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신인철학 - 68
[제1편 우주관 / 제2편 인생관 / 제3편 사회관]
제4편 개벽사상
제1장 종교적 사상과 금불문고불문(今不聞古不聞)
제2장 개벽 방식과 삼대개벽 (이상 지난호)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 함은 확실히 일면의 진리를 도파(道破)한 말이다. 인간의 역사는 일면에서 투쟁의 역사이다. 민족적 투쟁, 국가적 투쟁, 계급적 투쟁 등은 먼 옛적부터 오늘날까지 부단히 흘러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 또는 장래에 대하여 인간은 어떠한 방식 또는 방면으로 투쟁이 계속될까 하는 것이 우리의 흥미를 끄는 문제이다. 여기 쓰고자 하는 '삼전론'이란 것은 수운주의의 입장에서 이미 사십년 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발표한 명제인데 여기서 그 개략을 말하여 선각(先覺)의 명(明)에 동감(同感)코자 한다.
동물은 그 교호작용(交互作用)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의 표시작용(標示作用)을 하고 있다. 눈치, 냄새, 소리, 동작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도 교호작용의 표시로 가장 현저한 것은 음성이다. 인류는 물론이요 수류(獸類), 조류(鳥類), 충류(虫類)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음성으로써 암수[雌雄]의 교호작용, 동류(同類)의 교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것이 사람에게 와서 언어라는 것으로 발달되었다. 나아가 문자로 표시하게 되었다. 언어문자의 발달은 인간으로 하여금 문화생활에 들어가게 한 기본이 되었다. 그리하여 초기에 있어 언어와 문자는 다만 의사표시를 타에 전할 만한 정도에 지나지 아니하였으나 문화가 고도로 나아갈수록 언어문자는 점차 이론투쟁(理論鬪爭)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직접 사정(事情)의 관계로 생기는 이론판단의 영역으로부터 심원한 진리를 논쟁하며 복잡한 사회과정 또는 사회사정을 분석하는 이론에까지 이르렀다. 비교종교, 비교철학 및 비교정치, 윤리, 법률, 도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은 다같이 이론투쟁의 발달로 볼 수 있는 바 이것을 일러 언전(言戰)이라 하는 것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에게 이론투쟁이라는 말이 들리게 된 것은 유물론적 사회주의 철학설이 전하는 소리 때문이다. 그들은 비교적 새로운 계급적 유물적 이론으로 사회의 모든 과정을 자기들의 주의에 귀납시키며 구식의 이론에 대항하여 투쟁을 개시한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하여 정확한 이론이 먼저 서지 않고서는 원기를 펼 수 없고 사실을 전개시킬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형편이 허락치 않는 고대에 있어서는 어찌 되었든지 간에, 금일과 같이 사회문화가 발달된 시대에는 이론이 없는 주의는 그만큼 힘의 진전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이론이란 무엇인가? 이론이라 함은 어떤 문제에 대한 일정한 대상의 계통을 이름이다. 이론은 결코 언어문자의 종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언어문자의 수량을 표시하는 의미도 아니다. 이론은 마치 도로의 지시(指示)와 같아서 일정한 대상의 이법(理法)을 계시, 천시(闡示)하여 그것을 교정하며 또는 통일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지금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니요, 적어도 문화생활의 시초로부터 생긴 것인데 이 방법을 이름하여 변증법이라 하였다.
옛날 희랍 사람들은 강설(講說)과 토론에 기교를 발표하는 방법으로 변증법을 쓰게 된 것인데, 가령 사람 사람의 의견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에 어떻게 토론을 시킬까 함에 있어 한 사람이 어떠한 사실을 발표하면(正) 다른 한 사람은 그와 반대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 즉 전자의 의견을 부정한다(反). 그리하여 결국 처음 사람의 주장한 말의 일부와 뒷사람의 주장한 말의 일부를 포함한 어떤 통일된 진리를 얻어 내게 된다(合). 이것을 정-반-합이라 한다.
이러한 방법은 토론의 경우뿐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에도 이용하게 되므로 헤겔은 이 방법을 인용하여 일반 사리의 과정 또는 역사적 사실 변천 과정을 해설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이 방법을 유물적으로 이용할 때에 유물론적 변증법이 되고 관념적으로 이용할 때에 관념론적 변증법이 되는데 유물론자들은 헤겔을 가리켜 관념론적 변증법자라 하였다. 이제 사물 또는 역사적 변천이 변증법적으로 되는 추상적 방식을 간단한 일언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조건이 생긴다.
