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신앙과 공부의 길
*2016년 5월 1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설교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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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100세 시대 신앙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1966년생입니다. 올해 만 50세입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을 놓고 보면, 지금의 저는 딱 그 절반, 중간에 해당하는 나이입니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돌아보면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던 시간들이 보이고, 앞을 내다보면 은퇴를 하고, 노후를 맞이하며, 하루하루 나이 들며 늙어 가는 시간들이 보입니다.
수운 대신사께서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이에 계시고, 뒤에 뒤 될 것을 생각하면 자손이 저기 있도다. 오는 세상에 견주면 이치가 나의 나 된 것을 생각함에 다름이 없고, 지난 세상에서 찾으면 의심컨대 사람으로서 사람 된 것을 분간키 어렵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새삼스럽게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원로님들이 미래의 저의 모습이라는 경건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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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일입니다. 포덕 63년, 1922년에 천도교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처음으로 할 때는 5월 1일이 어린이날이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인 만큼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며, 그리고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또 5월 셋째 월요일은 성년의 날입니다. 이처럼 5월에는 가족의 사랑과 의미, 그리고 부모님의 은덕을 생각하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정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기념일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10월 2일의 노인의 날입니다. 이날은 노인 문제에 대한 국가와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고자, 또 노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보존하기 위해, 1991년 세계 유엔 사무소에서 ‘제1회 국제 노인의 날’ 행사가 열린 일을 기념하여 정한 날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사회가 주목해야 할 날은 어린이날보다는 노인의 날이라는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1920년대에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던 이유는 사실 어린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노인이 한두 분인 반면 어린아이는 열 명이 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사회는 어린이보다는 어른, 어른 중에서도 노인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어린이들은 천덕꾸러기 신세였고, ‘놈’ 자를 붙여서 부르거나 ‘부지깽이’로 두들겨 패는 일은 일상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육이나 위생은 더더욱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천도교 청년들이 앞장서서 ‘천도교소년회’를 제정하고, 어린이날 행사를 통해 어린이 인권운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장래를 어린이들을 통해 기약하고자 했던 천도교의 큰 꿈이 깃들어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때도,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날이라기보다는 어린이들이 시가행진을 하며 어린이 인권의 중요성과 어린이 복지를 주장하는 날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5월 1일 노동절에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어린이들이 스스로(물론 지도위원들의 지도를 받아서) 자신들의 권익을 주장하고, 한편으로 어린이 스스로는 어떻게 하자는 다짐을 밝히는 행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에는 그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인 인구의 비율을 통계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도부터입니다. 1960년도에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73만 명이었습니다. 이해에 넓은 의미의 어린이라고 할 수 있는 14세 미만 유소년 인구는 1,059만 명으로 노인 인구의 열다섯 배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내년 2018년에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712만 명으로, 유소년 인구 684만 명보다 많아집니다.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노령사회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1960년부터 55년 동안(그 전부터 헤아리면 더 오랜 기간 동안 경향적으로) 이 사회의 구조나 문화가 급격하게 바뀌어서 노인이 더 이상 가정이나 사회의 최고 원로나 귀한 존재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회 구조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고, 신지식이 삶의 경험에 의해 축적되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통해 ‘학교 교육’을 통해 생산, 유통되는 구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이 무슨 큰일이 나는 것처럼 여기고, 늙어 보이지 않게 하는데 돈을 쏟아붓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늙는다는 것이 죄악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노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빈곤한 노인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어린이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대상은 노인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날보다 더 널리 기념해야 하는 날은 노인의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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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늘날에도 어린이들은 1920년대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소중합니다. 