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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12. 2018

사회적 방면의 도덕률과 삼경(2)

다시 읽는 신인철학 - 78

야뢰 이돈화 지음, [신인철학] 연재 | https://goo.gl/vKaRhD (이돈화) 


[제1편 우주관 / 제2편 인생관 / 제3편 사회관 / 제4편 개벽사상]

제5편 도덕관

       제1장 도의존재가치

        제2장 자연의 도덕

        제3장 인간계의 도덕

        제4장 수운주의의 윤리적 도덕률

                1. 개성방면의 도덕률과 수심정기

                2. 사회적 방면의 도덕율과 삼경

                     (1) 이기와 이타

                     (2) 경은 우주의 조직원리..............(이상지난호)


(3) 제1 경천(敬天)


사람성은 당연히 우주의 대법성(大法性)에 대하여 경외지심(敬畏之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 하는 것이 자기의 품성을 키우며 자기와 우주를 동화하게 하는―대아(大我)의 경지[境涯]에 들어가는―인간격의 발휘(發揮)이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은 행위의 세계보다 관념의 세계가 큰 것이다. 행위의 세계는 현실에서 직접 생활의 기초가 되고, 관념의 세계는 정신생활에서 경험을 관념화해서 현실세계의 생활 행위를 미화(美化) 또는 예비화(豫備化)하는 동시에, 정신세계에서 사람을 현실아(現實我)보다 한층 큰 이상아(理想我)의 영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보라, 우리의 금일 이마마한 의식주의 생활은 무엇에서 나왔는가? 물론 경험에서 나왔다. 그런데 경험이 경험될 만한 기초는 어디서 나왔는가? 이는 사람성에만 특유(特有)한 관념의 세계에서 얻은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본래 날아 보겠다는 관념이 없었다면 날고자 하는 경험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요 경험이 없었으면 비행기가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상이라는 현실 이외의 관념의 세계는 이 협착(狹窄)한 현실아로 하여금 얼마나 자유의 지경을 주는지 아는가? 얼마나 이 구구한 현실의 사고로 하여금 자유의 피난소(避難所)를 주는지 아는가? 아무리 현실주의자요 현실집착자(現實執着者)라 할지라도 그가 평소에 있어 또는 비상의 경우에 있어 잠시라도 관념의 세계, 즉 이상에 들어가지 않고는 이 현실의 고통을 소화하며 또는 현실의 경험을 전진시킬수 없는 사정을 보아서 관념의 세계는 그만치 유복(裕福)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한편에서 현실에 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에 사는 동물이다. 이것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이상의 세계에서 단일아(單一我) 중에서 복잡아(複雜我), 고립아(孤立我) 중에서 전적아(全的我)를 발견하는 것은 실로 위대한 일이니, 수운은 이 이치를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어스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라고 하였다. 우리가 만일 자기 자신 중에서 ‘한울’ 즉 전적아를 발견하고, 그 전적아에 의하여 진리의 표준을 얻으며, 무궁성의 실재를 인식하고 그리하여 생명의 원천을 개척한다면 경천의 이치[理]는 실로 지대하다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사람성 무궁을 말한 바 있거니와 사람이 그 자체 중에 무궁아를 포용하였음은 마치 한 과일[一果]의 생명이 나무 전체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울을 공경한다 함은 고립아(孤立我)가 전적아를 동경하는 것이며, 부분이 전체를 위한다는 뜻이며, 불완전이 완전을 이상(理想)한다는 것이니, 즉 소아(小我)가 대아(大我)를 숭경(崇敬) 순응하여 높은 인간격의 생활을 무궁의 단계에서 끊임없이 진화시키고자 하는 우주생활의 일부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오척단신(五尺短身) 또는 고희(古稀)의 수명(壽命), 출몰무상(出沒無常)한 사유(思惟)의 소아에 집착(執着)하여 그것이 인생 생활의 전부이며 그것을 잃으면 인생 생활의 전부를 잃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실로 목전(目前)에 있는 목견(目見) 그대로의 극히 비근(卑近)한 현실아를 표준한 생활이다. 만일 사람의 전 생활이 거기에서 시작하여 거기에서 마친다면 사람은 실로 보잘 것 없는 동물이다. 우리가 만일 다시 생각을 돌이켜 사람은 이 비근한 동물적 아(我) 이외에 이보다 고상한 이상아(理想我), 즉 대아가 있는 것을 확신[斷定]하고 그 신념에 의하여 직각(直覺)으로 대아를 감상한다면 대아의 웅보(雄步)는 그제야 이상의 문을 열고 천천히 우리의 관념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대아란 무엇이냐?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무궁하고 또는 가장 완전한 자를 말한다. 아(我)란 무엇이냐? 불완전하며 유한한 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대아는 아(我)보다 극히 무한하고 완전한 자이므로 인과법칙상으로 보아 '아'가 대아의 관념의 원인이 될 수는 없고, 도리어 대아의 관념은 대아 자신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가 가장 완전한 자, 즉 대아라고 하는 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가장 웅변(雄辯)으로 대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아라 하는 소아가 무슨 필요에 의하여 대아를 생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아'와 같은 불완전한 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불완전한 '아'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 의식의 직접적 증명에 의하여 상식으로 지득(知得)할 수 있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와같이 불완전한 '아'가 불완전으로부터 완전과 합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완전한 대아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그러냐 하면 불완전한 자는 여하히 많이 집합시키더라도 완전한 자를 얻지 못할 것이요, 차라리 반대로 무한한 자를 아직 유한하게 보는 데서 처음으로 유한한 자의 존재 필요가 생각될 것이다.

