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야뢰 이돈화 지음 | https://goo.gl/vKaRhD (이돈화)
[제2편 인생관 / 제4장 생사문제 / 제1절 종교적 의식으로 본 사후관 / 제2절 유전설로 본 사후관에 이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물질로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천성(天性)이 없다면 생물계는 곧 혼돈(混沌)을 일으키고 진화율(進化律), 도덕률(道德律) 같은 것도 유지와 성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투철한 큰 인물 혹은 대각자(大覺者)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도 능히 도덕적 규율을 준수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 생물이나 또는 보통의 인정(人情)으로 본다면 누구든지 관사여귀(觀死如歸)의 쾌락을 가졌다면 일시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세계의 성장을 도와 줄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점으로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주생활의 대법칙으로 자연이 우리에게 물려준 진품(珍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기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요 삶, 그것을 애착(愛着)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삶의 일부인 물질적 욕망의 애착으로부터 생긴 것이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공포]이다.
얼른 생각하면 죽음은 인간 최종(最終)의 공포로 알기 쉬우나 그러나 사실 세상에는 죽음 이상의 무서운 물건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극단으로 육체의 고통을 당할 때라든지, 생활에서 극도의 어려움[極人難]을 당하든지, 실연의 슬픔[悲哀]에 빠지든지, 차마 당치 못할 의분(義憤)의 감격(感激)을 받든지, 또는 체면을 유지하지 못할 수치를 당하든지 할 때에 우리는 왕왕 자살을 도모하는 것을 보면 세상에는 죽음 이상의 무서운 것이 있는 것을 넉넉히 알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요 생활의 애착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기자기한 음식의 맛이라든지, 또는 이성의 맛이라든지, 권력에서 생기는 욕망이라든지, 기타 형제, 친구, 동포의 애정이라든지 하는 세상의 맛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에게서 이러한 세상의 맛이라는 것을 다 떼어 버리고 사람이 없는 섬[無人絶島]이나 혹은 독방 감옥에서 한평생을 지내라고 한다면, 적어도 천치(天痴)가 아닌 보통인물로서는 자살을 원치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과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요, 삶 그것에 대한 애착에서 생긴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음 "2.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 방법"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