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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30.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15)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제6절 한울과 무궁아(無窮我=無窮과 無窮我)


1. 의심[疑]

  

"큰 의심이 있어야 큰 깨달음이 있다[大疑之下有大覺]"라는 말도 있거니와 의심이란 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도정(途程)에서 가장 먼저 앞서는 척후대이다.

어째서 이러한 우주가 있느냐?  어째서 이러한 인생이 있게 되었느냐? 왜 이러한 물건이 존재하느냐 하는 의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도정에서 가장 먼저 생겨나는[發生] 지력(知力)의 표현이다. 이것이 인간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제1조건이다.


세상에 모든 존재와 모든 개념은 이 의심을 해결하는 기록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의심은 새로운 진리를 창작하며 새로운 인생을 만들며 새로운 사업을 도모하게 하는 선구가 된다. 그러므로 수운은 대각(大覺)의 처음에 "나 또한 그것이 그런가, 어찌 그것이 그런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吾亦有其然豈其然之疑]" 하는 의심으로서 모든 진리를 탐구하였다.


2.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勿疑勿疑]


'의심[疑]'이 다만 의심만으로 존재하는 한에는 그것은 아무 해결을 얻지 못하는 회의론자(懷疑家)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회의에서 나서 회의에 죽는 데 그치고 만다. 문제만 걸어놓고 답안을 얻지 못한 낙제자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심을 의심하기 위하여 의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요 의심으로부터 의심을 해결하고자 하여 생기는 인간 본래의 심성이다. 의심을 해결하는 곳에 어떤 자각이 생기고 어떤 진리를 파악하게 되고 어떤 실행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의심은 의심에서 어떤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요, 의심으로부터 '의심하지 아니함[勿疑]'이 생긴 뒤에야 처음으로 '의심'의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운은 대각에 이르자 "말하기를,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曰勿疑勿疑'"라는 단안(斷案)으로서 진리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3. 의심하지 않음[勿疑]과 자아의 존재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勿疑勿疑]'는 곧 진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면, 여기에 먼저 생각할 문제는 진리 표준의 선택 문제일 것이다. 즉 진리의 표준을 '물의 물의'할 만한 사실로부터 단안을 세워야 될 것이다.

그렇다 하면 우선 이 세상의 많은 사리(事理) 가운데 어떤 것이 제일 의심할 수 없는 존재가 될까? 즉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존재는 무엇일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자아(自我)'의 존재가 그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모든 이치가 다 의심할 만하고 모든 사실이 다 의심될 만하다 할지라도 자아의 존재는 도저히 의심할만한 사실이 되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만일 우리가 '자아의 존재'를 의심한다 하면 그것은 의심이 발생된 본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의심으로써 의심을 의심하는 것이니, 여기서 근본으로 의심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모든 문제가 없어지고(滅却) 말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설사 자아 그 자체는 의심한다 한지라도 '자아의 존재'는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바꾸어 말[換言]하면 자아의 존재를 의심하고는 모든 표준이 서지 못할 것이다.


'자아의 존재'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의 표준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의 표준은 '의심하지 못함'[勿疑]에 있고 '의심하지 못할 것'은 '자아의 존재'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아의 존재는 바로 진리의 표준임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운은 대각의 처음에 있어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게 한다 [敎人爲我則令汝長生]"고 하였고 "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니니라 [不知道之所在 我爲我而非他]"라 하였고 "내가 나 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이에 계시고 [我思我則父母在玆]"라고 하였다. '나를 위함 [爲我]' '내가 나를 위함 [我爲我]''내가 나 된 것을 생각함 [我思我] 등은 모두 진리*의 표준을 자아의 존재에서 증명함이 명백한 것이다.


* [편역자 미주 1] 서양 중세철학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진리는 "존재와 사유의 일치"로 정의된다. 생각한 것을 바로 존재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중세철학에서의 신은 진리 자체로 사유될 수 있었다.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정의에서 강조점을 존재에 두느냐 아니면 사유에 드느냐에 따라 상이한 진리 개념이 가능해진다. 존재에 강조점을 두면 존재에 부합되는 사유를 생산해야만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사유에 강조점을 두면 존재를 사유에 입각해서 개조해야만 진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타자에 입각한 사유와 자아에 입각한 사유, 혹은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간극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강신주, "철학 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것", (주)그린비출판사, 2010, 908쪽.] 이에 따르면 야뢰는 진리의 기준을 자아에 입각하여 사유하는 쪽에 속한다. 


(다음 '4. 진리의 표준과 자아의 인식'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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