벽을 철저히 고조한 것이다.

  

정신개벽의 의의에 대하여 심히 비근한 예로부터 생각을 돌리면, 우선 우리는 육체 행위와 정신 행위의 밀접한 관계에서 단서를 잡아 볼 수 있다. 그 예의 하나로 먼저 노동행정의 방면을 고찰하여 보면 하공(鍜工; 투구 만드는 장인)이 왼손으로 열광(熱鑛, 달궈진 쇠)을 집어서 철침(鐵砧, 모루; 철받침대) 위에 놓고 오른손으로 열광을 쳐서 제작품의 형상을 만든다. 이것은 곧 육체적 방면으로 보는 객관적 의미의 노동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공(鍜工)이 타방면에서 이와 꼭 같은 행정(行程)이 무형으로 생기게 된다. 노동하는 자의 사상과 감정과 노동품(勞動品)에 주의 등 여러 가지의 정신적 방면의 행정도 병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주관적 의미의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육체적 노동에서 주관과 객관의 양자의 결합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꿀벌[蜜蜂]은 벌집[蜂巢]을 제작함에 교묘한 공작을 한다. 그러나 꿀벌이 사람과 다른 점은 꿀벌은 오직 본능적 공작임에 반하여 사람은 육체적 공작 이전에 먼저 관념 도안(圖案)을 한다는 점이다. 즉 도안과 설계가 실제 노작(勞作)보다 앞서게 된다. 공장(工匠)은 노작하기 전에 먼전 관념적으로 한 개의 가옥을 건축하고 그 관념을 기반으로 노작 행위를 한다. 이것이 동물과 사람의 구별되는 점이다. 


유물론과 같이 환경이 정신을 낳았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이미 의식이란 것이 생긴 이상은 물질행동과 의식행동은 어디까지나 병행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만사에 모두 그러할 뿐 아니라 특히 사상 행동에 있어 더욱 그러하다. 마르크스의 선언에도 ‘만국 노동자여! 단결하라!’ 한 결론은 확실히 의식 행정의 앞서 본 말이다. 원래 대다수의 민중이라는 것은 우매하며 몰각자(沒覺者)다. 일반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자각적인 신중한 노력을 하는 것이 곤란한다. 여기서 먼저 정신개벽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대체로 우리의 의식이 환경에 의하여 생겼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환경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악한 환경의 지배에서는 악한 정신이 움직이고 선한 환경의 지배에서는 선한 정신이 움직일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정신의 선, 악을 조사하기보다는 환경의 선, 악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환경은 정신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정신은 한편으로 방사(放奢)에 타락(墮落)되고 한편으로 노예적 굴종에 타락되었다. 전자는 부(富)로 인연하여 사치로운 환경이 지어진 까닭이요, 후자는 빈핍한 관계로 복종적 굴종의 환경이 지어진 까닭이다. 


가령 여기에 두 여성이 있어 하나는 자유연애를 주장하고 하나는 열녀관을 주장한다 하면 이 두 주장 중에는 선천적 개성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 개성의 환경적 작용이 피차 서로 다른 주장을 발표케 하는 것이다. 이유가 만약 이렇다면 우리가 먼저 정신을 개벽한다는 것은 일종의 헛된 노력[徒勞] 아니겠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바깥 환경이 고쳐지기 이전에야 무슨 방법으로 환경에서 지어진 정신을 고칠 수 있겠느냐 하는 뜻이다. 


그러나 바깥 환경도 역시 사람이 고쳐 놓기 전에는 환경 스스로가 고쳐질 리는 만무하다. 사람이 환경을 개조한다는 데는 반드시 의식문제가 따라가는 것이다. 통으로 화하여 필경은 이것이 사회화되며 사상화되는 데서 처음으로 개조문제의 현판(懸板)이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개벽은 모든 개벽의 준비 행위가 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개조와 환경의 개조는 절대로 분립되어 정신개조가 끝나는 날에야 환경개조가 시작되느냐 하면 그는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정신개조에도 여러 정도가 있고 환경개조에도 여러 정도가 있다. 정신개조가 되는만큼 환경개조를 재촉하고 또한 환경개조가 되면 되는만큼 내적 정신개조를 재촉함으로써 이 양자는 서로 견인하며 포함하며 연쇄가 되어 사회개조에 나아가는 것이다. 마치 노동의 양이 커지면 커지는 만큼 생산행정(生産行程)이 커지고 생산행정이 커지면 커지는 만큼 노동의 양을 요하는 것과 같이 정신과 환경은 필경 일이면서 이요, 이이면서 일이다.

  

그런데 정신개벽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의 법칙을 요하게 된다. 하나는 사람성자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요 하나는 반항도덕(反抗道德)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성자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전편에 기술한 것과 같이 역사적 원인에 대하여 장래의 결과를 고찰하여서 냉정한 이지(理知)로써 사리의 시비곡직을 비판하여 전도(前途)의 순차를 지정하는 법이요, 반항도덕이란 것은 기성의 윤리 혹은 정치체제[政制] 안에서 그 결함을 알아가지고 감정과 의지로써 그 부자연에 대하여 반항함을 이름이니, 정신개벽에 있어 반항도덕이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많은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 신화는 사람성 중에는 근본으로 반항의지가 있는 이유를 신화로 명백히 표시하였다. ‘신이 창조한 인류의 원조 아담이 신의 계명(誡命)을 반대하고 낙원에서 지식의 열매를 훔쳐먹자[窃食] 인류에게는 죄악이 생겼다’는 신화는 사람성에는 선천적으로 반항심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원래 인류가 원시상태와 같이 지식을 배우지 않고 살았더라면 그것이 도리어 인류의 영원한 생복이 되었을는지 모르나 오늘날 와서 본다면 인류의 생활은 전부가 지식에서 나왔으므로 오늘날에는 개인의 생활에서나 민족의 생활에서나 지식은 최고의 지보(至寶)가 되었다. 


