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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8. 2018

동학 천도교 인명사전 이야기

-제2판을 준비하며 

[동학 천도교 인명사전 머리말 _ 심암 이동초] 

*이 머리말은 2015년 간행된 "동학 천도교 인명사전" 제1판의 머리말입니다. 제1판 인명사전에는 7만여 명의 천도교인 명단이 수록되었습니다. 현재(2018) 제2판 발행을 준비하고 있으며, 1만여 명이 추가되어 8만여 명의 인명을 수록하게 됩니다. 1판 인명사전의 내용 중 수정 보완할 사항을 파악하신 분은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02-733-7173)으로 연락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55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천도교단은 동학농민혁명과 갑진개화운동, 3.1운동 등으로 잇따라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중반기에는 3백만의 교세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155년간의 동학도인과 천도교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1860년 동학을 창명한 이후 동학농민혁명(1894)과 갑진개혁운동(1904)의 역사를 남긴 “동학시대”를 거쳐, 1905년 “천도교”라는 이름이 선포되고, 1906년 2월 천도교중앙총부가 설립될 때에는 포덕연비에 따라 대교령(교인 10만명당 1인), 중교령(2만명당 1인), 소교령(4천명당 1인) 등을 선정하였다. 이때 10만 명을 기준으로 72개 대교구가 조직된 것을 보면 교인수가 수백만에 달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보면 전국 천도교인 수는 1910년 885,500여명, 1916년 7월 1,073,408명, 1918년 2월 1,082,936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1934년의 총독부 자료에서는 연도별 천도교인 현황을 1906년 102,604명, 1910년 112,767명, 1919년 130,884명, 1903년 104,550명 1934년 8월 현재 93,400명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1934년의 전국에 963개 교구와 186개의 전교실이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7~8명의 대가족 제도였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교인수를 70, 80만여 명으로 추산할 수 있으며 또한 100명 단위로 구성되었던 교구로 계산해도 교호수 10만에 교인수가 60, 70만 명이었다고 추산할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신구 양파로 분열되어 있던 천도교단은 일제의 파쇼동원전시체제 하에서의 수난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일제당국의 신구 합동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자 교단은 합동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37년 9월경 신구 양파를 대표하는 권동진, 최린, 최준모, 정광조 등이 월간잡지 <삼천리(三千里)>에 기자와의 대담 형식으로 <양파합동 및 시국에 대한 진로>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는데, 네 사람이 모두가 천도교인 수를 60~70만 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까지 동학시대는 물론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한 이후의 교인들에 대해 정리한 교단의 기록은 없다. 1911년 8월 중앙총부에서는 교호 관리를 위해 가족별로 기록되는 [천민보록(天民寶錄)]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1918년까지의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3.1운동으로 인해 [천민보록]의 작성은 중단되고 말았다. [천민보록]은 현재 중앙총부에 보존되어 있는 <경성교구(京城敎區)> 및 <경성교구 을호(乙號)> 2책 외에 1930년대 충청북도 일부를 중심으로 엮은 [천민보록] 1권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1910년대 [천민보록]은 전국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연원조직을 중심으로 연원주가 교호의 가족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1930년대 것은 현재의 교보 양식과 흡사한 내용으로 교회경력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천민보록은 3.1운동으로 작업이 중단되었으며 1921년 12월에 개최된 제1회 종법사회에서 [천민보록]의 명칭을 [천도교건설록(天道敎建設錄)]으로 바꾸어 1923년부터 다시 착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천도교건설록] 제작 추진도 재정적인 어려운 점과 함께 특히 교회가 신구파로 분열되어 이루지지 못하였다. 


그나마 1923년 10월 대신사탄신백년기념회가 조직되어 백년기념관을 건립할 때의 기념회원과 성금록을 수록한 <대신사백년기념회 명부> 24권이 편철되어 보존되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8천8백여 명에 달하는 백년기념회 회원은 4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각 개인이 1원씩을 희사한 3만 명에 달하는 20권의 <성금록>에는 연령과 주소 및 금액이 수록되어 있는데 편의상 연령은 연도로 환산하고 주소는 출신지로 성금액은 생략하여 수록하였다.


그 후 1925년 교회가 신구파로 양분되자 구파교회에서는 [천도교건설록] 및 [천도교포덕록] 편찬을 계획하였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실현하지 못하였고 1931년 11월 유효(劉曉)가 개인적으로 <교회역사인물지> 한 권을 마련하였지만 발간하지는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파교회에서는 1933년 4월부터 교보 편찬에 착수하여 1934년 12월 15일 1만여 명에 달하는 인명을 수록한 [천도교건설록(天道敎創建錄)]을 출간하였다. 


