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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04.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18)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7. 한울과 무궁아(無窮我, 무궁한 나)


이와 같이 사람성(性) 중에 직각적(直覺的) 무궁의 관념이 발동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무궁의 관념은 지기적 생명의 자기관조에서 나왔다는 것은 바로 사람성이 무궁한 까닭이니, 즉 무궁자인 '한울님'이 사람성으로 발동하는 것이다.

  

이상에 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인식의 총량을 그 원천에서 직각이라 이름하고 현상에서 개념이라는 양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본다면, 자아 중에는 스스로 두 개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즉, 하나는 직각의 아(我, 나), 다른 하나는 개념의 아(我, 나)일 것이다. 전자는 직각으로 파악되는 자아이며 후자는 개념으로 파악되는 자아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자아 중에서 하나는 무궁의 나[我]로 표시되고 하나는 찰나적 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통상으로 우리가 자아라 부르는 개성은 순수한 개념으로 지어 놓은 현상의 나를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신(神)이라 하며, 범신(凡神)이라 하며, 영(靈) 혹은 불(佛)이라 이름한 형이상(形而上)의 칭호(稱號)는 직각으로 얻은 무궁을 가리켜 이르는 말인데 '무궁아'는 생명의 자기관조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원래 개념으로 구성한 자아란 것은 죽음으로서 그 종결을 마칠 뿐 아니라 살아생전에 있어서도 해를 따라 변하며 달을 따라 고쳐지며 시각을 따라 변천무상(變遷無常)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에서 주관과 객관의 가화합(假化合)에서 생긴 것이므로 주관의 변천과 객관의 환경에 따라 수시수처(隨時隋處)에 개변무상(改變無常)할 것은 상식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념아를 파악하고 여기서 인생의 진의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수중의 달을 손으로 잡고자[捕捉] 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 고정불변하는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와 이슬의 혜택

그러나 우리의 이른바 무궁한 나라는 것은 또한 현상의 나[現像我]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요 찰나찰나로 변하는 중에 있는 현상의 나를 관통하여서만 무궁한 나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말하면 작년의 나[昨年我]와 금년의 나[今年我]를 통하여 유일한 통일적 나[統一我]를 찾을 수 있으며, 청년의 나[靑年我]와 장년의 나[壯年我]와 노년의 나[老年我]를 통하여 일생의 나[一生我]가 있게 되는 것과 같이 무궁한 나[無窮我]는 오직 과거인(過去人) 현재인(現在人) 미래인(未來人)을 통하여서만 무궁으로 흘러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궁아의 존재의 발견은 사람성의 직각(直覺)에서 생긴 것이니 한울님의 존재는 우주생활 중 인간격(人間格)의 단계(인생관을 참조)에서만 발견된 것이라 볼 수 있고, 그리하여 한울님은 인간격에서 처음으로 속성(屬性)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제2편 인생관"으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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