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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02. 2018

전라남도 동학 동학농민혁명

전라남도 편 (1) <종합>

채 길 순 | 명지전문대학교 교수 [개벽신문] 71호, 2018년 1/2월 합병호


전라남도 지역 동학농민혁명 활동은 초기와 후기, 그리고 몇 권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초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세 규합을 위해 활동했던 영광

흥덕 무장 함평 나주 장성 지역의 동학농민군 투쟁 양상과 집강소 시기 활동 

②2차 봉기 때 전라 남부 해안지역 방어 임무와 함께 군수 물자 조달 임무를 맡은

손화중 최경선 부대의 광주 화순 고창 나주 권역의 동학농민군 투쟁 활동 

③ 김인배가 이끄는 전라 경상 해안 지역인 여수 순천 낙안 광양 하동 진주를 중심으

로 전개된 ‘영회대도소의 투쟁 활동’ 

④ 영암 장흥 해남 진도 지역의 동학활동 

⑤토벌 시기에 나주를 중심으로 해안 지역에서 자행된 동학농민군 대학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도 : 전라남도 동학농민혁명 권역 별 활동과 지도자 분포



동학농민군 주력, 파죽지세로 관아를 점령하며 전라남도 지역으로 남하


1894년 3월 21일,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전라도 동학지도자들이 무장에서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포고문을 선포하고 봉기의 횃불을 올렸다. 이들은 단숨에 고부 관아 등 인근 고을 관아를 들이쳐 무장하고 세를 규합하여 백산으로 이동하고, 진을 구축하여 ‘백산대회’를 열어 전봉준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전라감영에서 감영군을 출동시키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백산 진지를 떠나 거짓 후퇴하는 척 물러나 정읍 황토재에 진을 구축한다. 4월 7일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하고, 단숨에 정읍을 비롯한 인근 고을 관아를 점령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전력 보강을 위해 전라남도 지역으로 내려와 영광 흥덕 무장 함평 관아를 연달아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아 군량을 확보하면서 군세를 확장해나갔다. 이런 사태를 보고 받은 감영과 조정에서는 다급해졌다. 감영군을 급파하고,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 홍계훈을 토벌대장으로 삼아 중앙군을 급히 전주로 파견했다.



장성 전투에서 경군 격퇴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군세를 확장하기 위해 남하하면서 뒤따르는 경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전봉준 주력부대는 갑자기 머리를 동쪽 방향으로 돌려 장성을 향한다. 동학농민군은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이학승이 이끄는 중앙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이어 전봉준 동학농민군은 장성 갈재를 넘어 전주감영으로 향하게 된다.



원평대회를 열어 임금의 사자 처형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장성 갈재를 넘어 4월 25일 원평으로 들어왔다.

원평은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손화중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던 곳으로, 원평대장소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때 홍계훈이 보낸 이효응과 배은환이 임금이 편지를 들고 대장소를 찾아왔으며, 여기에 이주호는 하인 2명을 데리고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내려 보낸 돈) 1만 냥을 들고 찾아왔다. 전봉준은 임금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고, 내탕금을 빼앗았다. 전봉준은 원평장터에서 군중을 모아놓고 이들을 목 베어 죽이고, 시체를 마을 뒤에 버렸다. 또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문건도 그들의 시체 위에 던져버렸다. 이는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이려 한 것이다. 이제 감영군과 중앙군을 차례로 격파했고, 임금이 보낸 사자를 참수하고 내탕금마저 빼앗았으니 돌아갈 다리를 끊어버린 비장한 투쟁이자 최후의 선택이었다.



전주성 무혈입성과 전주화약 체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 했으나 다음날부터 전주성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전봉준은 이들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명실 공히 전주감영을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청군을 불러들였고, 이를 구실로 일본군이 들어와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라가 전쟁터가 되었다.

