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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0. 2018

삼대개벽3-사회개벽

다시 읽는 신인철학 - 66

야뢰 이돈화 지음 | https://goo.gl/vKaRhD (이돈화) 


[제1편 우주관 / 제2편 인생관 / 제3편 사회관]

제4편 개벽사상 

          제1장 종교적 사상과 금불문고불문(今不聞古不聞)   

        제2장 개벽 방식과 삼대개벽  

              1. 개벽 방식

              2. 삼대개벽1 - 정신개벽 

              3. 삼대개벽2 - 민족개벽 (이상 지난호)


4. 사회개벽

  

현대에 와서 사회의 이상을 논하는 자는 유물론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격렬히, 가장 조직적으로, 또 가장 이론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사회개조의 이론을 말하고자 하면 세부득이 유물론적 사회주의의 이상을 대상으로 하고 논리하여 수운주의의 사회개벽사상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는데, 이 점에 대하여는 우리가 자유로 이를 토론하고 연구[討究]할 처지가 못 되므로 개괄적으로 두어 가지 의문점을 들어 유물적 사회주의사상과 수운주의의 차이점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 절의 의의를 삼고자 한다.


유물론에서의 이상사회론  


사회주의적 입장으로 가장 현저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보다 좋은 세계를 이상하는 광범위한 계급적 민중운동의 단결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다 좋은 세계는 오직 유일무이한 경제문제의 해결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경제문제를 대상으로 여기에 유물사관적 이론도 세우고 철학도 세웠으며 방법과 조직도 세웠다. 현대에 그만치 이론과 방법이 명백한 것은 다른 곳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이 경탄을 마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은 그 생활의 근본방침에서 경제를 토대로 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경제문제의 해결로 많은 사람이 그만치 행복하게 되리라는 것은 상식으로서 누구나 이를 시인할 수 있다. 수운주의에 있어서도 이 점을 충분히 승인하리라고 믿는다. 수운주의에 있어서도 보다 좋은 세계를 이상(理想)하는 데는 사회주의에 못지 않을 것이며 또한 만인에게 경제적 풍부를 다하여 주고자 하는 희망도 사회주의에 못지 아니하다. 


다만 수운주의에서 고려하는 점, 즉 사회주의 이론과 차이되는 점은 유물적 경제문제에 있지 아니하고 인간격 중심 문제에 있다. 사회주의의 중심 문제는 경제로 최고 이상을 삼는 데 대하여 수운주의의 중심은 인간격으로 최고의 이상을 삼는 것이다. 경제문제는 인간격 생활에 대한 한 단계적 문제요 한 국부적 문제이다. 인간격 중심주의의 문제는 인간 이상의 최고 우주 생활의 표현이라고 수운주의는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운주의의 이상으로 말하면 인간이 아직도 의식주의 생활로서 최고의 투쟁을 삼는 것은 인간의 체면상 유치한 일이며 아직도 비열한 동기로부터 완전히 해탈하지 못한 정도에 있다. 


물론 금일의 경우로 본다면 의식주에 얽매인 민중이 여기에서 해방을 얻고자 하는 운동은 당연 이상으로 당연한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는 기타 최고의 인간격을 발휘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진화과정상 어떤 단계에만 해당하는 문제요 인간격의 영원한 이상으로 본다면 의식주의 투쟁이 인간의 최종목적이 아니요 최종 이상은 창조투쟁(創造鬪爭), 즉 최고 인간격으로부터 우주생활을 실현하는 데 있다는 것이 수운주의 이상이다.  


대개 마르크스를 신봉하는 이들의 이론은 경제문제가 해결되는 날이면 인생 생활의 최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며 저들의 바라는 이상세계도 그 한 조건으로서 여지없이 실현되리라 믿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진실한 이상세계는 다만 유물적 경제문제의 해결만에 있지 아니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곳에 인간 최고의 이상이 숨어 있으[伏在]리라고 생각한다. 경제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고 가정하고 나서 우리의 생각은 어떤 방면으로 취하게 될까?

  

성신쌍전이라야 완전한 이상 성취


첫째, 진화에 대한 생각이다. 다만 경제문제로서만 세상문제가 다 종결된다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다음날 새벽에는 다시 진화의 과정이 그것에 그치고 말것인가? 토대가 되는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따라서 기초가 다 고쳐지고 또는 상부구조도 자연의 세에 의하여 고쳐질 것인즉 다음에 해결될 문제는 타력적(惰力的)인 자연 취세(就勢)의 발전이 어느 정도까지 있을 뿐이요, 변증법적으로 생기는 사회진화는 이에서 멈추고 말 것인즉 그 이후의 사회는 세부득이 고정불변의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아닌가 한다. 