창건록의 내용에 중 접주, 수접주, 대접주, 교령, 봉교, 봉훈, 교훈, 도훈, 도사, 종법사 등의 교직을 거의 모든 인물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나 [천도교회월보]와 [신인간]의 <중앙휘보>에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교직자 명단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료의 신빙성이 희박하다. 다만  도호, 출신지, 배우자, 당호, 입도일 등은 유용한 자료라고 하겠다. 그리고 1930년대 신구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도령실과 교령실을 비롯한 각 부서에서 기록한 많은 분량의 일지(日誌)에서는 중앙간부들의 활동, 도호, 출생지, 환원일 등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 후 태평양전쟁과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의 자료는 거의 없으며 특히 북한지역의 자료는 전무한 상태이다. 다만 월남 교인들이 서울교구를 비롯한 각 지방 교구에서 작성한 교보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현실적으로 각 교구에서 자료를 수합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다행히 중앙총부에는 한국전쟁 이후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교구임원명부> 및 <임원이력서>가 정리되지는 못한 채 남아 있는 기록철과 도호 당호의 신청서와 발급대장이 있어 다행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교역자의 이력서는 제출할 때마다 내용이 상이한 부분이 많아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인지 선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밖에 현행 규정에 따라 입교한 교인은 교보를 작성하여 소속교구와 총부에서 각각 보존하도록 되어 있지만 교보로서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2002년부터 교역자의 새 임기마다 발행하는 [교역자수첩]까지도 참고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중앙총부에는 동학혁명의 참여자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는데 다행히 2009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펴낸 백서를 자료를 참고로 하였다. 물론 동학혁명 참여자로 등록이 되었다고 모두 천도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동학군으로 참가하였다면 천도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사료되어 수록하였다. 


또한 필자가 입수한 한국전쟁 때 포로수용소 내에서 작성된 1,250명에 달하는 [포로수용소내의 천도교인의 명부.1]를 참고하였는데 이 명부는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로 석방되기 직전에 논산 지구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명부에는 기존의 교인들도 있었지만 1952년을 전후하여 거제도를 비롯한 포로수용소 내에서 입교한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당시 포로수용소 내에서는 <The Chundo Religion>이란 영어 간판을 걸고 일요일이 되면 천도교인들이 함께 모여 천덕송을 부르며 시일식을 행하는가 하면 월성미는 하루에 한 개비의 담배로, 연성미는 작업복 한 벌로 하여 부산시교구에 납부까지 하는 등 천도교 신앙을 하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지명의 혼선으로 특히 2개의 접경 지역에서는 출신지가 아닌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 경우에는 출신지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1937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의 전시체제 하에서 중앙교직자로서 각종 전시단체에 참여하는 소위 친일활동 부분에 대해서는 제외하였다. 다만 확인이 가능한 교직자의 창씨개명은 말미에 수록하여 참고하고자 하였는데 이 점 독자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가장 아쉬운 점은 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7만 명이 넘는 인명은 대부분 교직자로 그 밖에 수백만에 달하는 일반교인들은 수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중앙총부와 각 교구에서 보존하고 있는 교보를 정리하여 수백만 천도교인 모두가 수록되는 인명사전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인명사전을 계획한 것이 아니고 종령을 비롯한 교회사 자료를 접하게 되면서 도호(道號), 아호(雅號), 필명(筆名) 등에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인명수가 7만 4천여 명에 달하자 참으로 미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천도교의 인명사전을 엮으려면 사전편찬 계획을 세우고 몇 사람이 팀을 이루어 체계적으로 오랫동안에 걸쳐 해야 할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인들의 협조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출판사(모시는사람들)에서는 [천도교월보]와 [신인간]에 수차에 걸쳐 광고까지 하였으나 교인들의 관심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마도 중앙총부에서 추진하였다면 많은 관심과 협조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천도교인명사전은 완성본을 발간하기 위한 첫 걸음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수록 내용에 누락 및 오류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으로 천도교인물사전 간행작업이 지속되는 첫 디딤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는 인명사전의 집필을 위해 수년간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했지만 그래도 각종 교회 자료들을 찾아가면서 훑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큰 소득이라 하겠다. 언제나 집필에 도움을 주시는 한양대학교 윤석산 교수, 서울교구에 집필 공간을 마련해 주신 김인환, 양윤석 두 분 교구장과 임원들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이 인명사전에 이어, 천도교 역사사전(연보)를 진행하는 것을 격려하고, 최종적으로 “동학천도교대사전”의 발간까지를 염두에 두고 ‘동학아카이브’ 내에 ‘동학천도교사전연구회’를 만들어 이 작업이 지속되고 계승될 수 있도록 기획을 해 나가면서 이 책의 출간까지 해 주시는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의 박길수 대표와 직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5년 3월 서울 경운동 서울교구에서 

李東初



동학 천도교 인명사전 

[한국 신종교 대사전]도 있습니다...

모시는사람들 책 전체 보기 = 모시는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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