다급해진 조선 정부는 화약을 서둘게 된다.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전라감사 김학진과 집강소 설치를 약속하고 전주화약을 맺게 된다. 전봉준의 발길이 닿는 전라도 모든 고을에 집강소가 조직되었고, 체계를 잡아나갔는데, 특히 원평에 총본부격인 대도소를 설치했다. 이렇게 전라 전 지역이 동학농민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전라남도의 나주 운봉 두 고을 관아는 동학농민군이 끝내 접수하지 못했고, 집강소도 설치하지 못했다.



9월 재기포로 다시 전면전에 나서


평양전투에서 청나라 군사를 국경 밖으로 몰아낸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조선 침략에 나서게 된다. 경복궁 침탈 사건이 일어났고,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관 일본군이 동학교도 탄압에 나서게 되자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은 9월 18일 재기포를 선언한다.


  전봉준은 호남의 동학농민군을 삼례에 집결시켰고, 호서 경기 영남의 동학농민군은 보은 장내리에 집결하게 된다.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의 동학농민군과 손병희 통령이 인솔하는 호서의 동학농민군이 논산 소토산에서 합류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공주성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에 전라남도 지역 동학농민군 투쟁 활동은 대략 세 양상으로 나타난다. 전봉준의 주력 동학농민군에 합류하거나, 지역을 방어하면서 전봉준 주력부대의 군수를 조달하는 역할을 맡거나, 장차 해안 지역으로 들어오게 될지도 모를 해안 지역 방어에 나서게 된다.



전라 해안 지역 방어를 위해 잔류한 손화중 최경선, 서남 해안 쪽 이방언 부대


전봉준 손병희가 이끄는 연합 동학농민군이 공주성 전투를 벌일 무렵, 손화중과 최경선 부대는 광주를 비롯한 나주 근방에 주둔하여 동학농민군 주력에 대한 병참 지원을 맡았으며, 이방언은 서남 해안으로 상륙할지 모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동학농민군을 끈질기게 탄압하던 나주와 운봉의 지방 민보군의 공격에도 대비해야 했다.


  당시 전라남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권역 별 분포는 광주와 장성 나주는 손화중 최경선이 활동하고 있었고, 담양과 구례 곡성은 김개남, 장흥과 강진 보성 등지는 이방언, 순천과 광양 승주 낙안은 김인배, 무안과 함평은 배상옥이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지역으로 보면 함평의 이화진, 담양의 국문보, 무안의 배상옥, 장흥의 이방언이 각각 상당한 세력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영호도회소’ 동학농민군의 활약


전라 남부 해안 지역인 여수 순천 광양을 중심으로 전개된 김인배의 ‘영호도회소’의 활동을 주목할 만하다. 김인배는 김개남 대접주의 휘하에 있던 금구 출신으로, ‘영호도회소’란 영남과 호남지역을 아우르는 동학본부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김인배는 전라남도 동남부 지역의 동학 포교와 치안 확보 및 폐정 개혁에 만족하지 않고, 경상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9월 초가 되자 김인배 대접주는 먼저 전라 동남부 지역 여수 순천 광양을 평정하고, 1만여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너 경남 하동 동학농민군 1천여 명과 연합하여 이튿날 하동 읍성을 점령했다. 김인배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하동을 떠나 계속 남하하여 곤양 진주까지 진격하여 진주 병영을 무혈점령했다.

이어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군과 함께 폐정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군은 9월 말 쯤에 진주성에서 철수했다.


  이후 현지의 동학농민군과 연합하여 경남 서남부 지역 관아를 점령하여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억울하게 갇힌 죄수들을 석방했다. 나아가 서남부 동학농민군 수천 명은 두 개의 부대로 나뉘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의 개화 정권과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대책


9월 재기포에 맞춰 조정과 일본군은 경상도 서남부 동학농민군 토벌 대책을 서둘렀다.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벌대장으로 삼아 하동으로 파견했고, 부산의 일본 영사관에서는 200여 일본군 병력을 경남 서부 지역에 출동시켰다. 이들은 10월 초에 하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하동 고승당산성 전투에서 경상 서남부 지역과 전라도 ‘영호대도소’ 동학농민군이 궤멸되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에 맞선 동학농민군은 이방언이 5,000명, 해남에서는 지도자 이병태가 3,000명, 무안에서는 지도자 백규인이 2,000명, 장성에서는 기우선이 1,000, 나주에서는 오권선이 3,000명을 지휘하여 맞서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전라남도 동학농민군 참여자는 약 114,5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전 전개