즉, 출산율 저하로 어린이들이 너무 귀해졌습니다. 더욱이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연이어 크게 문제가 되었던 어린이 학대 사건을 생각해 보면, 다시금 해월신사의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라는 말씀, 또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린이날을 기념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오늘날 어린이 문제는 궁핍과 부족이나 물리적인 학대만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침, 과잉에서 오는 문제도 대단히 심각합니다. 어린이 비만 문제는 육체적인 과잉이요,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학원에서 학원으로 전전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학습 과잉이요, 외아들, 외동딸로 자라나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으로 자라는 것은 보호 과잉의 폐단입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보아도, 오늘날 사회적 약자는 사실 어린이보다도 노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동안의 사회적 변화를 생각하고, 천도교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하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 본다면, 오늘날 천도교에서 앞장서서 우리 사회의 대포적인 빈곤층으로 내몰리는 노인을 극진히 모시고 봉양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시지탄이 있지만, 지난해에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시천주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복지사업에 좀 더 본격적으로 참여키로 한 것은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제가 본 어린이날 구호 중에 “5월 5일, 오늘도 어린이날”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5월 5일 하루만이 어린이날”이 아니라, 365일이 어린이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10월 2일 노인의 날만이 아니라, 365일이 모두 노인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몇 년 전부터 이른바 노인연금이라고 하는 기초연금이 노인들에게 지급되기 시작했고, 점차 그 대상이 늘어나고 지급액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또한 각종 요양시설이나 의료보험, 대중교통 무료 이용 등의 혜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개개인의 마음가짐, 그리고 문화적으로 노인 공경 문화가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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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는 지금도 천도교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경대전 논학문에서 수운 대신사께서는 3.7자 주문을 손수 풀이하여 주셨습니다. 보통은 시천주조화정(侍天主)의 '시'와 '정' 그리고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의 지, 이 '시'.'정'.'지'를 주문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즉 우리 삶의 측면에서 보면 시천주(侍天主)의 ‘주(主=님)’라는 글자야말로 천도교 신앙의 절묘한 본령을 이야기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수운 대신사께서는 시천주의 주를 풀어서 “주라는 것은 여부모동사자(與父母同事者), 즉 부모와 더불어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대상은 물론 한울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울님을 부모님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더불어 섬긴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한울님을 부모님처럼 섬기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 문장, 즉 여부모동사자(與父母同事者)라는 문장만 놓고 볼 때, 부모님은 한울님과 동격으로 동등하게 섬기는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천도교에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를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물물천 사사천(物物天 事事天)을 이야기합니다. 사인여천은 해월신사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해월신사께서 사인여천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여부모동사자라는 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모든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긴다는 것은, 부모님을 한울님과 더불어서 같이 섬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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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가 앞으로 걸어가게 될 노년의 삶을 생각하면서, 저 자신의 미래로서 제가 살고 싶은 노년 삶의 모습, 다시 말해 천도교 신앙을 하면 어떤 노년의 삶을 사는가, 어떤 노인이 되어야 하는가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첫째, 후천개벽 시대의 노인은,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주인입니다. 주인은 상석에 앉아 있기도 하지만, 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신유년 유월에 수운 대신사께서 용담정의 문을 열고 제자들을 맞아들인 것, 즉 개문납객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늙었다’고 뒤로 물러 앉아 대접만 받겠다는 것은 선천의 노인의 모습이라면, 후천의 노인은 언제나 자기 삶의 중심에서 주인으로서의 모습을 지켜 나가는 당당한 노인이어야 합니다.
