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무궁이라는 관념을 공간상으로 생각할 때는 양적으로 표시되고 시간상으로 생각할 때는 질적으로 표시되는 것이다. 전자는 차별상의 총체를 포괄할 때의 생각이요 후자는 보편상의 내적 연속을 생각함이니 이것이 우주라는 개념으로 성립하게 된다.
'우(宇)'는 상하사방을 말하므로 공간의 개념이라 할 수 있고, '주(宙)'는 왕고래금(往古來今)을 말하므로 시간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근본에서 두 가지 개념이 아니요 유일의 직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유일의 직각이 개념화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두 개[兩個]의 개념으로 분립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이 우주의 발전을 생각할 때 시간상으로 전 우주의 과정을 개념 할 때에는 그것이 은연중 공간상 전우주의 배치(排置)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개의 나무의 공간상 양을 측량한 총결과는 은연중 시간상 총 과정을 측량한 바와 다름이 없고, 그와 반대로 시간상 총 과정을 연상한 총결과는 은연중 공간상 총공적(總空積)을 헤아릴 수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할 수 있다. 일개인의 연령을 계산한 결과는 그 개인 신체의 소장노(少壯老) 관계를 측정할 수 있음과 같이 전우주의 양적 배치는 곧 전우주의 질적 진화인 시간상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므로 시간과 공간은 필경은 동일한 개념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시공(時空)에 대한 직각적 관념은 지기생명(至氣生命)의 발작적 과정으로서 유일절대의 지기적 생명이 시간적으로 자율적 창조 연속의 과정과 동시에 공간적 우주가 성립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의 개념은 지기적 생명의 발작이라 하는 데서 범신관적(汎神觀的) 학설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범신관은 만유(萬有)를 평등의 위에 두고 평등 만유의 내재적 활동을 곧 신(神)으로 보는 것이므로 신은 만유인 신에서 삼계(三界)를 통하여 평등일여(平等一如)한 영적 독립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인내천(人乃天)에 대한 한울님의 관성이 이(汎神)와 다른 점은 무엇이냐 하면 인내천의 '한울'은 신을 만유의 평등적 내용으로 보지 아니하고 만유 그 자체의 성장으로 보는 것이다. 자세히 말[詳言]하면 지기적 생명은 그 소성(素性)에서 인력소(引力素)와 충동소(衝動素)와 의식소(意識素)의 삼작용(三作用)을 부화(賦化)한 자로서 그것인 물질의 과정에 있어서는 인력소로 표현되고 동물에 과정에 있어서는 충동소로 표현되고 인간의 과정에 있어서는 의식소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는 법이다.
그런데 지기적 생명에 본래 이 삼대 요소가 삼원으로 각각 근본이 다른 체(體)가 별립(別立)하여 있다는 것이 아니요, 지기적생명의 유일한 자율적 창조력이 그 진화의 단계에서 처음은 인력소로 표시되었고 다음은 충동소로 전환되었고 다음은 의식소로 변화되었다 함이다. 그리하여 지기적 생명이 이와 같이 단계를 따라 변화되는 최초의 계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자율적 창조의 조직 변화에 관계되어 있다 할 수 있다.
조직의 변화는 곧 지기적 생명의 창조 과정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지기적 생명은 그 창조의 과정에서 궁극적[究竟] 의식소의 표현을 얻었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기적 생명이 의식소를 탄생케 함에 있어 처음으로 자기 관조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지기적 생명의 자기 관조는 이것이 인내천의 시초이니 즉 '한울' 관념의 탄생시초이다. 이와 같이 무궁은 한울을 탄생케 된 것이다.
지기적 생명이 인력소에 있어서는 순전히 단순한 거력(拒力)과 흡력(吸力)의 표현으로 일종 장율적 이법(理法)의 지배하에서 진행되었고 그가 동물계에 있어서는 충동으로서 진화의 과정을 지어가면서 장래할 의식의 기초를 준비함에 지나지 않다가, 일약(一躍)하여 의식소로 변화한 뒤에는 그제야 내가 생명이로다 내가 사람이로다 하는 자기관조가 생겼고 자기관조에 의하여 지기적 생명이 자체의 무한과정을 회고(回顧)할 때에 처음으로 '한울'의 관념이 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이라 하며 '한울님'이라 하는 대상체(對象體)는 필경 지기적 생명의 자기관조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인내천의 신은 이와같이 노력과 진화와 자기 관조로부터 생긴 신인 고로 인내천의 신은 만유평등의 내재적 신이 되는 동시에 인간성에서 신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의 원천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오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개 수목의 전적 작용을 찾고자 할 때에 옛날 사람은 흔히 나무의 뿌리를 예거(例擧)하였다. 그러나 나무의 전체 원리는 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는 다만 근본의 힘을 지지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요, 그 실은 나무 전체의 원리는 오직 과실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실은 수목의 어느 부분보다 가장 뒤에 생긴다. 이와 동일한 이유로 우주 전체의 원리는 인간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단계보다 가장 뒤에 이루어진 사람에게 있다. 인간은 우주의 과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울'을 전적이며 완전이라 하고 한울의 근본원리를 우주의 어느 부분에서 찾아보려고 한다면 인간의 밖에서 찾는 것보다 인간의 안에서 찾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할 수 있다. 즉 한울은 인력소에서 찾느냐보다 또는 충동소에서 찾느니보다 의식소에서 찾는 것이 적당하다는 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의식소는 비교적 생명의 자기관조를 효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7. 한울과 무궁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