만약 우리가 영구한 사회진화를 시인한다면 경제문제 해결 이후의 사회도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진화할 것인즉 그때의 진화는 유물적이라 하기보다는 도리어 정신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성의 심실(深實)한 요구로부터 일어나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현대에서 보면 지금 무엇보다도 경제 해방이 지급문제인 까닭에 여타문제를 심각히 생각할 여유도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여타문제를 배제 혹은 무시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의 구극(究極)을 요한다면 인간격으로 보아서 경제문제 이외에 다시 인간격 발휘라는 고차원의 문제가 얼마든지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수운주의는 이 점을 중심으로 한 까닭에 성신쌍전(性身雙全)이라야 완전한 이상이 될 줄로 안다.

  

둘째는 투쟁성의 해결이다. 인간성의 본능에는 투쟁의 습성이 한편에 들어 있다. 성악설은 이 점에서 한 진리가 된다. 인간은 여러 방면으로 투쟁을 좋아한다. 인간의 역사는 한 면에서 투쟁의 역사이다. 오십만년이라는 긴 세월 사이에 투쟁의 습성을 길러 왔다. 그를 선천적이라 보지 않는 성선론자일지라도 이만큼 긴 습성을 인성 고유의 품부(品賦)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인류의 투쟁성은 혹은 정면으로 혹은 간접으로 각 시대를 따라 각양각색의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근대에 와서는 대표적인 자본주의 문명이 인류의 이 호쟁적(好爭的) 본능의 분화구를 발견하는데 좋은 매개를 제공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자본주의적 호전성을 제거하는 날이면 인류의 투쟁성은 거기서 그자취가 끊어지고 말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설사 경제문제의 해결로서 현대인의 호전적 구실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인류의 이 호전성의 본능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시 그 출구를 구하여 마지 아니 할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그때에 있어 인류의 투쟁성은 어느 방면으로 머리를 돌리게 될까? 


유물사관은 과거 역사를 순전히 계급투쟁의 역사로 변증(辨證)하는 점에서 더욱이 인류의 영원한 투쟁성을 부인하기 불능한즉 그 영원의 투쟁성은 유물적 계급투쟁이 끝나는 날 다시 어떠한 출구를 찾아 나아갈까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만약 강력히 그 해답을 요구한다면 두 가지의 방면이 있으리라 상상이 된다. 하나는 기술적 투쟁, 하나는 진리의 투쟁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즉 소유투쟁에서 창조투쟁으로 옮겨지리라 본다. 그리하여 이 창조투쟁은 과학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요 과학으로부터 다시 순류(順流)하여 진실한 의미의 철학, 종교, 예술, 도덕 다시 말하면 최고 인간격 발휘에 노력하는 투쟁이 되지 아니치 못하리라 상상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때야말로 인간이 참된 인간다운 투쟁의 영역에 들어섰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동물적 투쟁에서 인간격의 투쟁으로 나아간 인간적 행위인 것이라 한다.


이상에 말한 두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해 말하면 사람성무궁에 대한 욕구를 이름이니, 유물론의 조(祖) 포이에르 바하의 말과 같이 "사람성(性)이 무궁자(無窮者)인 신(神)을 창조하게 된 것은 사람성의 본질이 본래 무궁한 까닭이다. 만일 사람성의 본질에 무궁이 없다 하면 우리는 무엇으로 무궁자인 신을 연상할 수 있을까?" 한 것은 바로 사람성 무궁의 욕구를 가리킨 말이다. 


사람성에 이미 무궁의 욕구가 있을 것 같으면 우리가 어떻게 진화와 창조를 제한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공동생활의 참된 역할은 ‘학(學)’하는 것 ‘발견’하는 것, ‘지(知)’하는 것이다. 마시고[飮], 먹고[食], 잠자는[眠] 생활은 한마디로 말하면 다만 부속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와 야수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지식은 종국의 목표이다. 만일 여기에 야수의 무리와 같이 다만 배를 채우는, 물질적으로만 행복한 사람과 빈궁히 지내면서도 영원한 진리를 터득한 사람, 두 사람 중 어느 것을 취하겠느냐 하면 나는 후자를 선택코자 한다" 하였다. 


이것은 물론 극단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좌우간 우리에게 무궁한 욕구를 부인치 못한다면 유물론의 이론은 너무도 형식적이요 너무도 국한적이다. 게다가 너무도 단정적이다. 그만한 것으로서 ‘우주는 이것이다.’ 단정하고 그것만이 우주 전체 진리라 믿는 것은 이 우주와 인생의 무궁성을 한정짓는 것이니 이것이 유물론이 수운주의보다 심히 편협한 지위에 처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물적 사회 이상은 오직 한 가지의 외적인 물질적 조건으로만 사회개혁의 이상을 삼았으나 수운주의의 사회개벽은 인간격 중심주의 아래서 경제적 해방을 시인하며 나아가 최고인간격의 발휘로 인간을 모든 비열한 동기로부터 해방하는 곳에 진정한 이상적 사회가 출현될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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