공주성에서 동학연합군 주력을 물리친 관 일본군으로 구성된 토벌군이 12월 1일 장성 갈재를 넘어왔다. 나주 지방군과 민보군의 적극적인 반격 공세가 시작되면서 전남 지역 동학농민군은 참극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관 일본 토벌 전략이 동학농민군을 전라지역 남쪽 해안으로, 이어 서쪽으로 포위망을 좁혀 일망타진하겠다는 전술 전략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장흥 병영 대공세 


1894년 12월 초에서 다음해 1월까지 전개된 장흥, 강진 병영전투에 영암 동학농민군이 참여하여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강진병영을 차례로 점령하게 된다.

  12월 1일 사창에 집결한 동학농민군들은 12월 3일 벽사역과 장흥부 인근까지 진출했다. 여기에는 금구 광주 남평 화순 보성 등지의 동학농민군까지 합세하고 있었으며, 장흥의 이방언 등이 이끄는 1만 명 이상의 대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장흥 인근지방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여 장흥부와 벽사역을 사면에서 포위하자 벽사역 찰방 김일원(金日遠)은 장흥부 성안으로 피신해 버렸고, 수성군 역시 벽사역으로부터 장흥부 안으로 철수했다. 12월 4일 아침, 동학농민군은 벽사역을 점령한 뒤 각 공해와 역졸들이 살았던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벽사역을 함락시킨 동학농민군은 장흥부로 향했다.


  장흥부사 박헌양은 사태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수성장졸과 부내 백성들을 독려하여 동학농민군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장흥부성이란 지금의 남외리와 장흥경찰서 일대를 둘러싼 장흥부의 부성(府城)을 말한다. 동학농민군은 장녕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 주위를 에워싸고 12월 5일 새벽 총공격을 펼쳤다. 동학농민군은 용산면의 어산접(접주 이방언) 1천여 명, 부산면의 용반접(접주 이사경) 5백여 명, 웅치접(접주 구교철) 1천여 명이 주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 주력은 인시를 기하여 동문(지금의 장흥극장자리)으로 진군했다. 죽창을 휘두르는 소리를 신호로 3방면에서 총공격을 시작했다. 동문에 진공했던 동학군농민군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수십 명이 거목으로 동문을 파괴하고 입성했으며 (중략)동문이 열림과 때를 같이하여 석대군은 남문에, 웅치접군은 북문에 입성하여 관아를 불사르고, 아전집 3호 외에는 성내가 모두 불탔다. 당시 부사 박헌양은 선회당에 있다가 동학농민군의 칼에 희생되었다.



전라 해안 지역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혈전, 장흥 석대들 


전투전라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3만여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이방언이라는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있었다. 이방언은 ‘남도장군’ ‘장태장군’이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동학농민군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방언은 전라 좌도의 최대항전으로 일컫는 장흥 석대 혈전을 이끌어낸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다.


  병영이 동학농민군 수중에 함락되던 10일, 나주의 관군은 일본군 미나미(南小四郞)의 지시에 따라 영암, 장흥, 능주 세 길로 나누어 강진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이규태군은 12일에야 강진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오게 되며, 일본군은 15일, 이두황군은 20일에야 장흥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은 차츰 남쪽으로 모여들면서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이들은 장흥 남문 밖과 모정뒷산 등지에 주둔하게 되는데, 이날 동학농민군 토벌임무를 띤 경군 선발대가 장흥으로 들어오게 되는 12일이었다.


  12일 남문밖과 모정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13일 새벽 통위대 교장 황수옥(黃水玉)이 이끄는 30명과 12일 밤늦게 장흥에 도착한 일본군과 1차 접전에서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다. 수천 명이나 되는 동학농민군이 불과 30명의 토벌군 선발대에 밀린 이유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토벌군이 지닌 신식 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식무기의 위력에 밀려 퇴각했던 동학농민군은 13일부터 14일 사이에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이루면서 다시 장흥부를 포위했다.