  

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천(敬天)이라 함은 진리를 사랑하는 의미도 되는 것이니, 천은 곧 통일진리(統一眞理)의 원천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격의 고하는 무엇으로 표준을 삼을 것이냐 하면 진리를 사랑하고 아니하는 데 의하여 사람으로 인간격에 참여한 여부를 가히 판단한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매(野昧)한 민족일수록 진리에 대한 희구(希求)와 환희가 없으며 야매한 사람일수록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지력과 정열이 박약(薄弱)하다. 진리의 추구는 인간성에 대한 향상적 규범이며 고답적(高踏的) 도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모든 것의 중심력이 된다고 볼 수 있으니 중심력은 곧 우주생활(宇宙生活) 구성의 중추신경이다. 태양이 중심력으로써 여러 행성[諸星]의 운행을 통어(統禦)하며, 지구가  중심력으로써 만물을 견인(牽引)하며, 같은 생물 중에도 중추신경의 발달 정도로써 동물의 고하를 판단하는 것과 같이, 정신생활의 경우도 또한 그러하여, 한 민족으로서 진리의 중추신경을 잃으면 이는 패멸을 의미하는 민족이며, 한 개인으로서 진리의 희구(希求)와 귀의(歸依)가 없다면 그는 인간으로 동물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인류생활이 문화의 경역(境域)에 들어서자 모든 현철(賢哲)은 진리의 중추신경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과 희생으로 진리의 건설에 주력하였다. 그것이 종교도 되며 철학도 되며 과학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과거의 모든 문화는 후천개벽의 운명에 봉착하자 어느덧 신구의 분수령상(分水嶺上)에서 최후고별(最後告別)을 시작하였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현대와 같이 연립사상(聯立思想)이 횡행(橫行)한 뒤에는 민중생활이 새로운 사상 위에서 새로운 통일 방법을 얻는 시대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마치 전국시대에 백가(百家)의 이론이 횡행하던 끝에 실천의 대덕교(大德敎)인 공자(孔子)의 사상이 출현한 것과 같이, 또 바라문(婆羅門) 제타(諸他)의 도파(道派)가 계급적으로 분립한 때에 불타(佛陀)의 평등사상이 출현한 것과 같이 현대의 연립사상이 횡행하는 조짐은 필연적으로 현대 민중사상의 구슬을 일관할 표준적 대사상이 출현되리라 믿는다. 


