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Feb 03. 2018

평화가 오는 길

-

다함께~ "평화!"

생명평화대화마당 


어제, 연천 전곡성당에서 열린 "2018 생명평화대화마당 - 2018년 새해, 그대에서 평화를 묻습니다"에 참여하였다. 전체 약24시간(1박 2일)의 일정 가운데 겨우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함께하였지만, 울림은 컸다. 2016년에 이어, 올해도 1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평화'를 이야기하는 자리들이 마련될 예정이라고 한다.


내가 도착하여 나올 때까지 주로 진행된 프로그램은 "평화월드카페"였다. '토의와 공유'를 위한 대화방식의 하나로, 전체 참가 인원을 4모둠으로 나누고 정해진 시간 동안 모둠별 주제를 토의하고, 다음 모둠으로 "흩어져 모이기"를 통해, 짧은 시간 안에, 가급적 모든 참가자가 공평하게 발언하고,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 가기 위하여 개발된 대화/토의 방식이다. 


대화는 "평화"라는 대주제를 두고, (1)왜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하는데, 현실은 평화롭지 못한가 (2)한반도 위기와 평화의 길 (3)평화로운 세상/사회를 위하여 더해야 할 것, 빼야 할 것 (4)일상에서의 평화를 위한 길/방법 등을 모둠별로 이야기하였다. 


한 모둠별로 7~9명의 인원이 참여하였고, 25~30분 내외에 1~2회의 발언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시간 관계상 모두 3개의 모둠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필자가 첫 번째로 참여한 모둠은 "왜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하는데, 현실은 평화롭지 못한가"라는 것.


짧은 시간에 생각을 정리하여, 최대한 간단하게(3분 내외)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다들 다음 사람을 배려하며, 최대한 시간을 맞추고,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을 조리있게 다듬어 얘기하고자 애쓰는 모습 자체가 '묘한 즐거움'을 주는 대화 시간이었다.



왜 우리는 평화롭지 못한가 


첫 번째 발언을 하신 분은 "평화란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취지로 잘 말씀을 해 주셨고, 두 번째 분은 "우리 사회/나라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동학 이래의 우리 민족/국민의 수난사오 투쟁사를 간단명료하게 열거하고 "그 속에서 생존/생활에 급급한 것이 지금의 우리"라면서 그런 환경/시대배경 속에서 '평화롭기'가 어렵다는 취지로 잘 말씀해 주셨다. 모두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간명하고, 흥미롭게 말씀을 하셨다.

다음 차례에, 내가 한 말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우리 가정/공동체(단체)/사회/국가가 지금보다 평화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행동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이 열이라면, 그중 최소한 한두 개쯤은 그냥 내 안에 담아 두는 여유, 양보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압축성장 과정(앞엣분이 말한)으로 보나, 인구밀도나 고도한 경쟁상태로 보나, 우리 사회는 지금 '부대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다보니, '양보'하면 손해본다는 정서가 팽배한 것 같다. 각자가 '공동의 영역'에서 자기자신을 극대화하려하면, 포화상태에 처하게 되는 '공간(가정/공동체/사회/국가)'은 부딪침이 빈번해지고, 그러다 보면 불꽃(갈등, 상처)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것이 '불평화'를 낳는다."


미리 생각한 말은 아니었고, 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 잠시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은 동학의 각자위심(各自爲心) 이야기였으나, 그것을 나름대로 풀어서 이야기하느라고 한 것이 위의 말이다. 


그다음 사람, 대부분의 말들도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 이야기처럼 '고만고만'하였다. 결국, 평화가 오지 않는 이유는 거대한 정치적 이유보다도, 나 자신과 그 주변의 '고만고만'한 문제나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다음 모둠의 이야기는 "일상에서 평화를 얻기"라는 취지가 주제였는데, 내 순서에 나는 며칠 전 어떤 글을 읽다가 메모 해 둔,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쉰이 되니 바뀌어야 할 것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라는 글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내 앞에 이야기하신 분들의 말씀이 "내려놓기"라는 단어로 대변할 수 있는 이야기라서, 언뜻 메모해 둔 위의 글이 떠올라, 핸폰을 꺼내서 그 글을 읽었다. 역시 모두들 공감하는 분위기였고, 그다음 차례의 분들도, 왜 그 '내려놓기'가 어려운지 이야기하거나,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내려놓기 방법을 이야기하거나, 자기 생활 속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내려놓기'의 효능/중요성을 맛깔나게, 재미지게 이야기해 주어서, 웃음이 터지곤 했다. 


(세 번째 모둠은 '한반도 위기와 평화의 길'이 주제였는데, 남북 관계, 북미관계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 얘기가 나름대로 진지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간에 내가 한 얘기는 다음에 ...)


내려놓음과 지혜베풂

전곡성당에서 바라보는 일몰

평화를 위한 '내려놓음'의 의미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동학(천도교)에서 이에 해당하는 글귀 하나를 꼽는다면 "남의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고, 내 마음의 작은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내 (작은)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되새긴다. '지혜를 베풂'이 자칫 '꼰대짓'이나 '훈장질'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해서) 하고/해주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참는 것"이 평화의 지름길이라고 한 말이 여기에 이어진다. '남의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려면 "내려놓음"이 필요하고, "내 마음의 작은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길도, "내려놓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기" "있는 그대로 너를 바라보기"란 말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공자님의 "내가 하가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欲 , 勿施於人, 논어, 안연편, 2장)"는 말씀이나 성경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말씀이야말로, '내 마음의 작은 지혜를 베풀기'에 값하는 행동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평화를 얻는것/누리는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터. 공자님은 이 말씀이 종신(終身; 죽을 때까지)토록 지켜가야 할 덕목이라 하였고, 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였다. 


역시 동학(천도교) 경전 곳곳에 이에 관한 말씀들이 있으나, 특히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편은 '지혜베풂'에 대한 종합해설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한 말씀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일이 있으면 사리를 가리어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 말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심술에 가장 해로우니라." 

매거진의 이전글 동학의 공부법 (번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