둘째, 후천개벽 시대의 노인은,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천도교의 공부는 수련과 교리 공부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것만이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삶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기도 하고, 사회봉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돕기도 하고, 아니면 젊은 사람들의 활동을 배우고 익혀도 좋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이야말로 늙어감에 지는 것이 아니라, 늙어 감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때는 ‘노인’이라도 ‘새로운 사람’이며 세대를 넘어 누구와도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으며, ‘살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65세에 크게 성공을 하여 큰 재산을 일구고 은퇴를 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며, 일을 손에서 놓고 무료하게 노년을 보냈습니다. 그분은 그로부터 30년이 되던 95세 때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하였습니다. 내가 은퇴 이후 30년을 더 살 줄 알았으면, 무엇을 새로 해도 크게 이루었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때부터 어학공부를 시작하여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다가 103세가 되던 작년(2015)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죽는 그날까지 ‘살아 계셨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 후천개벽 시대의 노인은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천도교 각 교구와 교당)를 한울님 가정으로 가꾸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현대 사회는 핵가족화로 인하여 3대가 같이 사는 것이 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일 하루만이라도 교당은 할아버지와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 손자 손녀들이 만나는 장이 되도록 하고, 나아가서, 교당에서 만나는 원로님들은 우리 모두의 부모님, 조부모님이 되고, 젊은이와 어린이들은 모든 원로님들이 내 자식, 내 손자 손녀처럼 사랑하고 서로 보살피는 곳이 되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 사회의 흐름으로 볼 때 필연적이며, 중요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 후천개벽 시대의 노인은 베푸는 사람입니다. 수운대신사께서 남의 허물을 내 마음에 논란하지 말고 나의 적은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젊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행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 지혜야말로 인생의 경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앞으로의 시대, 미래 사회에서 ‘노인’이야말로 이 사회와 인류 전체에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우리 인류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최근에 알파고, 인공지능이 크게 화제가 되었고, 큰일 난 것처럼 얘기한다. 모두들 인공지능이 좀 더 보편화되면, 직업의 50%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대부분 실업자가 될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정답을 찾았습니다. 알파고,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길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만의 길을 찾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창의성’ ‘예술’ 등으로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그것마저도 인공지능이 따라잡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찾아낸 답은 이렇습니다. 아시다시피 기계입니다.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은 바로 늙어가는 일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노쇠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망각의 기능이 포함되고, 지혜가 축적되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노인들이야말로, 미래사회에 인간의 인간다움을 수호하는 중요한 원천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좀 더 자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그러나 물질이든 정신이든 베풀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합니다. 앞에서, 우리나라의 노인들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빈곤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러하고, 물질적(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근본적인 행복은 내 것을 베푸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찾아보면, 누구나 베풀 만한 것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밖에도 노인으로서,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후천개벽 시대를 만들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교회나 공동체에서 해야 할 일은, 노인(원로)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교화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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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한울님과 더불어 섬기는 것,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 분위기를 되살려 내는 것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전통사회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닙니다. 또 그 옛날 조부모, 부모님을 모시고 3대 4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제도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님을 한울님과 더불어 같이 섬기는 사회는 오래된 미래로서 후천개벽 시대의 자화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한울님과 더불어서 섬기는 사회’에 부모님, 다시 말해 노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도 옛날과는 다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오.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젊은이가 아니라, 노인일 것입니다.
천도교에서는 몇 년 전부터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행복해야 하고, 어린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노인이 행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행복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본받고 싶은 노인, 존경하는 어른들이 많아야 합니다. 내가 닮고 싶은 어른들이 많다면, 어린이들은 어떠한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회도 노력하고, 교회도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인구 노령화를 무슨 큰일처럼, 사회가 망하는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생산력으로 보는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입니다. 물론 저출산 문제는 대안을 모색해서 해결해 나가야 하지만, 인구 노령화는 우리 모두가 육적인 장생을 누리는 일이라는 차원에서, 그 자체로 존중하고 노인들이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하며 공경하는 국가 시책을 더 넓게 펼쳐 나가는 방향으로 대처해 나가면 되는 일입니다.
오늘 가정의 달을 맞이하는 첫날에, 저 자신이 100세 시대의 중간 세대로서,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로서의 입장과, 그리고 선배이자 어른들인 원로님들을 모시는 입장, 나아가 앞으로 늙어갈 미래의 노인으로서의 입장으로 우리 사회의 노인, 숙덕 어르신들에 관하여 몇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 부모님과도 같은 노인들의 문제에 천도교가 이바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답해야 하는 것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어린이 사랑과 부모님 봉양과 노인 공경을 생각하는, 특히 원로 숙덕 어른들께서는 당당히 이 시대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길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며 말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