그러나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장흥에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15일 동학농민군은 고읍 방향으로부터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했다. 


  순무선봉진등록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도중대가 잠시 쉬는 사이 뜻밖에 비류 3만 명이 고봉 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까지 산과 들 가득히 수십리에 뻗혀 봉우리마다 나무사이로 기를 꽂고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며 포를 쏘아대며 날뛰어 창궐하니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요 성내 부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아우성이었다. 일본군 중위와 상의한 뒤 통위병 30명으로 후록 주봉의 적을 막게 하고 교도병으로 성모퉁이 대밭에 숨게 하고 먼저 민병 수십명을 내보내 평원으로 유인하게 했다. 그리고 양로에서 공격하여 나가니 적이 도망하여 20리밖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하다가 해가 저물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당시 엄청난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단숨에 꺾이게 된 이유는 단연 무기의 열세를 꼽을 수 있다.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비해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은 기껏 20-30미터밖에 나가지 않으며, 죽창이나 몽둥이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울재를 넘어 퇴각한 동학농민군은 17일에 다시 옥산리에 재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여기서 동학농민군 백여 명이 포살되었고 20여 명이 생포되었으며, 19일 강진에서는 생포자 15명이 포살되었다. 이리하여 장흥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던 동학농민군의 항전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석대들에서 물러난 이방언은 장흥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재기를 위한 대반격을 시도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 시기는 광주 나주 광주 장성 일대의 손화중 최경선 역시 관 일본군의 신무기에 눌려 항쟁을 포기하여 12월 1일 수하의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여 동학혁명의 불꽃이 소멸되어 갈 무렵이었다.



전라 남해 지역의 혹톡한 토벌전 전개


패배한 동학농민군들은 더 이상 조직적인 항전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이제 후일을 기약하며 피신해야 했다. 그들은 그렇다고 자신이 잘 알려진 고향마을로 숨어들 수는 없었다. 유생들 중심의 민보군이 마을 마을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들은 잔여 동학농민군을 체포하기 위하여 장흥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과 한통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은 혹은 인근의 천관산 속으로, 혹은 강진의 대구(大口), 칠량 방향을 거쳐 해남으로, 혹은 보성 회령방향으로, 혹은 회진 등 남쪽 바닷가 쪽으로 숨어들었다가 배를 타고 섬으로 숨어들어 생명이 보존되었는가 하면 희생되기도 했다.



나주에 토벌군 본부 초토영이 설치


나주에 토벌군의 본부 격인 초토영이 설치되어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한 동학농민군이 나주로 압송되었으며, 이를 선별하여 서울로 이송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관 일본군과 민보군은 동학농민군을 체포한 현장에서 살해하거나, 동학농민군과 연계된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 집집마다 동학농민군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과 동학농민군 가족들에게까지 약탈, 폭행, 살육을 일삼았다. 관 일본군의 포위작전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장흥 해남 진도를 비롯한 남쪽 땅 끝 마을로 내몰리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전라남도 해안 지역에 희생자가 유난히 많은 이유다.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 각 군의 수령들로부터 동학농민군 처단 결과를 통보받았는데, “해남250명, 강진320명, 장흥320명, 나주230명, 그리고 함평 무안 영암 광주 능주 담양 장성 영광 순창 운봉 무장 등에서는 30-50명씩을 처단했다”고 했으니 희생자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장흥 석대들 전투 현장을 기리는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한 함평 지역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전사한 고막교(古幕橋) 전투
장흥 석대들 전투 현장.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최대 격전지로 꼽히고 있다
장흥 석대들 전투를 이끈 이방언 장군 그림
장옥삼(張玉三) 장경삼(張京三) 장공삼(張公三) 3의사 기념탑. 이들은 함평 무안 전투에 참여했다가 함평현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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