첫째 우주의 원리 및 인간사회의 진화과정을 동적 입장으로 보는 것이니 즉 불변불역(不變不易)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유동무상(流動無常)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우주의 현상 및 사회의 현상은 한순간이라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영구 유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방법이다. 원래 현상의 유전상변(流轉常變)은 옛 사람이나 또는 옛 종교, 옛 철학에서도 하는 말이었지만 우주본체까지도 동적 입장으로 보는 데에 변증법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 옛날 종교나 철학에서는 흔히 우주본체를 불생불멸, 상주무변(常住無變)이라 가정하였지만 변증법에서는 사물의 본체가 되는 우주본원이 근본부터 유동무상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둘째, 동적 입장의 우주현상이나 사회의 제 현상이 그렇듯이 유동무상하되 변화하는 중에도 일정불변의 연계(聯係)가 있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자연현상인 사시(四時)의 변화도 일정한 연계(聯繫)가 있으며 생물의 성장도 그러하며 사회의 역사도 또한 이 원칙에 쫓아 변한다는 것인바 서로 불가분의 연결을 맺은 사정(事情)에 의거하여 변하는 원리를 이름이다.
원래 변한다는 개념 중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니 사물이 일정한 정로(定路)를 반복 또 반복한다는 뜻도 있을 것이요, 또는 역사가 퇴화적으로 변한다는 관념도 가질 수 있고 무질서하게 혼돈적으로 변한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옛날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보통이었으나 변증법에서는 일정한 단계 일정한 순서에 의하여 전화한다고 보는 것이 그 특색이다.
셋째, 모순의 법칙이라는 것이니, 이 법칙이야말로 모든 사물을 변천케 하는 종대(枠)가 되는 것이다. 모순의 법칙에 의하면 이 신구의 사회가 어찌하여 변할 가능성을 가졌느냐 하면 이는 그 발전의 과정 중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에는 그 작용을 달리하여 상호반발하는 두 개의 힘이 병존하여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 작용의 힘은 일순이라도 상쇄(相殺)되어 정지의 상태로 있기는 실로 예외의 일로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정지하였다고 보이는 상태 가운데도 기실은 양작용이 서로 잠재적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힘이 한번 변화만 하고 보면 문득 힘의 내적 모순이 나타나서 균형의 파괴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새로운 균형이 일어나게 된다. 새로운 균형이 생기는 순간 그는 새로운 기초 위에서 즉 반대되는 힘을 결합한 새힘이 나타난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투쟁 및 모순이 즉 방면을 달리한 힘의 대립이 운동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형태의 제1은 균형상태라 할 것이요, 제2는 균형의 파괴라 할것이요, 제3은 신 기초 위에 선 균형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역사의 새로운 균형은 새로운 파괴를 낳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로부터 다시 새로운 균형이 이어서 일어나게[續起] 된다. 이렇게 무한히 진전이 된다. 이 과정의 원리적 기초가 곧 내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넷째, 돌변적 변화이다. 한 사리(事理)가 전술한 바와 같이 내적 모순에 의하여 점차 파괴되어 새로운 균형을 짓다가 그가 어느 정도까지 발달하고 보면 거기서 돌변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구(舊)가 변하여 신(新)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의 온도가 가열되면 가열될수록 물이 변하여 기체가 되는 예와 같은 것이 사회변천에도 있다는 것이다.
이론은 너무 기로로 들어갈 듯하다. 여하튼 이론에는 이와 같은 정로(定路)를 따라 규구준칙(規矩準則)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점차 이론투쟁으로 만사해결의 단서를 삼는 시대가 오리라고 볼 수 있다. 과거와 같이 동첩완력(動輒腕力)에 의하여 승부를 결(決)한다든지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불여대포일문(不如大砲一門)이라 하는 군국주의의 시대는 점차 물러가는 것이 진화의 순서인 듯 하다.
아직도 미완성[未成品]의 상태에 있지만 국제연맹 군축회담 같은 것도 역시 신 현상이라면 신 현상인 것이요, 기타 문화적 국제회합, 민족회합 같은 것도 공전(空前)의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 언전시대(言戰時代)로 볼 수 있고, 종교회합 교육 경제 기타 문화회합은 문화상 언전시대이며, 유물적 이론투쟁, 계급적 이론투쟁과 같은 것은 계급상 언전시대 혹은 경제상 언전시대로 볼 수 있다.
끝으로 한마디 첨부해 둘 것은 언론의 주관적 가치이다. 주관적 가치라 함은 언론은 필연으로 인격과 수반하는 것이다. 동일한 언론이라 할지라도 성의 있는 인격을 통하는 데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꾼된 자는 먼저 그 인격에 대한 수양(修養)을 해야 하고, 둘째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수단(手段)이니 이것은 우리나라 형편에서 그러하고 수운주의에서 그러하다.
수운주의는 본래 그 도달할 과정에 층계가 많고 이론이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천율일편으로 획일하는 언론은 도저히 보편적 수확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