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이 글은 <개벽신문>제72호(2018.3)의 "개벽의 창"에 게재되는 글입니다.
1.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도할 때, 수운 선생과 한울님 사이의 질문에 이어, 수운 선생이 세상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자문(自問)하는 질문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동경대전, 포덕문, 輔國安民 計將安出) 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 지면을 통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수운 선생이 이 물음과 관련하여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대답은 곧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하는 사명(使命)과도 연결되는 바, 이것은 ‘제인질병(濟人疾病)과 교인위아(敎人爲我)’라는 점도 다른 기회를 통해 몇 차례에 걸쳐 밝힌 바 있다(졸고, <동학의 공부법> 등).
이때 ‘나라(國)’의 의미는 시대와 인간 삶의 조건을 따라 그 함의(含意)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의 조선이 ‘보국’의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일제강점기의 조선 역시 그러하다.
오늘날 ‘보국안민’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까?
2. 최근 우리의 ‘안일한 삶과 의식’을 강타하는 몇 건의 사건들은 지금 한반도가 ‘중일변’의 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역력히 보여준다.
첫 번째는 미투 운동의 확산이다.
촛불혁명으로 적폐정권을 무너뜨리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래 계속되어 온 적폐청산의 흐름 위에, 세계적인 차원의 미투 운동의 에너지가 유입되면서 우리 사회의 심층적인 적폐 중 하나인 위계와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가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초기의 폭발적인 호응에 비하면 시간이 갈수록, 이를 둘러싼 잡음이 유입되고 있으나, 그 기본동력과 근본정신은 면면히 살려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를 안고 있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수운 선생 순도(=동학의 ‘불법화’)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을 겪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성공적’으로 이룩해 왔다.
그러나 각 단계의 일정한 성취는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문제점을 낳거나 내포하면서 진전되어 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의 결과 또는 그 미완성의 결과로 식민지화, 분단, 천민자본주의, 군부독재 등을 차례로 겪어야 했으며, 고무신/막걸리 선거로 대표되는 얼치기 민주주의를 극복하는 데는 숱한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어쨌든 역사는 흘러,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과제는 ‘선진화’라고 할 수 있다. 앞선 세 단계의 과제상황이 모두 해소되지 않은 만큼 한국사회에서 ‘선진화’란 ‘근대화-산업화(제4차 산업혁명)-민주화(정치-경제 민주화)’의 과제를 내포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선진화는 근대화/산업화/민주화를 아울러 성취하고 치유하는 한편으로, '바람직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돌입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투 운동은 여성(=약자)인권이나 양성평등(한국사회 성격차 지수는 세계144개 국 중 118위라는 최근 보고서가 있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식의 확장=상식화와 권력에 기댄 적폐를 바로잡는 의미이거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문제이다.
3. 최근의 사건들 중 가장 극적인 사례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발표이다.
이야말로, 역사의 변곡점이다. 두 회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와 세계평화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 이 지면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바는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기본 동력인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이다. 10여 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울 당시, 진보진영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보수 지영의 반대와 주변 강국의 몰이해 등 주객관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하여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금번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애초부터 이처럼 정밀한 과정을 계획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절묘한 성공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남다르다. 돌이켜보면 최근 1000년 동안의 한국사에서 주변강국과의 관계를 두고 이번의 사례처럼 한국(남북)의 주도권 두드러진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세종의 자주화 노선 정도).
특히 오늘날 삶의 지평이 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된 상황에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선도적으로 좌우하는 역사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지금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은 ‘개벽적인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럴수록, 그에 반비례해서 지금 한반도에 드리워진 미국과 일본, 중국 등의 그림자는 앞으로 더욱 짙어질 것도 눈에 훤히 보이는 미래상이다. 한반도 운전자론은 이제 막 시작된 우리의 미래 비전이지만, 오래된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의 적폐청산과 과감한 한반도 운전자론 드라이브가, 그 흐름을 주도하는 분들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 사회의 ‘주류교체’라는 화두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돌이켜보면, ‘주류교체’는 동학이 이 땅에 창도된 이유 [부(富)하고 귀(貴)한 사람 이전 시절(以前時節) 빈천(貧賤)이오 빈(貧)하고 천(賤)한 사람 오는 시절(時節) 부귀(富貴)로세, 용담유사, 교훈가]이며,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이다(‘왕조전복’을 목표로 했느냐 아니냐는 이와 관련해서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세종도, 정조도, 노무현 대통령도 결국에는 해내지 못하였던 그 과제가 이제 꿈만은 아닌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징조가 바로 ‘한반도 운전자론’의 본격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4. 이와 관련해서 올해의 최저임금을 정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무릅쓰고 ‘1만원’을 지향하는 결정(인상률 역대 최고)을 내린 것, ‘비정규직 0(제로)사회’를 지향하겠다는 정책 등은 우리 사회가 성장 중심의 세계에서 사람 중심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선언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본다.
특히 소위 4차 산업혁명에 따르는 ‘일-인간-삶’의 관계의 재편, 그리고 일자리 만들기를 위한 고육지책의 혐의가 없지는 않지만, ‘근로시간 단축’ 정책의 전면 시행 추진을 둘러싼 논쟁은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 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이 사회(교양적 차원에서)가 던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임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 중심의 사회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이기는 하지만, 지금 시작하기도 전에 ‘위기에 봉착한 과제’가 되고 있다. 바로 소위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한편으로는 인간세계의 확장심화(인공지능, 생명복제, 인공장기의 심화 확장과 일상화 등등)과 급격한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100년 이내에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과 더불어,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 3D컴퓨터, 무인자동차 등등, 죽음에 대한 연구, 의식의 스캔 내지 저장 등등의 사건들은 인류가 지구상의 주류 생명체가 된 이래로 가장 큰(중대한) 폭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철학적 질문의 수준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 중심’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 보자는 것이다.
다시 확인할 명제는 이것이다.
지금도 ‘근본적 직업으로서의 농부’는 한 알의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바람과 물과 밤낮의 변화를 느끼며 살아간다. 이러한 ‘농부’들이 들판에만이 아니라 도시의 빌딩 숲에도 학교에도, 공장에도 차고 넘친다. 개벽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 운전자론’은 그러한 대지(大地) 위를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 그러한 대해(大海) 위에 찰랑이는 한 차례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바람이, 그 물결이 태풍이 되고 해일이 되어 ‘천지개벽’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무엇을 어떻게 질문하느냐?”가 그 차이를 결정한다.
수운은 한울님과의 대화 끝자락에서 “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질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