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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1. 2018

시간의 역사 VS. 생명의 거대사

[빅 히스토리-생명의 거대사] 읽기 (6)

아래 글은 최민자 교수의 [빅 히스토리 -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모시는사람들)의 본문 중 일부입니다. 


필자(최민자)가 말하는 "생명의 거대사-빅히스토리"는 상호 연관된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시간의 역사-빅히스토리"와 대별된다.


첫째, 


"시간의 역사"는 우주만물이 홀로그램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 장(場)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선택을 통한 ‘양자 지우개 효과(quantum eraser effect)’*에 대해 통찰하지 못한 채 단지 일어난 일들에 대해 기술하고 설명할 뿐이다. 

* ‘양자 지우개 효과’란 현재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꿀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나중에 일어난 일이 과거에 입자가 행동한 방식을 변화시킬(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생명의 거대사"는 의식계[본체계]와 물질계[현상계]의 상호 관통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이 우주의 진행 방향인 영적 진화와 조응해 있으며, 이기심에 기초하지 않은 ‘비범한 의식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적 선택을 통해 양자적 가능성(quantum possibility)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비범한 의식 상태’(nonordinary state of consciousness)란 옳음과 그름의 생각 너머에서 주관적인 판단 없이 상황을 인식하고 선택한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계는 에너지 시스템이며 이러한 ‘비범한 의식 상태’에서는 과학계에서 ‘양자 도약(quantum leap)’이라고 일컫는 에너지의 이동을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양자적 가능성은 현실화될 수 있다. 마치 전자가 공간 이동 없이도 특정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에너지 준위로 뛰어 오르듯, 우리 자신이 다른 의식 상태로 뛰어오름으로써 양자적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둘째, 


"시간의 역사"는 마치 달과 달그림자를 분리시키듯 생명의 본체와 작용을 이원화시킴으로써 신과 인간, 영성과 물성, 삶과 죽음의 역동적 통일성에 주목하지 못하는 관계로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을 파악하기 어렵다. 


반면, "생명의 거대"는 통섭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생명의 본체와 작용의 관계적 본질을 직시함으로써 시간의 역사를 만든 원천을 이해하게 하고 시간의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시간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한다.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미명하에 영성을 배제함으로써 생명 현상을 이해하지도, 상대계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도 못한 채 실제 삶과는 무관한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치달으며 공허한 설(說)만 난무하는 근대 학문세계의 연장선상에서는 결코 생명에 대한 거대사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근대과학의 비약적인 발달로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이 전 지구적으로 횡행하면서 진리의 몸은 종교의 성벽 속에 가둬지고 학문세계는 그 껍데기를 골동품처럼 전시하며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경험된 것만이 사실이라고 강변하는 학문적 불구(不具) 현상이 만연한 오늘날에는 특히 그러하다. 크리스천의 ‘빅 히스토리’가 진정한 의미에서거대사가 될 수 없는 것은 본체인 동시에 작용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관계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시간의 역사"는 주체와 대상(객체)으로 분리된 세계의 역사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상호 제약적인 관계 속에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행위의 자유가 보장되기 어렵다.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에 따르면 인간 행위의 자유란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 여부와 자신의 행동이 적합한(타당한) 원인에 기인하는 것인지 여부의 문제와 관계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의식하지만 그 행위를 결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유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무력으로 응징하려는 것이나, 극단주의 세력의 충동적인 언행 등이 정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결정이란 한갓 충동에 지나지 않으며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으므로 능동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반면, "생명의 거대사"는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조화성과 통일성에 기초해 있으므로 외부의 힘에 의해 농단(壟斷)되지 않고 자신의 본성과 힘을 발휘하여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자가 될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주체가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주체로 향하게 함으로써 인식 주체의 능동성과 자율성이 발휘될 수 있게 한다.


넷째


"시간의 역사"는 구석기시대 문명에서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문명으로 점진적인 단계를 밟아 역사가 진행한다는 단선적인 사회발전 단계이론의 관점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찰스 햅굿(Charles H. Hapgood)은 그의 저서 [고대 해양왕의 지도 Maps of the Ancient Sea Kings]에서 “전 세계적인 고대 문명, 혹은 상당한 기간 동안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했음이 틀림없는 문명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상당히 풍부하다”고 결론내리며 이러한 단선적인 사회발전 단계이론은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대 지도가 제시하는 증거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된 수준의 전 세계적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에도 원시 문명이 최첨단 문명과 공존하는 현상을 모든 대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역사는 고대 과학의 위대한 전통을 기반으로 역사상 실재했던 진보된 문명, 그 ‘사라진 문명(a civilization that vanished)’에 대한 주장이나 그런 증거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생명의 거대사"는 생명의 순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쇠운(衰運)과 성운(盛運)이 교체하는 역학적 순환사관(易學的 循環史觀)에 입각해 있는 까닭에 단선적인 사회발전 단계이론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의 견지에서 세계 역사를 조망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본문 74-77쪽)


(중략)


생명의 거대사는 영성과 물성의 역동적 통일성에 기초한 생명의 순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역학적(易學的) 순환사관에 입각해 있으며 통섭적 사고의 긴요성을 강조한다. 


서양의 발전론이―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보듯―의식의 진화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직선적인(linear) 변증법적 발전 방식을 기용한 것이라면, 동양의 순환론은 의식의 진화과정을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천지운행의 원리에 조응하는 순환적인(circular) 변증법적 발전 방식을 기용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서양의 직선적 발전론과는 달리, 동양의 순환적 발전론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서양의 분석적인 사고방식이 사물과 사람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며 형식논리나 규칙을 사용하여 추리한다면, 동양의 종합적인 사고방식은 부분보다는 전체에 주의를 더 기울이며 사물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파악한다. 그럼에도 동양의 순환론과 서양의 발전론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종국 지점은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함축한 이상사회의 구현이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의 만남에서 보듯 우리가 처한 문명의 시간대는 서양의 분석적 사고방식과 동양의 종합적 사고방식의 접합을 요구한다. 생명의 거대사는 통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물성과 영성, 시공과 초시공을 관통하며 티끌 속에서 티끌 없는 곳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새로운 우주론에서 우주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의식의 그물망’이다. 양자파동함수(quantum wave function)의 붕괴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의식이며, 이는 ‘본질적 삶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통제하는 주체가 심판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임을 의미한다. 


“우리 세계와 우리 삶과 우리 몸은 양자적 가능성(quantum possibility)의 세계에서 선택된 그대로이다. 우리가 세계나 삶이나 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새로운 방식으로 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양자적 가능성 중 오직 하나만이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이 된다.” 


세계든 삶이든 몸이든 우리가 인지하는 방식이 물리적 현실에 강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정신 능력의 ‘형태형성장’은 그것과 상호 작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힘이 강력해져서 결국에는 물리적인 실체 자체의 모습을 변형시킨다고 루퍼트 셸드레이크는 말한다. 이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공명현상(共鳴現象)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인류의 의식이 시공의 인큐베이터를 제거할 때가 되었다. (본문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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