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신인철학 - 75
[제1편 우주관 / 제2편 인생관 / 제3편 사회관 / 제4편 개벽사상]
제5편 도덕관
제1장 도의존재가치
제2장 자연의 도덕
제3장 인간계의 도덕
1. 개인과 사회의 관한 도
2. 윤리도덕의 추상적 소질..............(이상 지난호)
사람의 본성을 고찰하여 그에 대응하는 도덕행위를 규정할 때 부수(附隨)하는 문제가 있으니 예를 들면
첫째, 우리가 인간성을 선이라 볼 때에 그에 대응하는 도덕은 그 근본방침을 어데서 출발시켜야 될까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동양에서 성선설의 주인공은 맹자로 볼 수 있고, 서양에서는 루소를 들 수 있다. 맹자는 인간성을 선이라 본 결과 소위 ‘알인욕존천리(遏人欲存天理, 인욕을 삼가 천리를 보존함)’라 하여 외계(外界)에 애착하는 물욕지심(物慾之心)을 제거해 버리면 인간성의 본래적 선인 인의예지(仁義禮知) 사단(四端)이 스스로 표현된다 하였다. 루소는 인간사회의 허위와 가식, 즉 부자연한 제도를 철폐하면 인간성 자연으로서의 평등 자유의 행복이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전자는 개인에 관한 도덕이요, 후자는 사회적 제도문제에 관한 도덕이라는 차이가 있으나, 외계의 부자연을 제거함으로써 내계(內界)의 선이 표현된다는 뜻은 동일하다.
둘째, 성악설이니 동양의 순자는 인간성을 악하다고 본 결과 인간성의 악을 막기 위하여 외적으로 도덕률의 조화를 줄 것과 나아가 형명(刑名)의 율로 사회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으며, 사람성은 그 자연상태에서는 전연 동물적 본능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국가가 권력의 행위로 그를 방지하는 데서 인류의 행복이 생긴다고 주장한 것이다.
셋째는 무선무악설(無善無惡說)이니 고대에서는 고자(告子)를 들 수 있는데 수운주의의 인성관도 역시 마찬가지로 무선무악설이다. 무선무악이라 함은 동시에 선가능(善可能) 악가능(惡可能)이란 말도 될 수 있으므로 무선무악설은 선악은 후천의 정신적 또는 물질적 환경에 따라 자유로 지어진다는 것이다.
수운주의에서 사람성이 근본부터 무선무악하다고 주장하는 증거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선악이란 것은 어떤 시대에 있어 그 시대생활의 표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넉넉히 알 수 있으니, 만약 사람성이 근본부터 선악이 고정해 있다 할 것 같으면 그에 따라 선악의 표준점도 만고를 통하여 일정불변하여야 할 것이요, 따라서 도덕도 만고를 통하여 일정불변하리라는 모순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성은 본래 무선무악한 것인데 밖에 있는 사회적 환경과 그 작용에 따라 선도 될 수 있으며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면 밖에 사회적 관계는 어떤 시대를 물론하고 그 시대에 상응 또는 필연적인 일정한 표준적 도덕행위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개정이 그 표준행위를 어기고저 하는 데서 그 시대의 도덕이 그를 지목하여 선악의 부호(符號)를 부쳐 버린다. 그렇다면 어떤 개인의 파괴행위가 곧 그 개인성의 성악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 그 경우에 있어서의 사회적 표준도덕이 사람성에 대하여 영원한 절대선이라는 보증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못 현대에 있어서 모든 범죄가 직접 간접으로 거의 재산관계의 범죄가 아닌 것이 없음을 보면 그 사회제도가 그만치 재산관계에서 불비점(不備點)이 있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은 외적 관계에 있고 내적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끝으로 어떤 시대에 있어서 그 시대의 도덕률의 표준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풍속(風俗)을 표준하는 도덕률이니 그 설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에 가장 중대한 관계를 가진 것은 시대의 풍속 습관이므로 도덕률은 이 풍속 습관을 표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준은 완고한 습성을 가진 도덕률이며 권력자의 지배욕으로부터 나오는 도덕률이다. 풍속 습관을 표준한 도덕률은 이것을 우연적 도덕률이라 하는 것이니 사람의 지력과 의지의 힘으로 건설한 도덕률이 아니오 우연한 습성에서 흘러 온 행위의 도덕률이므로 여기에서는 사람의 의지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이라 함은 곧 의지력의 발동을 이른 것인데 이러한 습성에서 생기는 도덕률에서는 조금도 사회의 진화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성찰적(省察的)도덕이다. 성찰적 도덕이라 함은 순수한 지력적 도덕을 이름이니 지력적 도덕률을 선택하는 점에서는 장기(長技)가 있으나 사람의 정적 방면을 전연 멸시하는 것으로 보아 그 방면의 결점이 없지 않다. 어떤 점에서 정적 방면의 행위가 도덕률에 중대한 결과를 끼침에도 불구하고 성찰적 도덕은 이 점을 무시한다.
셋째, 정적 방면을 치중하는 도덕이다. 예를 들면 봉건적 도덕 ․ 종교적 도덕과 같은 것은 주로 정적방면에 치중한 도덕이다. 여기에는 지적 성찰이 결핍된 점에서 또한 중대한 결함이 있다.
그러면 도덕률은 어디에 표준을 둘 것인가? 또 어떤 시대에든지 융통성을 가질 수 있으며 또 진화성과 지(知) 정(情) 의(意)의 융화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사람성자연의 도덕률을 추천하는 바이니 사람성자연에 대한 진리는 전편에 기술하였거니와 나아가 그에 대한 도덕성을 개술(槪述)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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