그런데 이 최고[無上]의 지보인 지식이 반항에서 생겼느냐 복종에서 생겼느냐 하면 이스라엘 신화는 이것이 반항에서 나왔다는 것을 우언적(寓言的) 신화로 표명하였다. 즉 아담이 신의 계명을 반항하고 열매를 먹은 결과가 지식을 탄생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인류에게 지식이 생긴 것이 죄일는지 선일는지 그는 별문제로 하고 어쨌든 지식이 반항에서 나온 것은 명백하다. 그는 신화에 의하여 아는 것이 아니오 역사적 사실에 의하여 더욱 증거가 명백하다.

  

인류는 원시시대로부터 자연에 반항을 시작하였다. 맹수를 퇴치하며 홍수를 다스리며 풍우상설(風雨霜雪) 등 대자연의 횡포에 대하여 방어(防禦)와 투쟁을 계속하였다. 원시사(原始史)는 인류 대 자연의 전쟁사이다. 그리하여 자연에 반항하는 일면으로 자연을 제어 이용하기에 노력하였다. 불의 발명, 구리와 쇠(銅鐵)의 발명, 농업 목축의 발달 등을 거치며 자연의 이용을 시작하였다. 


자연의 이용은 일면으로 자연에 대한 반항이다. 반항이 없는 이용이 없고 이용이 없는 반항이 없다. 농부는 곡초(穀草)를 이용하기 위하여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다. 광부는 금을 얻기 위하여 토석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용은 일면에서 반항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최초 반항은 자연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은 반항에서 생겼다.

  

자연에 반항을 개시한 인류의 반항성은 인류와 인류간에도 전개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 간에 계급이 생긴 까닭이다. 계급투쟁은 곧 인류의 반항성을 이름이다. 노예와 자유민의 투쟁, 농노와 영주의 투쟁, 평민과 봉건계급의 투쟁은 바로 사회 진전의 원동력이었는데, 반항의 결과로 모든 경험과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 


그중에도 더욱 현저한 예는 유럽에 있어서 문예부흥운동은 교권에 대한 사상적 반항운동이며, 종교개혁운동은 종교에 대한 교리적 반항운동이며, 프랑스혁명 운동은 정치적 반항운동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인류는 해방을 얻고 모든 과학적 지식과 신문화의 전개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대의 신지식이 반항에서 나온 증거이다.


어떤 시대에서든지 그 시대의 권력자의 귀에 거슬리는 지식은 그 시대의 금물이었다. 승려제도(僧侶制度) 시대와 봉건시대에 있어서는 그들의 귀에 거스르는 말과 글은 그 시대의 금물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그러할 일이다. 왜 그러냐하면 그것은 종종 기성세력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금물, 즉 금하는 지식은 또한 왕왕 신시대를 배태하는 원소가 된다. 


노자(老子)의 이른바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다[不笑非道; 不笑不足以爲道]라는 말과 같이 금치 않으면 신지식이 되지 못한다. 승려제도 시대에 금하던 지식은 반드시 봉건시대에 합리적인 말이 될 것이요, 봉건시대에 금하던 지식은 지금 시대에 합리적인 말이 될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신지식은 신시대의 원소가 된다. 지식뿐 아니라 도덕도 그러하다. 신시대에 필요한 도덕은 구시대에서 금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신도덕도 반드시 반항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는 것도 반항이요, 흰 의복을 벗고 검정 의복을 입는 것도 반항이다. 열녀관념 대신 연애신성(戀愛神聖)을 주장하는 것도 반항이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예수와 같은 사람은 극단으로 사랑을 주장한 점에서 모든 것이 복종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으나 그도 역시 시대의 반항아였다. 공자도 그러하다. 만일 그들이 그 시대의 반항자가 아니었으면 어찌하여 그들이 십자가에 나아갔으며, 진채(陳蔡)의 곤액(因厄=陳蔡之厄)을 받을 리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신시대에 요하는 신지식 신도덕은 다같이 반항도덕에서 나온 것이다. 반항은 불평이다. 불평은 평(平)과 반대이므로 한퇴지(韓退之)의 말과 같이 ‘사물은 공평하지 못하면 울게 마련[物不得其平則鳴]’이다. 물(物)이 평을 얻지 못하고도 울지 못하면 그 물은 이미 사물[死物]이며 물의 성질이 변한 자이다. 물[水]이 비탈에서 떨어지면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우주에 그러한 이치도 없거니와 있다면) 어느덧 물의 성질을 잃은 수증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있어서 사회적 결함을 알고 그의 불평에 우는 자는 그 시대의 가장 총명한 두뇌頭腦를 가진 자이며 그 시대를 먼저 밝게 본 정신개벽자이다. 


수운은 경신 사월오일에 있어서 정신개벽의 표어를 세우고 ‘나는 후천 천황씨(後天天皇氏)’라 하였다. 후천천황씨는 곧 후천의 시조라는 말이다. 정신으로서 먼저 열린 개벽자라는 말이다. 썩은 관습에서 살지 말고 새 이상과 새 주의 아래에 새 혼(魂)을 가지라는 말이다.

  

수운은 사람을 두 파로 갈라 ‘송장 사람과 종자사람’이라는 표어를 썼다. 이 말은 예수의 ‘무덤에서 일어나리라’는 말과 흡사한 점이 있다. 무덤에서 일어나리라는 말은 사람을 이미 송장으로 보고 하는 말이다. 살아 있는 북망산에서 혼을 찾아 새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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