그는 꼭 종교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요 철학 또는 과학적 사상만이 그렇게 된다는 것도 아니다. 선천시대의 사상이 종교로부터 흘러 내려 철학을 경유하여 과학에 이른 것과 같이, 현대 이후의 사상은 정확한 과학적 기초 위에서 건전한 발달을 이룩하면서 그것이 갈 만큼 간 뒤에 철학의 경지를 신진리적 정로(正路) 위에서 대집성(大集成)한 원리사상을 얻은 뒤에, 다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일보(一步)를 나아가 인생의 구경(究竟) 신진리의 대집성적 신념을 건축하리라 믿는다. 


이렇게 된 사상적 신념은 결코 과거의 종교 또는 철학적 사상을 반복 역행하는 것이 아니요, 이 삼자의 사람성 발동을 과거에서 추려 놓은 재료로부터 다시 정화(晶化)하고 융화케 하여 일대 전적 신진리로 표현(表顯)할 것이라 믿는 바이다. 우리가 추천하는 진리는 이러한 내용을 구체화한 것을 말하며, 이러한 진리를 믿는 것이 경천(敬天)에 가장 떳떳한 일이며, 이러한 진리를 믿음으로써 사람은 유한에 있으면서 무한의 큰 것을 알아 거기에 접촉하여 희열을 받을 수 있고 불완전에 처하면서 완전에 귀의하여 완전을 실현하고 완전을 동경하는 것에 인간성에 복재(伏在) 한, 또는 우주생활중에 복재한 인간격이 사람에게 더욱 높이 표현될 것을 믿는다.

  

경천은 나아가 진리로서 전인류의 관념과 사상을 통일케 하며, 장래에 올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예비 조건으로서 인류의 의지를 진리의 중추신경에 의하여 통일케 하는 위대한 효과가 있는 것이니, 만약 인류에게 이상적으로 통일된 진리가 없다면 인류는 무엇에 의하여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경지에 들어가 사해일가(四海一家)의 실현을 볼 수 있겠는가? 


지금 이후뿐 아니라 사실 인류는 먼 과거로부터 단결을 통해서 진리의 중심력에 의하여 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고대인들의 다신관념(多神觀念)이 단지 공포심의 발작 또는 미망(迷妄)의 사상으로 나온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인류성의 암흑면(暗黑面)만 본 것이다. 그들은 부지불식간 그 혼돈(混沌)한 다신사상에 의하여 한 민족 한 부족의 통일을 정신적으로 연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신교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나아가 한 민족의 사상 또는 인류동포의 사상을 일신이라는 진리의 줄로 통일코자 하였던 것이다. 종교뿐 아니라 철학이든지 기타 사상도 그 중심력의 작용은 거의 다 인류의 사상 및 정신을 자기네의 사상에 의하여 통일코자 하고 또는 얼마간 통일되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리의 숭배는 개성으로 보면 인격적 발전을 유도하는 고상한 도덕이 되는 것이요, 사회로 보면 인류를 정신적으로 동귀일체의 길에 나아가게 하는 근본문제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천은 최종적으로 동귀일체의 대도대덕을 실현하는 첫째 원리가 되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현대인으로서 최고 이상은 인류의 평등과 자유를 단모(團謀)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차별한 일가의 생활을 단모해 주고자 하는 것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큰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도 그 실현 조건으로 물질적 개선에 착수하게 된 것이 현대의 사회문제이다. 그것은 현대의 가장 급무인 경제문제 해결로 인류의 동귀일체를 도모코자 하는 사상이므로 수운주의로서는 이를 충분히 승인하며 또는 공동전선에 나아갈 원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넉넉히 잡아 낼 수 있다. 그 까닭은 현대의 경제문제 해결은 수운주의의 성신쌍전(性身雙全)의 일면인 물질적 활동을 대표한 것으로 보아서 그러하다. 


그러나 수운주의의 타일면은 물질적 동귀일체와 아울러 정신적 동귀일체를 실현함에 있는 고로 우리는 그 타일면에서 인류의 정신적 동귀일체를 단모하기 위하여 진리의 숭배 즉 경천의 원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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