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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8. 2018

생명 VS. 시간과 공간

[빅 히스토리 - 생명의 거대사] 읽기 (7) 

아래 글은 최민자 교수의 [빅 히스토리 -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모시는사람들)의 본문 중 일부입니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그의 [시간의 지도]에서 ‘역사에서 세계 지도에 비유될 만한 것, 다시 말해 과거의 모든 시간 규모들을 담은 시간의 지도’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그 근거로 그는 현재 많은 분과 학문 내부에서, 특히

자연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지난 수백 년 동안 각각의 분과학문을 지배해 온 현실에 대한 파편적인 설명을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합보다 더 크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어떻게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해 ‘통합적’인 설명을 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단순히 축적된다고 해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문화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 통섭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통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통섭 또는 통합을 논하는 것은 단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며 실재성이 없다. 

(이상 본문 64쪽) (중략)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말하는 ‘빅 히스토리: 모든 시간의 규모에서 과거를 바라보기’는 시간과 공간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드라마를 긴 시간을 통해 펼쳐놓은 것이어서 그가 사용하는 ‘빅 히스토리’라는 용어는 단지 시간의 역사, 즉 현상계[물질계]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기존의 세계사 앞머리에 빅뱅 이후 지구에 생명체가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과학계의 연구를 추가하고 기타 파편적인 지식들을 정리하여 ‘빅 히스토

리’라고 명명한 것이다. 


필자가 처음 ‘빅 히스토리(거대사)’라는 용어를 접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긴 시간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 물리학이 주도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반영한 역사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이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3차원적 절대 시공(時空)의 개념이 폐기되고 4차원의 ‘시공’ 연속체가 형성되어 우주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불가분적인 전체로서,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실재로서 인식된 지도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단순히 파편적인 시간들을 집적(集積)해 놓고서 그것을 ‘빅 히스토리’라고 명명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말하는 ‘빅 히스토리’의 본질적인 문제는 의식계와 물질계를 회통하는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 근원적 평등성과 유기적 통합성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가 생명에 대한 개념적 명료화(conceptual clarification) 없이 ‘생명의 기원’을 논하고자 한 것은 비과학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만물의 제1원인인 생명은 시작도 끝도 없고 태어남도 죽음도 없으며 없는 곳이 없이 실재하므로 시간의 저 너머에 있는데, ‘생명의 기원’이란 이미 그 자체 속에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생명의 기원을 논하는 것은, 마치 신(神)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하는 것과도 같이 무모한 짓이기에 그 어떤 생산적인 결론도 도출해 낼 수가 없다. 우주의 본질인 생명 그 자체가 곧 신이다. 설명의 편의상 생명의 본체[理]를 신이라고 명명하지만 그 ‘본체’는 작용[氣]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체로서의 작용이므로 생명의 본체인 신과 그 작용으로 나타난 우주만물은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소멸의 운명에 처해 있는 만물의 다양한 물질적 껍질과는 달리, 만물 속에 만물의 성(性, 神性, 참본성)으로 내재해 있는 동시에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원리로 작용하는 생명[神, 天]은 분리 자체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절대유일의 하나인 까닭에 유일자[唯我] 또는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종교와 학문 그리고 근대 과학까지도 근원성·포괄성·보편성을 띠는 생명을 파편화되고 물질화된 개념으로 왜곡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천지만물이 생겨나기 전에도 생명[靈]은 있었다! 바

로 그 ‘생명’의 자기조직화에 의해 우주만물이 생겨난 것이다. 

(이상 본문 67쪽) (중략)


대승불교의 중관(中觀)·유식(唯識)·화엄(華嚴)사상, 힌두교의 베단타 철학 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켄 윌버의 홀라키적 우주론(Holarchic Kosmology)에 의하면 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홀라키적인 다차원적 생명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실로 거대사는 현대 과학계의 패러다임 전환을 반영한 새로운 형태의 역사, 다시 말해 지식의 대통섭을 통해 의식계[본체계]와 물질계[현상계]의 상호 의존·상호 관통을 조명하는 역사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이 3차원적인 시공(時空)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게 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생물체에 집중하면서 “비이원성으로부터 이원성으로,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무한으로부터 공간으로, 절대적 주관성으로부터 주관과 객관의 세계로, 우주적 정체성으로부터 개인적 정체성으로” 하강한 데 따른 것이다. 비록 환영(幻影)이긴 하지만 주체와 대상간의 분리, 바로 그 ‘간극(gap)’이 공간이다.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오직 자신의 육체와만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광대한 공간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시간과 공간은 상호 관련된 연속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의 창조는 시간의 창조와 관련된다.

(이상 본문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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